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었다. - 성냥공장 아가씨- (민다성)
하루에 한갑두갑 일년이면 몇갑이냐 서울에선 뻐스타고 고향갈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미스김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씨는 더 예뻐 서울에선 뻐스타고 고향갈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멋쟁이
하루에 한갑두갑 일년이면 몇갑이냐 서울에선 뻐스타고 고향갈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미스김 이 노래를 저속하게 개사해서 많이 불러댓다 물론 군가도 아니고, 진중가요라고도 할 수 없는 통속적인 노래이다. 이 곳에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저속한 그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도 한 갑 두 갑 일년에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일본인들이 인천에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공장설치도 일체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한국 시장을 독점하고서는 성냥 1통에 쌀 1되라는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 사람의 손으로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후에는 150여 개 업체로 정리되었고, 1970년대부터 자동화시설로 전환함에 따라 업체 규모의 대형화로 업체수가 20개로 감소되었다.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성냥공장도 인천의 대한성냥이었고, 성냥공장이 자동화시설을 갖추고
또한, 우리 나라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 이전까지국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소득 수준이 낮았으니 국민 대부분이 돈이 없었고 소비도 많지 않았다. 신발도 짚신을 신거나 집 주위에서는 맨발로 다닐 만큼 절약했고, 옷도 천을 사다가 집에서 해 입는 경우가 많았다. 군것질은 보통 사람에게는 사치였고, 외식이란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절약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냥이었다. 전기가 일상화 되기 전인 1970년대 이전까지도 매일 불(남포불, 등잔불, 촛불 등)을 켜기 위해 성냥이 있어야 했고,전기 밥솥이 없으니 밥을 짓기 위해서도 성냥이 있어야 했으며, 라이터가 귀한 시절이니 담뱃불도 성냥이었다. 즉, 성냥은 집집마다 반드시 소비해야하는 당시로서는 불황이 없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다. 먹을 것을 아끼고, 입을 것을 절약하며 일을 했다. 그러다가 명절 때 귀성하는 날 그 아가씨들이 고향에 가져가는 선물 보따리 속에는 귀금속은 아니지만 집에서 꼭 필요한 생필품인 성냥 눈물겨운 그 성냥이 들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훔치다가 들켜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받기도 했을 그 시절의 누이를 생각하면 서러운 마음도 든다.
성냥공장 아가씨 / 민다성 1 절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하루에 한갑두갑 일년이면 몇갑이야 서울에선 버스타고 고향갈 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 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미스김
2 절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씨는 더 예뻐 서울에선 버스타고 고향갈 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 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멋쟁이
3 절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하루에 한갑두갑 일년이면 몇갑이야 서울에선 버스타고 고향갈 땐 자가용 삐까번쩍 쏙 빼입고 폼나게 데이트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미스김 |
출처: 천수만 이무기 원문보기 글쓴이: 천수만
첫댓글 그러니까요
구전가요가 아닌 노래가
있었네요...
구전가요을 채록하여 한것인지
아니면.
이 노래가 먼저인지는 모르것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