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든을 넘긴 어느 날 마산의 문학인들과 나들이 간 개나리 핀 뜰에서 고운 자태의 이효정 애국지사. 사진=박진수 제공 |
1913년 경북 봉화군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 이후 경성부로 올라와 1930년대 초 경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으며,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 후에는 이재유등이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鐘紡)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투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이재유(李載裕)의 지도를 받아 여성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하에 파업투쟁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종방 파업투쟁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경성에서 이재유·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효정은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교원노조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돌아간다. 시댁인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했으며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이효정은 울산지부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훗날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자녀 2남 1녀와 함께 남한에 남겨진 이효정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거듭 월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고, 다시 요시찰인물이 된 그녀는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게 된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고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해야 했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이효정에 대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노년에 이효정은 시집을 출간하는 등 문학인으로 지냈다.
2006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뤄지면서 93세 나이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 수여받았다. 2010년 8월 14일 타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