▲노성산에서 계룡면 뜰과 계룡산
▲노성산 정자에서 조망한 후 나무계단 길로 내려간다.
▲노성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운동기구가 보이고 나무 계단으로 내려간다.
▲나무계단 따라서 내려 금강대도 노성본원 곁으로 내려간다.
▲노성산 정상에서 140m거리의 내림길에 잘 정비된 금강삼종대성사부성산묘(금강대도 창시자 토암
이승여의묘)
▲금강대도 노성본원의 기와지붕이 보이는 곳에 닿는다. 사찰 뒤 좌측 계단으로 내려간다.
▲금강대도 노성 본원표지석
▲좌측 등로 옆에 삼신암과 칠성암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 뒤에는 총석사라고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이곳이 총석사라는 절터였던 모양이다.
▲55호기념물 노성산성 표지석이 보이고
▲금강대도는 1874년 이승여(李承如)가 창시한 종교이다. 이승여는 고려 시대 이색(李穡)의 18세 손으로,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898년 서자암(徐慈庵)과 결혼하여 자신은 금강 도사(金剛道師)라 하고, 서자암은 연화 도사(蓮華道師)라고 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교의 길에 나섰다. 1910년 계룡산 신도안 백암동으로 옮겨 많은 제자를 얻었으며, 1923년에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구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성전을 짓고 교화에 힘쓰다가 1934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수많은 제자들이 군사부일체의 뜻으로 3년간 중복(重服)을 입었다고 하며, 1937년에 장남인 이성직(李成稙)이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성직은 교리 및 예법의 체계화에 주력하였고, 1941년에는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정책에 의해 성전이 헐리고 10여 명의 제자가 순교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57년 2세 도주가 죽고, 1964년에 3세 도주로 장남인 이일규(李一珪)가 도통을 계승하였다. 3세 도주는 도장의 성역화 및 종단 조직의 확대에 주력하여 현재 전국에 1백여 개의 본원·분원 및 회관을 두고 있다. 토암(萬法敎主·金剛三宗大聖師父), 청학(東華敎主·金剛三宗道聖師父), 월란(通天敎主·金剛三宗德聖師父)의 3대를 금강대불(金剛大佛)이라 하고, 그 부인들인 자암(萬法敎主·蓮華三宗大聖師母), 보단(寶丹,東華敎主·蓮華三宗道聖師母), 향련(香蓮, 通天敎主·蓮華三宗德聖師母)의 3대를 연화대불(蓮華大佛)이라 하여 음양평등의 삼위일체 미륵대불로 신봉하고 있으며, 태극무극현화천존(太極無極玄化天尊)·옥황대천존(玉皇大天尊)·구천개화대교주(九天開化大敎主)라 하여 천상의 삼청경(三淸境:太淸·上淸·玉淸)에 있던 천존이 화신한 것으로 신봉하고 있다. 교리는 천·지·인 삼합의 원리에 순응하며, 인간의 도덕을 수립함에 있어 유·불·선 삼도를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원리로 통합, 실천하여 심(心)·성(性)·신(身) 삼합의 경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내단(內丹)·외단(外丹)이 합일된 진단(眞丹)을 이루어 차생군자(此生君子)와 내생선불(來生仙佛)의 극락을 향유하게 하고, 인류 사회에서는 도덕 문명이 개화되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경전으로는 토암이 신도(神道)로 직접 구술한 28권을 통칭 『대원경(大圓經)』이라 하며, 『대정경(大正經)』·『대방경(大方經)』 등이 있다. 신도들은 <보고 寶誥>라고 하는 글을 수시로 외우는데, 이때 향·초를 피우고 목탁과 바라를 친다. 실천 계율로 금강 실행 신조(金剛實行十條)·금강 삼대 보훈(金剛三大寶訓)·금강 십계율(金剛十戒律)이 있는데, 내용은 가화(家和)·심신 청결·충·효·성경(誠敬)이 핵심이며, 육식을 금하고, 글씨가 씌어 있는 모든 종이를 소중히 여기며, 부정(不淨)을 가리는 등 특이한 계율도 지니고 있다. 도주의 탄일과 제향일을 비롯하여 일 년에 16회의 총회일이 있어 치성을 올리며, 겨울에 성제(誠齊)라고 하는 정기적인 수련과정이 있고, 여름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수련법회가 열리고 있다. 이미 민족 항일기부터 상당한 교세를 보여 독자적인 계통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경기·충청·경상도 지방으로는 상당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