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계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란 무엇인가?
그러면 계약적 율법주의란 무엇일까? 샌더스(새 관점학파 신학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선택이나 출애굽의 역사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유대교의 출발은 먼저 다가오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신약의 칭의의 사건과 유사한 것이 아브라함의 선택이고 이스라엘의 선택이다.
그런데 계약적 율법주의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이 은혜의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속적 은혜 가운데 머물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지켜야 했다. 계약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적으로 머물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다. 계약적 율법주의란 말의 뜻은 이 계약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인 이유는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속죄의 길을 마련하신 것이다. 계약을 어긴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속죄를 해야 한다. 참회는 속죄를 위한 전제이다.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는 계약을 참으로 바르게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계속적인 계약의 불이행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서 추방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계약의 불이행의 죄악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이 계속적 불이행의 죄악 속에 있는 자들이 많이 있어도 소수의 남은 자들은 있었다.
샌더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가르치는 제2성전기의 문헌들이 존재한다. 이 문헌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율법은 거룩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계속적인 계약의 불이행은 비극의 원인이지만 하나님은 속죄의 길을 마련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된다. 이것이 계약적 율법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던이나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신학은 이 계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바울은 유대인이었고 이 계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 바울이 발견한 새로운 것은 유대 민족주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끝나고 보편적 구원의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었다.
즉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녀가 참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고 예수를 믿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녀가 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의 새로움이었다.
던이 보기에 바울이 의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의 목표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종단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이다. "계약은 더 이상 민족주의적이거나 종족주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계약은 유대인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렇다고 계약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약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것만큼 확장되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던이나 라이트 등의 새 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바울의 새로움이다. 이들에 의하면 바울은 계약적 율법주의를 파기한 것이 아니다. 루터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구원론은 유대주의를 율법주의로 규정하고 율법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표현을 쏟아 내었는데 이는 큰 오류이다. 바울은 율법을 파기하거나 가치 절하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는 것을 전한 사람이었고, 유대인들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할례나 안식일법, 정결법 등은 이제 폐기되었고 이방인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언급한 사람이었지, 유대교의 본질적인 계약적 율법주의를 파기한 사람은 아니었다. 던이나 라이트가 볼 때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은 유대주의의 계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새 관점 학파의 이론은 상당 기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영향만큼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새 관점을 수정하는 더 새로운 관점(newer perspective)이 등장했다.
이 더 새로운 관점의 대표자인 바클레이는 새 관점의 약점을 두 가지로 언급했다. 첫째는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로 규정한 샌더스에 대한 비판이었다.
바클레이는 유대교를 일방적으로 율법주의라고 규정한 과거의 규정에도 오류가 있었지만,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로 규정한 샌더스의 주장 역시 오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제2성전기 문서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율법주의의 특징을 갖는 문헌들과 은혜의 종교의 특징을 갖는 문헌들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헌 개개의 특징과 다양성을 언급하지 않고 이 문헌들이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이다.
이 바클레이의 주장은 매우 정당하다. 제2성전기의 문헌들은 매우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몰아서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엄밀성이 결여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바클레이의 또 하나의 중요한 비판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비판이 할례나 안식일법 및 정결법에 대한 비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다. 또한, 바울의 새로움이 단지 구원의 보편주의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바울의 비판은 율법 자체를 향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 밖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랍고도 상응하는 조건이 필요 없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구원이 율법 밖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이 바클레이의 비판은 계약적 율법주의에 근거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기본적 전제를 허무는 것으로 매우 가치 있는 비판이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이론의 출발점이 된, 또한 계약적 율법주의라는 표현을 정착시킨 샌더스는 바울의 관점은 율법의 무능을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유대주의의 기본적 정신과 충돌한다고 바울을 비판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새 관점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가운데 샌더스와 그 이후의 던과 라이트를 구별해야 하는 점이다.
샌더스는 유대 랍비에게서 유대교를 공부한 학자로 바울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학적으로 유대교와 바울의 종교를 연구한 학자였고, 바울을 유대교와 상당히 다른 특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파악했다.
샌더스에 의하면 율법에 대한 유대주의의 관점과 바울의 관점은 매우 다르다. 율법의 무능에 대한 가르침은 유대주의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무능을 언급하고, 율법 밖에 있는 다른 의를 언급하 는 사람이다.
샌더스에 의하면 계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주의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지 바울신학의 특징은 아니다. 샌더스는 바울의 종교와 계약적 울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교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은 종교인지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바울의 종교에 대한 존경을 없애고 유대교에 대한 멸시를 없애고 객관적으로 두 종교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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