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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예시대 한국가람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學亭 이재익
계유정난과 사육신
[ 내용 ] 1. 계유정난과 김종서 (이재익) 2. 사육신 논쟁 (이재익) 3.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사육신의 절의) (이재익) 4. 세종의 길, 세조의 길 (동아일보 /박현모)
계유정난과 김종서(金宗瑞) 이 재 익 (학정)
김종서 (1390~1453)의 호는 절재, 본관 순천이다. 문관 출신이나 세종 때 함길도 절제사가 되어 1434년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조선의 국경으로 삼았다. 그는 이 때 우국충정이 깃든 호방한 시조를 읊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휘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에라 장백산(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떠타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라
김종서는 세종의 명에 의해 고려사 개편 총책임 (지춘추관사)을 맡아 문종 때 고려사, 고려사절요 완성하였다. 단종 때는 좌의정이 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란 1453년(단종1년) 수양대군이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표면적 이유는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김종서(좌의정), 황보인(영의정) 등이 역모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고 일으킨 정변이었다.
김종서, 황보인은 피살당하고 안평대군(세종3자, 문학 예술을 좋아했음)은 강화도에 귀양갔다가 사사 당하였다.
이때 김종서는 자기 집에서 수양대군의 기습 공격으로 아들 승규, 승미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산소는 충남 공주군 장기면 대교리 국사봉에 있다.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단종 모후 권씨는 남편인 문종이 즉위하기 전에 세자빈으로 있다가 단종을 낳으면서 산후 부작용으로 죽었다. 문종은 현덕왕후로 추증하고 후궁만 거느렸다.
궁중에 제일 어른은 세종 후궁 혜빈 양씨였으나, 후궁 출신이라 수렴청정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자연히 실권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 황보인 김종서가 중심이 되었다. 위협을 느낀 수양대군(세종 2자, 문종 아우)이 선제공격으로 김종서 황보인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사건이 계유 정난이다. 거사가 있기까지는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결단을 부추겼다. "길가에 집을 지으면 말썽이 많아 삼년이 지나도 집이 안됩니다.(作舍道傍三年不成) 대군께서는 스스로 결단을 내리십시오."
수양대군은 겉옷 속에 갑옷을 입고 무사 세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눈치가 이상했던지 김종서는 인사를 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지를 않았다. 수양은 말에 탄 채 "종부시에서 영응부인의 일을 탄핵하였으니 정승은 이 일을 잘 처리해 주십시오.." 하고 일부러 자기 사모(沙帽)의 뿔을 땅에 떨어드렸다. 김종서는 자기가 쓰고 있던 사모의 뿔을 뽑아 먼발치로 건네주었다. 김종서의 재치로 수양의 첫번째 타이밍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겠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아들 승규에게 비밀리에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고, 눈치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승규는 몇 걸음 후퇴하였을 뿐,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두번째 타이밍을 위해, 수양은 청탁할 편지가 있다며 내밀었고, 김종서는 달빛에 비쳐 읽으려고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종이 쇠망치로 김종서의 머리를 쳐서 쓰러뜨렸다. 승규가 아버지 위에 엎드려 감싸자 무사들이 칼로 내리쳤다.
이날 밤 단종은 지금의 종로구 교동에 있던 정종 (단종의 매부)의 집에 와 있었다. 수양은 김종서가 반역을 꾀했다고 아뢰고 어명으로 대신을 부르게 했다. 군사들을 새 겹문에 배치하여 두고, 한명회의 생살부에 따라 입궐하는 중신들 영의정 황보인 등을 죽였다.
김종서는 즉시 죽지 않았고, 중삼을 입은 몸으로 부인의 가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와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미 성문은 수양대군의 심복들이 장악하여 열어주지 않았다. 다음날 수양대군이 보낸 사람의 칼에 맞아 김종서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까지 겸하여 군국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측은 과감하기는 하였으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비열한 수법을 동원하였다 고 하지 않을 수없다.
사육신 논쟁
이 재 익
1456년 6월 8일 조선 세조 2년, 사육신(死六臣)이 처형을 당하였다.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은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른다.
