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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잘나가는 친구의 변신
<김&장 법률사무소>에서의 내 변호사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잘 나가는 친구"로 불렀고,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염려하던 주위분들의 걱정도 말끔히 씻어냈다. 내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가슴 한 켠을 무언가가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건 거의 부채감에 가까웠다.
"독재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않겠다고 판검사도 단념했는데, 지금 나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처음 <김&장 법률사무소>을 다니던 85년 무렵 전두환정권의 폭압정치는 끝간 데 없이 치닫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아득히 멀어졌고, 무수한 학생, 노동자, 재야운동가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개인적인 성공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그것을 위해 온 정열을 쏟아붓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진보적인 독서 서클을 만들어 사회 문제에 관해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나마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봄, 가을이 되면 나는 열병을 앓았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차로 로펌의 변호사 업무에도 회의가 들었다. 나는 고민에 빠져드는 시간이 잦아졌다. 혼자서만 잘 살려고 한다면 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변호사란 진정 무엇인가 하는 직업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계속 고개를 내밀고 나를 괴롭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날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느 경우든 변호사 업무는 의뢰인에게 최대한의 법률 서비스를 해야 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의사가 어떻게든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의사와 변호사 사이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흉악범을 살린 의사와 능란한 변론으로 흉악범을 살려낸 변호사는 각각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분명 의사는 변호사만큼 갈등에 시달리거나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서 변호를 해도, 그것이 궁긍적으로 사회 정의에 반대되는 쪽을 이롭게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로펌의 변호사의 활동이 반드시 사회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는 없었다. 내 노력으로 돌아간 기업의 이익이 부동산 투기나 정치 자금으로 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누구나 변론받을 권리 있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스스로 위안해 보았지만, 비즈니스 변호사로 성공해서 이름도 얻고 돈도 벌겠다는 꿈이 이젠 아예 허황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비지니스 변호사로 성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는 많지 않다.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는 서류를 작성하고 법원을 쫓아다니면서 이런 결심을 굳혀갔다. 결국 변호사에게 주어지는 온갖 특전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김&장 법률사무소>를 나왔지만 별 미련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키워주웠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내가 배운 것은 철저한 프로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
얼마 전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이 결정은 묘하게도 이미 고인이 된 조영래, 황인철 두 인권변호사의 "유작"이었다.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은 이 사건을 맡은 두 분은 "공권력이 부당하게 사기업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며 변론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분 다 승소 결정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지켜보면서 후배 변호사들은 "부당한 공권력에 정의의 이름으로 맞섰던 두 변호사의 헌신이 타계 뒤에도 다시 빛을 보게 됐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두 분 모두 나와 아주 인연이 깊었다. 그중 『전태일 평전』의 익명의 저자로 일반에까지 널리 알려진 조영래변호사는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가운데 한 분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깊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회운동에 대한 빼어난 식견은 늘 나를 압도했다. 실무를 같이 하면서 더욱 놀란 것은 그의 법률 지식이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높다는 점이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그만큼 갖추기란 쉽지 않다.
나는 점점 더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고, 어느덧 나의 사사로운 어려움까지 털어놓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떡하든 저 양반을 쫓아가야겠다. 그러면 틀림없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신들메라도 매어주면 영광"이라고 말했다던가.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조영래 변호사의 구두끈이라도 매어주며 따라다닌다면 최소한 잘못 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래저래 가까워지자, 조영래 변호사는 내게 합동 사무실을 내자고 제의했다. 그때 나는 <김&장 법률사무소>의 4년차였는데, 비즈니스 변호사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는 4년쯤 근무한 변호사에게 외국 유학이라는 특전을 주었고, 공부를 마치면 외국 로펌에서 1년쯤 실무를 익힌 다음 복귀하도록 배려했다. 그러고 나면 보통 "시니어 변호사"라 부르는 전문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원없이 공부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이 좋은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비즈니스 변호사가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결심은 이미 굳어 있었고, 조영래 변호사의 제안은 강력한 지남철처럼 나를 잡아당겼다.
