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선생 문집 속집 발문〔聾巖先生集續集跋〕[이중철(李中轍)]
농암 선생 연보와 속집 간행을 마치고, 또 당시 제현들이 창수한 시문 중에 원집과 부록에 누락된 것과 서원 창건 때 제가들의 글과 이장할 때 제문은 종류별로 나누어 뒤에 붙여서 후세들이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손(胄孫) 재명(在明) 군은 나이도 젊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또 선조의 뜻을 잇는 데 간절하였다. 문중의 어른 병연(昺淵) 씨와 창연(昌淵) 씨의 명으로 효산(曉山)의 우사(寓舍)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어른께서 편수(編修)하고 교정하는 일을 미리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서문을 한 말씀 써 주셔서 편집한 전말을 자세히 알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이 일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400년 동안 이루지 못해 비통해 하던 일이 석 달 사이에 이루어진 것은 선비들이 정성을 다하고 목수가 부지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문(斯文)이 드러나고 묻히는 운수가 있고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 점을 징험할 수 있었다.
선생의 충효와 학덕, 언행과 풍모는 일찍이 우리 선조〔이황(李滉)〕의 문집을 읽고서 상상할 수 있었고, 선생이 복록을 크게 누린 것과 후학에게 은혜를 끼친 것은 지금 연보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선조의 문집은 바로 선생의 연보 중에서 근거가 명확한 것이고, 선생의 연보는 곧 우리 선조의 문집에서 뽑아 모은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집안의 정의(情誼)가 한 집안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증조부 농와(聾窩) 부군이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원장이 되어 온 마음으로 존모하여 일에 따라 정성을 다하였던 것은 우리 선조께서 선생을 앙모하였던 것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불초한 내가 이 일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우리 증조부가 분강서원에 대해 했던 일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이제부터 몇 천 년 뒤에 몇 천 년 전의 선생의 도를 구해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 책을 아무개가 시작하고 아무개가 보유(補遺)하고 또 아무개가 간행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사실은 모두 앞의 발문에 실려 있다. 마침내 참람한 죄를 잊고 오직 이름이 섞이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쓴다.
이 일을 도운 사람은 후손 규섭(奎燮), 흥연(興淵), 설연(卨淵)이고,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주손의 생부 유용(裕容), 후손 참봉 식연(植淵)과 유학(幼學) 양연(瀁淵)이다.
신해년(1911) 섣달 상순에 후학 진성(眞城) 이중철(李中轍)이 삼가 쓰다.
[주1] 농와(聾窩) : 이언순(李彦淳, 1774~1845)으로,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관(景寬), 호는 농와이다. 1804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ㆍ공조 참의ㆍ동부승지ㆍ대사간ㆍ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주2] 이중철(李中轍) : 1848~1934.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중원(仲圓), 호는 효암(曉庵)이다. 1902년 음직으로 혜릉 참봉(惠陵參奉)을 지냈고, 1913년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면서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을 편찬하였다. 문집으로 《효암집》이 있다.
聾巖先生集續集跋[李中轍]
聾巖先生年譜與續集旣刊訖。又以當時諸賢唱酬詩章之見漏原集附錄者。及刱院時諸家文字。緬禮時祭文。類次以付于後。俾來世得有所攷。其胄孫在明君。年藐敏學。且勤奉先繼述。以門父老昺淵,昌淵氏之命。訪余曉山寓舍而言曰。翁已預知於編修丁乙之役。願置一言卷端。庶悉輯成顚末。余豈敢是寄當。雖然。將此四百年有悲未遑之事。奄見告成於數三月之內者。不徒士殫工勤。可驗夫顯晦斯文。時亦有待之會。而先生忠孝德學。言行風節。曾讀吾先集而想像之。先生厚享福祿。嘉惠後學。今因年譜而尤詳焉。蓋吾先集。乃先生譜之攷據有的也。先生年譜。卽吾先集中之摭取湊合也。是以。知兩家之誼同一室。而吾曾王考聾窩府君之爲主汾院也。一心尊慕。隨事殫誠者。體念吾先祖之傾仰先生也。今吾不肖之不敢自外於斯役者。亦體念吾曾王考之於汾院也。嗚呼。自玆以往。幾千百歲之下。欲求先生道於幾千百歲之上。將捨是書何以哉。是書之某也刱。某也補。又某也之營刊未果。皆載前跋。遂忘僭妄爲罪。惟以廁名知榮。於是乎書。而相其役者。後孫奎燮,興淵,卨淵。主其事者。胄孫本生爺裕容。後孫參奉植淵及幼學瀁淵云。辛亥臘月上浣。後學眞城李中轍。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