사육신 등은 세조가 상왕(단종) 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연회에 초청한 때를 이용해서 세조를 제거하려는 거사를 모의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를 별운검으로 임명한 기회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의 '장소가 협소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행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하였고, 왕세자도 병으로 불참하자 일이 틀어져 버렸다.
박팽년과 성삼문의 주장으로 거사를 연기하였다. 이에 모의에 참가하였던 김질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함으로써 모의는 탄로가 났다.
사육신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본다.
1) 사육신이란 말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南孝溫의 <추강집>속의 육신전에 절의를 평가하여 기록한 까닭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육신의 옥이 일어 날 때 남효원은 불과 두살인 아기였다. 훗날 여러 자료와 정보를 좁합하고, 사림들이 평가를 참고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다.
* [참고] 생육신 :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며, 벼슬을 그만두거나. 아예 나아가지 않았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고,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키며 살았던 분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2) 사육신의 옥 때에 6인 이외에도 100여명 희생되었다. 세조가 팔도에 내린 유시에서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한 사람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6신외도 박중림, 박정, 권자신, 김문기, 성승 등 17명에 이른다. 이들은 오랫동안 반역자로 취급되어 왔으나 숙종때 신원이 이루어지고 그 절의가 재평가되었다.
3) 남효온은 1478년 성종 때, 소릉(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릉) 복위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로 소릉복위를 청한 죄목으로 부관능지(관을 파내서 시신을 찢는 형벌)을 당했다.연산군 때 까지는 이와 같이 단종 어머니의 복위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 상황이었다.
4) 그러다가 중종반정(연산군 축출)으로 중종이 즉위하지 성삼문, 박팽년 등을 난신이라는 죄명을 벗겨주고, 충신으로 명예를 회복을 시켜 주자는 상소가 조심스럽게 등장했으며, 금지된 남효온의 추강집이 출간되어, 사육신의 윤곽이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5) 인종 때(1545년)에 한주가 시강원에서 추강집의 사육신 충절을 거론한 것이 인종실록에 수록됐다.
6) 1691년 숙종 17년에 사육신의 명예가 비로소 회복되었고, 묘우(묘의 관리와 제사를 위해 설치한 건물)를 만들어 제사를 지낼 수있게 되었다.
7) 1791년 정조 15년에 사육신 뿐만 아니라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까지 절의를 숭상하는 범위를 넓혔다.
-육종영(六宗英) : 안평대군 등 종친 6명 -사의척(四懿戚) : 외척 4명 -삼상신(三相臣) ; 황보인, 김종서, 정본 3명 정승 -육신(六臣=死六臣) : 성삼문, 이개, 유성원,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삼중신(三重臣) : 민중, 조극관, 김문기 -양운검(兩雲劍) : 성승, 박정 -기타 8명
세조실록 등 많은 자료를 고증하여 모두 32명을 선정하고, 의전행사에 봉행하는 정단배식인원으로 선정하여 현창(顯彰)하였다. 사육신 개념은 오랜 세월 끝에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인한 것이다.
사육신의 옥 때에 100여명이 희생되었으나, 가장 절의가 뛰어난 사육신, 주모자급은 17인, 17인을 포함해 절의가 뛰어난 인물은 32인이었고, 그외로 처형을 당한 사람은 가족들이 연좌되어 희생을 당한 것으로 볼 수있다.
8)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존 사육신에서유응부를 빼고 대신 김문기를 추가하여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은 김문기도 충절이 뛰어났으나, 사육신보다는 한단계 떨어지는 삼중신으로 평가되어 왔다. 사육신 외도 단종에게 충절한 많은 인사 중에 유독 김문기 만을 사육신 그룹에 끼워 넣으려했던 것은 당시 정치적 실세인 김녕김씨 가문의 유력자의 위력이 작용하였다고 보아진다.
32인을 모두 현창하자 !
이로서 학계에서 오랫동안 학문적인 논쟁을 해왔고, 그동안 사육신 묘정에는 김문기의 가묘가 모셔지게 돼, 사실상 사7신이 됐다. 결국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후 1982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종전 결정을 번복하고, 전통적인 평가를 그대로 지속하기로 하면서 일단락 됐으나, 오늘까지도 가문을 중심으로 논쟁을 계속하고 있어서, 이는 소모적인 역사논쟁에 불과하다고 본다.