조영래 변호사의 사무실에 내가 합류하면서 <남대문 합동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을 새로이 내걸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조영래 변호사와 윤종현 변호사, 그리고 내가 변호사로 일했고, 노동운동가 박석운씨가 사무실 부설로 시민공익법률상담소 소장을 맡았다.
<남대문 합동 법률사무소>을 열고 2년 가까이 정말 나는 조영래 변호사의 신들메를 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인권 변론을 하느라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사무실 재정을 꾸리고, 벌이가 되는 사건들을 주로 맡았는데 그런 대로 성공적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남대문 합동 법률사무소>의 허드렛 일꾼이었다. 하는 일에 비해 수입도 적었고, 빛도 나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떠나있었기 때문에 서운한 것도 조급할 것도 없었다. 이런 내가 딱해 보였던지 어떤 분은 "이제부터 조변호사가 글을 쓰게 되면 그 앞에 "이 글은 천 모의 도움으로 썼다"고 덧붙이라"는 농담을 하기까지 했다. 그때 조영래 변호사는 아마 나를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으로 여겼을 것이다. 솜씨가 제법 매서운 후배가 자청해서 궂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신바람을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변론을 잘하면 형량이 높아진다
<남대문 합동 법률사무소>에 몸담은 초기시절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오는 이름난 사회운동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 분들은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날 만큼 헌신적이었다. 나는 그 분들을 대하면서 헌신과 희생을 배웠다.
그러나 <남대문 합동 법률사무소>에서 일한지 2년이 되도록 나는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변호사들의 활동을 귀동냥으로밖에 접할 수가 없었다.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고,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우리 사무실에는 시국 사건의 변호 업무가 줄을 이었다.
87년 대통령선거 개표 과정에서 벌어졌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 때의 일이었다. 붙잡혀 간 사람만도 2백명이 넘는 큰 사건이었다. 마침 우리 사무실의 박석운 소장이 그 사건의 조정과 연락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그는 도무지 손이 모자란다며 나더러 좀 가보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내가 맡고 있는 역할과는 다른 일이지만 나는 얼른 뛰어가 보았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그들을 만났다. 지도부로 지목된 재야인사 김희선, 김병곤, 윤두병씨와 학생 박성준은 이미 구속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김희선, 김병곤, 윤두병씨에 대한 변론을 내가 맡았는데, 어쩌다보니 구로구청 사건 전체에 대한 변론을 내가 주도하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접견을 요구해 구로구청 사건의 지도부 인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서로 한 쪽씩 수갑을 나누어 차고 왔다. 요즘 같으면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어가면서 호통을 치며 거세게 항의했을 텐데, 그때 나는 시국 사건 변호를 난생 처음 맡은 올챙이 인권변호사였기 때문에 그러질 못 했다.
결국 나는 수갑을 그대로 채워둔 채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분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사건 당시 구로구청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권력의 무력 개입이 있기 전에 떠났는데, 이 분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어른들이었다.
구로구청 사건을 거치면서도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드러난 게 없었다. 이 사건의 진실은 정치 권력이 솔직히 진상을 고백해야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때 만난 사회 운동가들의 면면과 인간적인 모습을 아직도 나는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김희선 여사는 듣던 대로 당찬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마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젊은이들이 무색할 정도로 진취적인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법정에 들어 설 때에 "광주항쟁 구로항쟁, 노태우를 몰아내자!"며 당당히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이 소리치고 들어오는 것이야 일반적이었지만 마흔이 넘은 아낙네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풍경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렇듯 자기 주장을 펼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분은 매우 합리적이고 경우가 밝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희선씨는 한 가정의 평범한 주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시아버지를 도와 통반장 노릇을 하면서 주민들의 권익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구체적인 생활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그는 사태의 중심을 휘어잡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경찰이나. 검찰이 한치도 반박을 할 수 없게 만들고는 했다.
