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19>엔세이지(圓淸寺) 소장 범종과 전 낙수정 동종(傳 樂壽亭銅鍾)
두 고려 종이 쌍둥이처럼 닮은 까닭은?
11세기 고려 전반 제작 추정
높이 70cm로 크기 비슷하고
당좌와 세부 문양 거의 동일
같은 공방 주조 예측 가능해
금속주조 연구서 매우 중요
이번에 소개될 두 범종은 외형과 크기가 유사할 뿐 아니라 문양도 거의 같아 동일한 공방에서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일찍부터 추정되어 온 작품이다. 다만 낙수정 종은 상부의 용뉴와 음통이 어느 시기인가 파손되어 현재 철로 고리를 만들어 붙여 놓았다.
전 낙수정 동종(傳 樂壽亭銅鍾)
특히 이 낙수정 종은 일제강점기 때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이 구입하여 일본 대자이부(太宰府)에 있던 수성원(水城院)에 기부한 것으로서 1960년대 이후 매각되어 그 소재가 갑자기 묘연해지게 되어 이후의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종의 마지막 소장자였던 타카하라 히미코(高原日美子) 여사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기증을 의뢰하게 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었고 보물 1325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 종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된 연유는 바로 전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즉 종을 처음 조사한 마츠오카 히토시(松岡史)의 조사 내용에 의하면 사이토 총독이 일본 수성원(水城院) 주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이 종이 전주의 박영근 소유의 낙수정(樂壽亭) 이란 정자의 나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에는 종이 발견된 장소에서 메이지(明治) 42년(1909) 음력 3월15일에 순화(淳化) 2년(991) 개원사(開元寺)란 명문 기와가 출토된 기록도 보이고 있어 최소 이 종은 같은 해나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출토된 사실과 명문 기와를 통해 이 곳이 고려시대 초기 사찰지로 추정되지만 어디까지 편지의 내용인 점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동일한 외형과 문양을 지녀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이 두 종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두 점 모두 원 크기가 1m에 가까운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종으로서 명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고려시대 전기에서 11세기를 넘어서지 않는 제작으로 보인다. 종신은 기타의 고려 종에 비해 가늘고 긴 편으로서 그나마 용뉴가 잘 남아있는 엔세이지(圓淸寺) 종을 살펴보면 용두는 보주로 천판과 연결되었고 뒤에 붙은 가늘고 긴 음통에는 대나무 모양의 마디로 구획하여 위, 아래로 붙은 연판문(仰·伏蓮文)을 시문하였다.
엔세이지(圓淸寺) 소장 범종
두 점의 천판 바깥쪽을 둥글게 돌아가며 두 겹의 연화문을 높게 부조시켜 장식한 점도 동일하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그 문양이 서로 달라 상대에는 반원형의 문양을 연속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의 여백 면에는 반대 방향으로 마주보게 된 능형(稜形)의 화문을 장식하였다. 반면에 하대에는 조밀하게 장식된 넝쿨형의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상대 아래의 4방향에 있는 연곽대에도 역시 하대와 동일한 당초문으로 장식되었고 연곽 내부에는 연화좌 위에 높게 돌기된 연뢰(蓮)를 9개씩 배치하였지만 일부의 연뢰는 부러져 탈락되었다.
종신 앞, 뒤면 두 곳에는 연화문 주위를 당초문으로 두른 원형의 당좌를 두고 이 당좌를 중심으로 좌, 우측에 천의를 날리며 구름 위에 앉아 합장한 모습의 공양 비천상(供養飛天像)을 서로 마주보도록 높게 부조하였다. 이 공양자상은 비행하는 모습처럼 몸을 옆으로 튼 채 천의와 구름이 뒤로 날리는 율동감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비천상 아래와 천의 뒤로 표현된 율동적인 두 겹의 구름문은 앞서 살펴본 일본 온죠우지(園城寺) 소장의 청부대사종(靑鳧大寺鍾: 1032)이나 후쿠오카시(福岡市) 쇼우텐지(承天寺) 종(1065)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 문양은 그 보다 훨씬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오히려 비천상의 모습에서는 1010년에 제작된 천흥사종((天興寺鐘)의 자세와 비교될 만 하다. 따라서 그 제작 시기는 11세기 중엽을 넘지 않는 시기로 추측된다. 나아가 엔세이지(圓淸寺) 종의 용뉴가 아직 천판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며 두 점의 연뢰가 온죠우지(園城寺) 종에 비해 매우 높게 돌출되어 있는 점, 그리고 천흥사 종에 보이는 공양 비천상 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 이 두 범종은 11세기에서도 온죠우지종 보다 늦지 않은 11세기 전반 경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한편 낙수정 종은 현재 원래의 용뉴와 음통은 남아있지 않지만 용두는 부러져 한쪽 다리만 남아있으며 그 위로는 어느 시기인가 종을 걸기 위해 철 고리를 부착시켰다. 이 종의 현재 높이는 71.7cm, 구경 50cm의 크기이지만 종신의 높이만 비교해 볼 때 69cm로서 엔세이종과 일치한다. 이처럼 크기가 거의 동일하면서 문양도 마치 쌍둥이처럼 같다는 점에서 원래 이 두 종은 같은 공방에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종은 일본의 사형주물(沙型鑄物)과 달리 밀납(蜜蠟) 주조를 종 제작에 이용하기 때문에 같은 틀을 두 번 이상 사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한번 사용한 틀은 깨어 버리고 그 때마다 새로운 틀로 제작하기 때문에 자금까지 동일한 범종이 여러 번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낙수정 동종과 일본 엔세이지 동종이 마치 같이 만든 것처럼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동일한 문양판(文樣板 : 지문판(地文板)이라고도 함)을 반복해서 사용한데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이를 반영하듯 이 두 범종의 당좌와 세부 문양은 거의 동일하지만 천판 외연부에 둘러진 연판문대와 공양비천상의 경우 낙수정 종이 좀 더 고부조로 표현된 점에서 비록 같은 문양판을 사용하더라도 주조 이후 약간 높낮이가 달리 완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에 장인 집단에서 동일한 문양판이 사용되거니 전승된 것은 같은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 금고(金鼓)와 범종의 당좌 등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이처럼 대형의 범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문양판을 이용하여 두 종을 같이 주조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이 두 종이 거의 유일하다. 그런 점에서 이 두 범종은 고려시대 금속 주조기술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명문은 없지만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서 두 점 모두 보물과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여음(餘音)
엔세이지 종은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경장(慶長) 5년(1600)에 쿠로다(黑田長政)가 기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임진왜란 직후 우리나라에서 약탈된 것으로 추정된다. 낙수정 종 역시 비록 후대이지만 사이토 총독에 의해 1900년대 초에 일본 수성원에 넘어가게 되었고 동일한 형태와 문양을 지녔던 두 종은 우연이지만 타국에서나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함께 소장된 인연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금세기 들어와 한 점이라도 국내로 기증되어 퍽이나 다행스럽게 여겨지지만 이 쌍둥이 종은 이제 바다 건너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 운명을 맞게 된 점에서 무척이나 착잡한 심정이 든다.
[불교신문3345호/2017년11월15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