본 필자는 이왕에 김문기가 모셔진 이상에는 묘를 철홰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은 옳지 않으며, 사육신 묘정에 기타 32명 중에 묘가 있는 7명외의 나머지 25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도 한 곳에 모아서 세워주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역사의 충절 현창은 많을 수록 좋은 일이다.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로 하자는 주장으로 갈등
1977년 이래 사육신 중에 유응부 대신에 김문기가 되어야 한다고 이이를 제기하는 주장으로 말미암은 사학계의 뜨거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추이로 전개되었다.
1977년 사극작가 구석봉이 "추강 남효온이 쓴 육신전 중의 유응부의 사실은 김문기의 사실을 잘못 기재한 것이므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여야 한다." 라고 한데서 발단되었다.
처음에는 국사편찬위에서도 김녕 김씨 문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문기의 허장을 허가하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학자들도 두 편으로 나누어졌다. 김문기를 주장하는 쪽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세조실록 2년 6월 6일조 ; 8도 관찰사 등에 보낸 선유문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김문기, 성승, 유응부…가 역적을 음모하였다 라는 17인의 기록이 있다.
② 세조실록 2년 6월 8일조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6신만을 들었으며 (역적 주모자 활동상) 김문기가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동원의 책임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③ 숙모전 배향 순서가 김문기가 수위이다.
④ 왕조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정사이고, 추강집은 전문한 바를 사찬한 것이므로 왕조실록을 중시해야한다.
* 유응부 대신 김문기라는 설에 -찬성 ; 김창수(동국대), 이현희(성신여대) 등. -반대 ; 김성균(경희대), 이가원(연세대), 이재범(인간문화재 실록 연구가), 정구복(전북대), 이재호(부산대) 등.
유응부가 맞다 쪽의 주장은
① 사육신이란 명칭이 정사(세조실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훨씬 후대에 절의를 높이 평가하던 사림파들의 평가에 따라 남효온이 추강집에서 처음 주장하였다.
② 杖訊李塏對如彭年餘皆服招 惟文起不腹 (장심이개대여팽년여개복초 유문기불복; 이개도 박팽년과 같이 곤장을 치고 심문하니 모두 자백하였으나, 오직 김문기만은 불복하였다. (편집자 해석))
'불복'도 단종 복위를 꾀한 사실에 대해 다른 주모자들은 이를 실토했으나, 김문기만이 불복(참가하지 않았다고 발뺌했다는 의미)한 것이라고 풀이하면, 김문기는 당당한 자세가 아닌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김문기는 도진무로 밖에서 병력을 지원하기로 되어있어서 당여로만 참가하였고, 주역이 아닌 종역격이었다. 세조 제거의 행동책임인 별운검 유응부가 더 주역이 아닌가?.
* 국사편찬위원회의 논쟁 마무리 ; 1982.11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 바 없다." 즉 4육신에 대한 정의가 바뀌지 않았다고하여, 논쟁으로만 끝났다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 말가? ☞ 사육신의 충절 / 이 재 익
사육신의 거사모의
1454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시켰다. 1456년 명나라 사신 송별연회를 창덕궁 광연전에서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세조와 세자,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베풀기로 되었다. 대외적으로 상왕을 잘 모시는 듯이 보이려는 속셈이었다.
성삼문 등에 의해 무관인 도총관 성승(성삼문 부)과 유응부가 별운검으로 추천되어 세조,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 일파를 제거하기로 약정하였다.
거사 당일 한명회의 건의로 운검이 취소되고 세자도 참석하지 않도록 계획이 변경되었다. 일이 틀어지자 성승, 유응부는 한명회부터 처치하고 거사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 박팽년은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 김질이 배반하여 밀고하였다.