그 전에도 사무실에서 김희선씨를 몇 차례 만난 일이 있었지만 따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나를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위 사건이 있고 나서 그는 장기표씨를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구속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도 실은 권인숙양 사건을 확대시키지 못 하도록 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구로구청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김희선씨와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희선씨를 비롯한 지도부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뒤로 무수히 시국사건의 변론를 맡았지만 무죄판결을 이끌어낸 적은 거의 없다. 이상하게도 시국사건은 변론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형량이 무거워진다. 법으로 그들의 무죄를 천하에 밝혀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속이 상하기만 한다.
<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공안검사 대 인권변호사
"인권변호사"가 되면서 어느새 나는 법조인들 사이에 껄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자주 생기고, 그러다 보니 "빨갱이 변호사"라는 어이없는 험담이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면 짜증이 좀 나기는 했지만,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신념과 양심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은 이 축복이 얼마나 충만하고 가슴벅찬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해고 노동자 변론을 맡았을 때, 그 사건의 담당 검사가 마침 대학의 동기생이었다. 만날 때마다 그는 나에게 충고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불순 세력들하고 어울리는 거야. 이제는 제발 자네 앞길도 좀 챙기게."
그는 진심으로 나를 딱하게 여기고 우정어린 고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그가 딱해 보였다.
"이 사람아, 자네는 출세해서 좋겠어."
우린 둘이서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학에서 함께 법률 공부도 하며 청춘의 한 시절을 같이 보낸 우리 둘 사이에는 어느새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임수경 양 방북 사건처럼 전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재판 이전에 이미 여론에 의해 난도질 당해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 보기 어려운 사건을 맡기라도 하면 험담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마음으로나마 지지와 성원을 보내던 선배들도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 시절에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부딪히면 나도 참지않고 마구 할 말을 해대는 제법 과격(?)할 시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반대파를 만나기라도 하면 꼭 언짢은 얘기가 한두 마디씩 오갔다. 그 시절에 나는 구호를 외치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격했었다. 그러니 그들의 비아냥을 그대로 묵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들은 양심을 팔아먹은 자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양심을 팔아먹은 자로 몰아부치기 이전에 그들은 내 동료이고 선배였다.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공유할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려는 섬세한 노력이 필요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고 그것이 활동에도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뒤의 일이었다.
공안검사가 한낱 개인의 안이함과 출세욕에서 기인 한것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공안검사를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80년대라는 시대는 불행하게도 증오 없이는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안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증오가 부족하다"고 내심 비판하고는 했다. 이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경직된 판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나는 저항 정신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는 아직도 언성을 높여 싸워야할 대상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무죄를 위하여
변호사의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무죄를 호소하는 피고인을 변론할 때이다.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피고인들은 누구나 법정에서는 죄가 없다는 게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기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무죄를 주장하면 보통은 재판이 8, 9개월에서, 길게는 1년 3,4개월 가량 걸린다. 피고인은 그 기간 동안의 구금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확률로 따져 보아도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피고인은 전체의 1퍼센트를 넘을까 말까한다.
무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는 경우, 법원은 피고인에게 더욱 가혹하다. 판사는 피고인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무거운 형을 매긴다. 이를 일컬어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들었다고들 한다.
이렇듯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하려면 구속 기간이나 형기가 길어지는 것을 무릅써야만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정 투쟁을 포기하고 한시라도 빨리 석방되고 보자는 피고인도 생기게 마련이다.
교과서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교과서에서나 그럴뿐, 현실에서는 어설프게 무죄를 주장하다가는 더 무거운 형을 받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갇혀 있는 사람은 아무런 힘도 없다. 그들은 다들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으며,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렇듯 마음이 나약해진 피고인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곧추세우기보다는, 죄를 인정하고서라도 구속적부심이나 보석, 집행유예로 나오고 싶어한다. 어떤 피의자는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변호사에게 도리어 "무죄라고 주장하면 판사에게 밉보이게 되고, 그러면 형량이 높아질 것"이라며 죄를 인정하겠다고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지은 죄가 없으면서도 형량이 늘어날까봐 진실을 덮어 버리고, 죄를 뒤집어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죄를 알면서도 피고인에게 자신있게 싸우자고 말할 수 없는 변호사도 이럴 땐 피고인만큼이나 슬픈 존재가 된다.
