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와 배
강 전 섭
쪽빛 바다는 여전히 그대로다. 해조음을 실은 파도만이 기암절벽 아래 해변가 바위를 때리며 하얗게 부서진다. 비탈진 곳에 거센 해풍을 온몸으로 껴안고 수줍게 핀 해당화도 옛날 그 자리다. 주변 건물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 또한 바다의 등대처럼 학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삶의 여정을 찾아 떠난 배처럼 제각기 떠났다가 나를 찾아준 것이다.
“선생님! 빨리 오세요. 바로 이 자리에요.”
그녀들이 부르는 소리에 북적이는 인파에 묻혀 걷던 길을 멈추고 바라본다.
나의 사십 년 전 고교 시절과 그녀들의 여고 시절 수학여행 때에 기념사진을 찍던 낙산사 의상대는 여전히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고, 그 옆의 휘어진 노송은 절벽을 등지고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문득 지난 세월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추억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설익은 털복숭아 같은 까까머리 고교생들의 활달한 모습들이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다. 뽀얗게 분칠한 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칼라 사진 안 여고생들이 함박꽃처럼 환히 웃으며 달려온다.
거의 삼십 여년 만에 이루어진 추억의 수학여행이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여고 제자들이 마련한 특별한 행사이다. 마지막 교복 세대이자 최초의 자율복 세대인 그녀들. 강산이 세 번씩이나 변한 세월의 무상함 속에 이젠 불혹을 넘어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다. 각자의 삶의 방식과 인생 역정은 다르지만, 이번 여행길은 한마음이리라. 그 시절로 돌아간 그들의 눈빛은 출렁거리는 동해 바다처럼 투명하고 아름답다. 우린 첫사랑 연인들 마냥 달큼한 마음으로 낙산사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행복에 젖어든다.
만남으로 시작하여 이별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 숱한 만남 중에 그녀들과의 만남은 일상적인 만남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동병상련하던 그때 우린 만난 것이다. 이십대 후반의 내 모습이나 십대 후반의 그녀들의 모습이나 청초하고 싱그럽던 시절이다.
지적 갈망과 불타는 학구열로 교실 안은 늘 배움의 열기와 티 없이 맑은 웃음이 강물처럼 넘쳐났다. 그녀들은 주경야독으로, 난 야경주독으로 치열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심신은 지쳐있었지만 눈빛은 햇살처럼 빛났고 얼굴은 자신감이 충만한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가진 것도 크게 배운 것도 없었지만, 우리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청춘이 있었다.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던 꿈 많던 시절이었기에 우리는 숱한 삶의 애환 속에서도 많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았다.
낙산사의 경내를 둘러보고 의상대로 향하는 비탈길에서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세월의 흐름만큼 주변 풍경이 낯설다. 천년 고찰 낙산사의 고색창연한 단청과 울창한 소나무 숲, 산사를 오르내리는 고즈넉한 오솔길, 오래된 기왓장에 이끼와 바위솔로 뒤덮여 운치 있던 의상대 지붕도, 깔깔거리던 해맑은 소녀들도 사라지고 없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들의 고운 심성이다.
70년대의 나와 80년대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로 겹치며 나의 인생길을 생각해 본다. 만 번의 흔들림을 이겨내고 이젠 삶의 동반자로 다가온 그녀들. 긴 시간 오가는 버스 안에서의 걸쭉한 수다와 현란한 행동은 중년 여인네의 전형적인 몸짓이지만, 대웅전 앞에서 간절하게 가족의 안위를 비는 엄숙함은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험한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개척하며 나뭇결만큼이나 다양한 질곡의 세월을 헤치고 살아온 그네들이 자랑스럽다.
일상을 훌훌 털어내고 떠나는 여행길은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설렌다. 이번 동행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추억을 회상하고, 우정을 엮은 영원히 잊지 못한 아름다운 소풍길이다. 긴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며 만추의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가는 그녀들과 또 다른 삶의 이정표를 만든 하루다.
바다가 분주해진다. 항구를 떠난 배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이다. 항구에 어둠이 깔리면 등대는 칠흑 같은 바다에 빛을 전한다. 세상을 밝히는 빛은 많다. 등불은 밤을 밝히고, 꽃은 고운 빛깔과 향기로 온누리를 밝힌다. 외로운 섬의 등대는 불을 밝히며 뱃길을 인도한다. 등대와 배처럼 스승과 제자 관계도 마찬가지이리라. 과연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길에서 그들에게 등대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였는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삶의 향기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에서 만들어진다. 인생의 항해에 함께 노젓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 여행길임을 깨닫는다. 나의 남은 생을 묵묵히 바다를 지키며 어두운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처럼 불을 밝히며 그녀들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등단
·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충북수필문학회,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 현)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딩아돌하문예원 운영위원장
첫댓글 강전섭 선생님 옥고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