성삼문
성삼문 (1418~1456), 호 매죽헌, 본관 창녕, 막 태어날 때 ‘낳았느냐?’ 하고 세번 묻는 소리가 났다 하여 삼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요동에 유배중인 명 학자 황찬에게 13번 내왕하며 음운연구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공이 크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쫓고 왕위에 오르니 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
ㅇ 세조의 친국 세조 ;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 삼문 ;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임을 인용하셨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습니까?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조 ; "그러면 어째서 내가 왕위를 받을 당시에 이를 막지 않고 이제야 배반한단 말이냐?" 삼문 ;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니 물러나서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죽는 것은 소용없으니,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조 ;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상왕을 다시 모신다면서 사실은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삼문 ;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저를 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뒷날 조사하니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다.)
뜨거운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라도 굴하지 않았다. 신숙주에게 고함을 치니 세조는 신숙주더러 자리를 피하게 했다.
형장에 끌려가면서 "너희는 현명한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라."
성삼문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격고최인명 회두일욕사 황천무일점 금야숙수가)
울리는 북소리는 인명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해는 기우는구나 저승길에는 주막도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 묵을 건가.
5,6 세 딸이 수레를 따라오며 우니 "우리 집 사내는 모두 죽을 것이지만 너는 딸이니 살 것이다." 라며 달랬다.
사육신은 대개 군기감 앞길에서 거열형(사람의 팔,다리,목을 각각 묶어서 5대의 수레로 잡아 당겨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했다. 아들들은 絞刑(목멤)에 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시켰다.
박팽년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본관이 순천, 회덕출신. 집현전 학사, 형조참판. 단종이 폐위되자 경회루 못에 빠져 죽으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렸다. 재주를 아껴 세조는 사람을 시켜 사실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고 칭하고 상감이라 칭하지 않으니, "그대는 나에게 충청감사시에 신이라고 칭하였는데, 지금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니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신이라고 한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뒤에 충청관찰사시 올린 문서를 조사해 보니, 臣자가 아니라 모두 巨자였다. 더욱 심하게 고문을 당해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옥사하였다.
아버지와 아들 7형제가 모두 처형되었으나.사육신 중에 박팽년만은 직계 후손을 남겼다. 마침 둘째 아들 순의 부인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종으로 삼으라는 영이 내렸다..
같은 해 그 집 여종도 임신 중이었는데 이 종이 무던한 사람이었다. 둘이다 아들을 낳으면 바꾸어서 주인의 아들은 살리고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이씨는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아 바꾸니 다 같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유응부(兪應孚)
유응부(?~1456)의 본관은 기계, 동지중추원사 (정2품)로 무인이었다. 처음에 별운검으로 임명되어, 행동으로 직접 세조를 참살하려하였다. 세조를 나으리라고도 하지 않고,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라고 칭하였다. * 別雲劍 : 2품 이상의 무관이 컬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
살가죽을 벗겼으나, 굴하지 않고, 옆에 있는 성삼문을 보고 꾸짖기를
"서생들과는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렇구나. 지난번 연회날 칼을 좀 시험하려고 했더니 너희들이 만전지계가 아니라고 거사를 연기하는 바람에 오늘 이런 화를 당하게 됐다. 너희들은 사람이면서도 지혜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냐 말이다. … 더이상 물을 것이 있으면 저 더벅머리 선비에게나 물으시오"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할 때, 낯빛을 변하지 않으며, "이 쇠는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느라'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거열형에 처해졌다.
유응부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 말가 ( 눈서리-세조의 찬탈 )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 낙락장송-사육신의 충절 )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 못다핀꽃-단종 의미 )
이 개
이 개(1417~1456)는 호가 백옥헌, 본관 한산, 이색의 증손, 직제학, 집현전 부제학. 본디 세조와는 친교가 있어 진상의 진술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도대체 어떤 법도에 불로 지지는 형벌이 있느냐? 하였으나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 안색조차 변함이 없었다.
거열형에 처해진,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지은 절명시
우정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 한 소중하지만/ 홍모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문종릉)의 송백이 꿈 속에 푸르구나! //
* 우정(禹鼎) : 하나라의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개의 솥 * 홍모(鴻毛) : 기러기 털, 가벼운 것
하위지
하위지 (河緯地 , 1387~1456)는 호 단계, 본관 진주, 선산 출신. 예조참판,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가 세조가 예조 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먹지 않고 별실이 쌓아만 두었다. 이 때 이미 70고령이었다.