이런 불행한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나는 먼저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서 피고인에게 알려준다. 이 때 피고인이 싸울 의지를 보이면 비로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변론에 임한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피고인 자신의 몫일 뿐이다. 만약 내 판단대로 밀어부쳤다가 중형을 받게 된다면 변호사로서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은 예사로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상 피고인이 무죄를 밝혀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더라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변호사들은 무수히 많은 사건을 맡지만 한 해 동안 무죄판결을 한 건 받기도 어렵다. 그렇다 보니 어렵사리 무죄를 받은 사건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몇 해 전,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특별수사부에 구속 기소된 한 공무원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피고인은 자기는 죄가 없다면서 수사관의 고문에 못 이겨 거짓으로 자백을 했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거기에다 뇌물을 주었다는 사람마저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놓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문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고, 그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하지만 진실로 자백을 했든, 허위로 자백을 했든 검사에게 자백을 하면 나중에 법정에서 부인한다 해도 그 자백을 뒤집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검사 앞에서의 자백은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반대로, 검찰 이외의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법정에서 조서를 부인해 버리면 휴지조각이 돼 버린다. 안기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피위자를 오랫동안 밀실에 구금한채 수사를 해놓고는 허위 자백을 받아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렇게 되면 그 피위자는 대중에게 명백한 죄인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런 행위는 법류적으로나 인권의 차원에서나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안기부에서의 자백 역시 법정에서 부인하면 휴지조각이기는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피의자에게 되도록 허위 자백을 하지 말라고 일러둔다. 경찰에서의 자백은 나중에 부인하기만 하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검찰에 가서 심리적으로 위축 당하기 쉽고, 자백한 내용을 부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신이 상황을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검찰 이외의 수사기관에서는 자백을 해도 관계없다.
하지만 내가 변호를 맡은 그 공무원은 이미 검찰에서 뇌물을 받았다고 자백해 버린 상태였다. 그는 법정에서 검찰에서의 자백을 부인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것이 재판부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죄 판결을 받기는 어려울 텐데, 뇌물을 받았다고 인정하면 집행유예로라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집행유예는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가슴 한 켠이 답답해 왔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처지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하면 두고두고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셔야 할 겁니다. 당장의 고통 때문에 자식들 앞에서 떳떳할 수 없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더 큰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이 해 보시겠다면 저도 싸워 보겠습니다."
얼마 후, 법정에서 나는 피고인의 자백이 담긴 검찰의 신문 조서를 부인해 버렸다. 그리고 그 조서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이것을 부동의라고 하는데, 변호사가 부동의를 하면 검사는 특신(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황)에서 조서를 꾸몄다고 입증해야 한다. 그것을 입증하려면 검사는 자백 현장에 있었던 수사관을 증인으로 세울 수 밖에 없다. 공안사건이나 시국사건에서는 의례 부동의를 하고, 수사관이 증인으로 서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일반 형사사건에서 검사의 부하직원인 수사관이 증인으로 나오는 경우는 좀체로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그 검사는 얼간이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런 좋지 않은 관행이 굳어진 데에는 변호사들이 책임져야 할 몫도 크다.
공안사건이나 시국사건 아닌 일반 사건에서 보이는 변호사들의 태도는 대개 알아서 선처해 주십사 저자세로 나가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검찰수사관마저 성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공안사건은 형사소송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내가 부동의를 선언하자 담당 검사는 사색이 되었다.
"부동의하면 어떡합니까? 소용 없으니 동의하세요."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얼간이 소리를 듣는 것이 어지간이 싫었던 모양이다.