"반역이라는 죄명을 씌웠으면, 목을 베면 그만이지 구구하게 물을 것이 무어요" 하고 대답하여도, 세조의 노여움이 좀 풀려 그만은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지짐을 당하는 형벌)이라는 고문은 당하지 않았다. 거열형에 처해졌고,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사육신 묘정에 허묘가 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버릴 말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 지날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렸으며, 길바닥에 물이 고여도 질펀한 길을 피하고자 금지된 길로 가지않았다. 세종이 양성한 인재 중에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유성원
유성원(柳誠源)은 본관 문화, 성균관 근무 중 소식을 듣고 부인과 영결의 술잔을 나누고, 잡혀가기전에 사당에 가서 칼로 자진하였다. 시체는 갈기갈기 찢겼고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사육신 묘정에 허묘가 있다.
사육신들은 창덕궁 모의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뒷날 관가(觀稼 ; 임금이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며,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 거사를 하기로 약정하였다. 그러나 그 전에 김질이 밀고하여 사단이 터지고 말았다.
노량진 사육신묘
참형된 시체가 형장에 뒹구는 것을 어떤 중 (김시습?)이 하나하나 업어다 매장했다. 사육신묘는 현재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남쪽에 있다.
사육신묘에는 원래 성삼문, 박팽년, 이 개, 유응부 네분만 묻혀있었고, 이름도 없이 성씨지묘, 박씨지묘, 이씨지묘, 유씨지묘라는 비석만 서 있어, 사육신들의 묘로 민간에 구전되어 오다가 1679년 숙종 때 전향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1681년 숙종 때 민절서원을 세워 사액(서원명 액자를 하사)하였다. 1691년 숙종 17년에 사육신을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복관시키고, 사우를 세워 제사지내게 하였다. 숙종은 사육신들의 절의를 파격적으로 인정하고 영혼을 위로한 마음이 열린 임금이었던 것같다.
1782년 정조 때는 육신묘비인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되었으며, 19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을 할 때, 의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이 때 하위지, 유성원 및 김문기의 가묘(허묘)도 새로 세워 단장을 마쳤다. " 누가 신하가 못 되리요만은 지극하도다. 누가 죽지 않으리요만은 여섯분의 신하됨이여. 크도다, 여섯분의 죽음이여!"
영월 청령포의 한
조선 제 6대왕인 15세 소년 단종(端宗, 이름 이홍위, 李弘暐, 1441~1457, 재위 1452년 5월~1455년 윤 6월)이 단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것은 1498년(숙종 24)때이다.
1456년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로써 노산군은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고,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였으며, 1457년(세조 3) 12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 단종의 유배지는 강원도 영월 西江 모래톱인 청령포( 淸泠浦 )이다. 영월군 남면 광전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2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짧은 거리이지만 나룻배를 타고 들어간다. 청령포는 삼면이 깊은 강이고 뒤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단종은 동서 300척(90m), 남북 390척(117m)안으로 거동에 제한을 받았고, 2개월 정도 지내다가 홍수로 인해 영월읍 객사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겼다.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시신을 ‘건드리면 삼족을 멸한다’는 명령을 무릅쓰고 수습하여 묻어준 사람은 영월 엄씨 엄흥도였다.
영월에는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쌓은 망향탑, 따라온 궁녀 등이 투신자살한 낙화암, 사육신 등 충신을 모신 창절사, 그의 능인 장릉(莊陵 ;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사적 제196호.)이 있고, 단종 사당은 영월과 태백산에 있다.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이었다. 능은 경기 양주군 진건면(眞乾面) 사릉리에 있는 적 제209호, 사릉 (思陵)이다.
[참고]
세종의 길, 세조의 길
동아일보 2010.10.16(토) [동아광장/박현모]
‘세조실록’을 보면 세조의 자질이 세종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과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로 유학에 식견이 깊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넓었다. 무예실력도 출중해서 ‘달리는 아홉 마리 노루 중 여섯 마리를 일거에 활을 쏘아 잡을 정도’였다. 또 그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井間譜)를 16정간으로 줄여 정대업(定大業)을 종묘제악에 실제 연주할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문무악(文武樂)의 자질을 고루 갖춘 군주였다. 그럼에도 세종만큼의 업적을 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즉위 과정의 정통성 결핍으로 지식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그가 ‘조선의 주공(周公 ; 주나라 무왕의 아우로 야심을 나타내지 않고, 조카 성왕을 잘 보필하였음,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시조가 됨)’ 이 되어주길 원했다. 즉, 어린 왕을 보필해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군자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단종을 밀어내고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대다수 지식인은 죽음으로써 저항하거나(사육신)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다(생육신).
왕위에 오른 후 그가 술 없이는 신하를 거의 만나지 못한 점은 거기서 비롯된 열등감 때문일 수 있다. 세조실록에는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의 ‘설작(設酌)’이란 단어가 431건 나온다. 세종실록보다 열 배가량 많다. 장소도 다양했다. 경복궁의 집무실인 사정전에서는 주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술자리를 열었고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서는 종친이나 공신을 위로하는 주연을 열었다. 궁궐 뒤쪽의 왕비 거처인 교태전에서도 술자리가 베풀어졌는데 한명회 등 최측근만을 초대했다. 왕과의 친밀도에 따라 술자리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세조의 주석(酒席) 정치는 신하들과 책을 읽어가며 국사를 의논했던 세종의 경연(經筵) 정치와 대조를 이룬다.
집현전 vs 측근… 국정운영 판이
세조가 부왕(세종)에 못 미치는 결정적인 이유는 집현전이라는 싱크탱크를 폐지한 데 있다. 그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는 데 분개해 집현전을 폐지했다. 주로 신숙주와 한명회 등 측근과 국정을 의논했다. 소수 측근을 데리고 일했던 세조는 집현전의 보좌를 받는 세종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예문관에 집현전 일의 일부를 맡기거나 홍문관을 새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어떻게 활용했나? 세종 즉위 초인 1420년에 세운 집현전의 핵심 업무는 크게 두 가지, 활발한 국정회의 이끌기와 국가의 기간(基幹)인재 육성이었다. 어전회의 수준이 곧 국력이라고 본 세종은 경연이라는 창의적 어전회의를 국정토론의 중심지로 만들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면서 회의를 이끌게 했다. 인문학 강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는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한 셈이다.
다음으로,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집현전의 주요 책무 중 하나는 리더교육 기능이다.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국가고시를 주관해 우수인재를 선발하게 했고 사가독서제라는 심화학습 과정을 운용해 전문가를 양성했다. 변계량 등 당대 석학의 집중 지도를 받게 하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가 시대를 이끌 리더로서의 안목과 자질을 갖추게 된 것은 온전히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싱크탱크가 있다. 1만여 명의 인력이 46개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일한다(2007년 기준). 연간 3조 원가량의 국가예산을 소요하지만 거기서 나온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집현전의 전통이 단절된 데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면 집현전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첫째, 다양한 전공, 구성원의 오랜 상호교류이다. 집현전 학사는 재행(才行)과 문학이 있는 젊은 사람 중에서 뽑혔는데, 전체의 20%가량이 자연과학 계열이었다. 장영실의 매형이기도 한 김담, 유효통이 그 예다. 한마디로 전공이 다른 사람이 같이 밥 먹고, 10년 이상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연구를 자극하며 창조적인 결실을 거뒀다.
흩어져 있는 씽크탱크 정비 필요
둘째, 연구와 정책의 유기적 연계다. 집현전 학사는 자기들의 노력이 곧 정책에 반영된다는 높은 긴장감 속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의 정책보고서가 올라오면 담당 실무자의 검토를 거쳐 대부분 실행했다. 경복궁의 사정전 바로 옆에 집현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싱크탱크가 최고 통치자 지근(至近)거리에 있어야 하고 동시에 연구결과를 그때그때 활용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흩어진 싱크탱크를 정비하고 집현전화해야 한다. 결과를 압박하기보다 연구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느끼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흔히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말하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평시에 영웅 재목을 기르지 않는다면 위기 시에 영웅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집현전 설립 590주년인 올해, ‘대한민국 집현전’ 만들기를 제안한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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