"천변호사, 검찰 수사관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식구끼리 그러지 말고 좀 봐줍시다."
"제가 보기엔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낸 게 분명합니다. 한 사람이 받지도 않은 뇌물 때문에 감옥에 가고, 평생동안 불명예를 안고 살지도 모르는데, 그런 잘못된 관행 때문에 어물쩍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원칙만 앞세울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안 됩니다."
나로서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으므로 한 마디로 거절했다.
이런 저런 곡절을 거친 끝에 마침내 수사관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의 증언이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피고인을 때린 일이 있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피고인을 고문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 절대 없었다고 딱 잡아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증언을 한 것이다. 사람이 어리숙해서인지 한가닥 양심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 측에서는 의외의 수확을 거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나나 피고인이나 저으기 실망이 컸다. 검사는 검사대로 자기 부하를 법정에 세웠다는 이유로 나를 욕하고 나녔다.
그로부터 1년 뒤,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났다.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되었다. 피고인의 검찰 자백은 믿기 어렵고, 수사관의 증언이 사실상 고문을 시인하는 듯 하다는 이유였다.
사정 때문에 1심 이후의 변론은 나 아닌 다른 변호사가 맡았지만, 더할 나위없이 기뻤다.
그 후, 피고인은 공무원으로 복직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는 드물게 의지가 굳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드물게 운도 좋은 사람이었다. 법정에서 자신이 고문을 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하지 못한 검찰 수사관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는 행운처럼 여겨진다.
<제4부 멀지만 가야 할 길> 인권변호사라는 딱지
언제부턴가 내 이름 앞에는 "인권변호사"라는 말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 호칭은 불의에 굽히지 않고 양심에 따라 일했다는 믿음과 존경의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달갑지 않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양심에 따라 행동해 온 선배 인권변호사들과 동렬에 선다는 게 멋적고 거북살스러워서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인권"이 강조되어야 할 만큼 우울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기도 하다.
인권변호사란 결코 듣기 아름다운 말은 아니다. 여기저기 내세울만한 무슨 벼슬 이름은 더더구나 아니다. 불러주는 사람은 존경과 신뢰를 표현하려는 것이겠지만 당자인 나에게는 "인권변호사를 십년 넘게 했으면, 이제 뭔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오?"하는 놀림으로 들릴 때가 많다. 이런 내 속내는 아랑곳없이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나를 "인권변호사"라고 부르고 소개한다.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일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속으로는 멋적고 뜨악해지지만 겉으로야 달리 어쩌지 못하고 만다.
변호사 아무개라고 해도 좋을 것을 왜 꼭 인권변호사라고 하는 것일까? 변호사법 제1조에는 변호사를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보면 굳이 "인권"이라는 군말을 덧보탤 것도 없이 변호사란 이미 인권 변호사이다. 그것은 역전을 역전앞이라 하고, 처가를 처갓집이라 하는 것처럼 쓸데없이 말을 중복해서 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권변호사라는 딱지를 떼어낼 요량도 하지 않는다.
이런 딱지는 비단 변호사에게만 불어 다니는 것은 아니다. "참"교육, "어용"교수, "사꾸라"의원, "민주"노조, "운동권"학생 등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딱지가 붙어 있다. 우리 사회가 그 동안 얼마나 파행적으로 치달아왔는가를 반증하는 딱지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문민정부"가 들어 서고 난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런 딱지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여전히 참교육이 있고, 어용교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 사회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변호사와 인권이 따로 놀고, 법과 인권이 어긋나 있다. 인권변호사란 호칭을 내가 좋아하든 말든 그 효용은 여전한 것이다.
그러니 인권변호사란 딱지를 딱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인권변호사가 할 일은 아직도 태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인권변호사라는 야릇한 딱지를 한동안은 더 붙이고 다녀야 할 모양이다. 그 한동안이 가능한 한 짧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 이 모든 딱지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나 올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