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트Darts:
짧은 화살을 과녁에 맞춰 점수를 계산해 승부를 가리는 놀이. 다트의 끝인 ‘팁’을 금속으로 만든 스틸 다트(하드 다트)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전자 다트(소프트 다트)로 나뉨. 다트보드 한가운데 작은 원을 ‘불Bull’이라고 한다. 원래는 황소의 눈Bull’s eye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
황소의 눈을 쏴라
사실 본명은 다츠darts다. 작은 화살을 뜻하는 다트dart에서 나온 말이다. 17세기 영국에서 군인들이 전쟁 도중 부러진 화살을 술통에 맞히며 놀다가 시작됐다고 한다. 한 사람이 3개의 다트를 사용해서 복수형이 됐고, 그게 게임의 이름이 된 것이다. 한국보다 앞서 다트를 받아들인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서 그대로 쓰고 있다.
전자 다트가 보급되면서 열풍이 불었다. 룰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점수 계산이 까다로운데, 전자 다트는 센서를 통해 자동으로 점수를 계산해주니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워진 거다. 종주국인 영국 등 유럽과 미국에선 스틸 다트가 대세고,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에선 소프트 다트의 점유율이 높다. 스틸 다트는 자칫 사고가 날 수 있어 일반인보다는 프로 선수들이 주로 즐긴다. 전자 다트는 인터넷으로 연결돼 세계 각국 사용자들과 실시간 대결도 가능하다.
한국 다트는 1989년 부산 조선호텔에 생긴 ‘오킴스’ 펍이 원조 격이다. 당시 서울 용산, 경기 평택 인근 미군 전용 술집이 아니면 다트 같은 ‘외국 놀이’를 경험할 수 없었는데, ‘아이리시 스포츠 펍’을 콘셉트로 한 오킴스가 매장 안에 다트를 설치하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쉬워진 것. 부산에서 인기를 끌자 곧이어 서울 조선호텔에 다트 등 게임을 할 수 있는 게임 룸을 설치한 오킴스가 문을 열었다. 당시 “다트 하는 술집”이라고 언론에 소개됐다. 1991년, 한국사회체육센터 주최로 1회 다트 선수권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때도 언론이 “건전한 실내 스포츠”라며 주목했다. 1994년 즈음엔 실내 다트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울 돈암동, 화양리(광진구 화양동), 혜화동에 업장이 있었는데, 신문에 가맹점 모집 광고를 낼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자 다트의 수준이 조악했고, 곧이어 나온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한국을 뒤흔들면서 다트는 설 자리를 잃었다. 여기에 ‘펍’이라고 하는 술 문화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도 한몫을 했다. 다트는 펍에서 술과 함께 발전한 놀이 문화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프로 선수들 일부는 게임 하면서 술도 마신다.
이후 유학, 연수, 여행 등으로 외국의 펍을 경험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다트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다트가 설치된 스포츠 펍 문화가 한국에서도 자리잡았다. 사라져가던 아케이드 오락실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도 큰 요인이다. 전자 다트는 게임기로 취급해 오락실에 설치가 가능하다. 2017년 7월 현재, 대한다트협회에 따르면 국내 프로 선수만 200여 명에 달한다. 그해 7월 9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대규모 다트 대회엔 총상금 1억 2300만 원을 두고 프로와 아마추어 3200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협회는 전국 다트 인구를 3만여 명으로 본다.
개그만 박수홍처럼 아예 집안에 다트를 설치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어떤 가수는 아예 제주도에 다트 펍을 차렸다는 소식이다. 매력이 뭘까. ‘고도의 집중.’ “온 신경을 집중해 과녁에 꽂는 쾌감이 엄청나다”는 게 이구동성이다.
다트의 거의 모든 것
다트를 예전 주택복권 추첨이나 길거리 이벤트 도구로 쓰는 돌림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건 요행을 바라는 뽑기 판이다. 실력이 좌우하는 스포츠로서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일관된 집중력과 팔 동작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화살을 꽂아야 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이 필요한 두뇌 스포츠이다. 2000년대부터는 온라인 전자 다트 인구가 늘면서 각종 대회가 열려 승부를 겨뤄보려는 생활체육인들도 많아졌다. 아무리 타고난 기질 등이 출중하다고 해도 게임의 종류와 룰 등을 제대로 알아야 승자가 될 수 있다.
다트 게임도 종류가 많다.
‘제로원(01) 게임’은 가장 대중적인 게임이다. 정해진 점수를 줄여 마지막을 먼저 0으로 만들면 이긴다. 딱 0으로 마무리해야만 이기는 기술이기에 게임을 어렵게도 하고 재미있게 한다. ‘301’, ‘501’, ‘701’, ‘901’, ‘1101’, ‘1501’. 다섯 종류가 있다. 모두 끝이 ‘01’로 끝난다고 하여 ‘제로원’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에 남은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맞히면 '버스트Bust'가 되어 직전 점수에서 다시 시작한다.
‘크리켓 게임’은 15에서 20까지 6개 숫자와 ‘불Bull’만 가지고 게임을 한다. 이 7개 유효 구역에 상대보다 먼저 다트 3개를 넣어 내 영역을 만들고 거기서 점수를 올리는 방식이다. 3개를 다 넣고 난 뒤부터 그 영역에 넣을 때마다 점수가 올라간다. 3배 영역(트리플)에 넣으면 가장 유리하다. 내 영역을 먼저 만들어 거기서 점수를 계속 올릴 것인지, 상대가 가진 영역을 언제 저지할 것인지 전략을 요구하는 고난도 게임이다.
다트,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 다트는 먼저 던지는 쪽이 절대 유리하다. 던질 순서를 정하는 것을 '디들diddle'이라고 하는데, 한 발씩 던져 가운데 ‘불’에 가깝게 간 쪽이 먼저 공격한다.
▷ 한 라운드에 다트 3개를 던진다. 이를 ‘1스로’라고 하며, 1스로를 마치면 상대 선수와 차례를 바꾼다. 게임별로 라운드 수가 정해져 있다.
▷ 다트를 야구 하듯 던지면 안 된다. 야구에서 볼을 던지는 방식은 빠르고 멀리 던지기 위한 것이다. 다트를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
▷ 표적에 조금 더 가깝게 가기 위해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던질 때는 발끝이 ‘스로라인’(던질 때 서는 선)의 끝을 넘지 않도록 한다.
▷ 다트판 앞을 가로질러 다니는 행동은 금물이다. 내가 던질 차례가 됐어도 사람이 앞에 있으면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 상대의 집중력을 흩뜨리지 않는다. 상대가 던질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야유를 하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 환상적인 플레이에 환호와 격려를 보낸다. 상대가 고득점을 냈을 때나 멋진 플레이를 펼쳤을 때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게 매너다.
손에 들고 던지는 소프트 다트 한 개의 무게 규정은 20g 이하여야 한다. 스틸 다트는 길이 30.5㎝ 이내, 무게 50g 이하로 규정하고 있는데 보통 18~24g 사이를 쓴다. 금속 침이 꽂히는 스틸다트판은 플라스틱일 수 없다. 떡갈나무나 코르크, 종이점토 등으로 만든다. 사이잘삼(마) 재료를 최고로 친다. 사이잘삼은 열대에서 나는 용설란 종류로 주로 밧줄을 만들 때 쓴다. 이를 엮어서 압축한 뒤 증기로 찌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단단하게 만든다. 흔히 보는 코르크는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장식용이다. 스틸이든 소프트든 숫자 배열은 똑같다. 하지만 다트판 크기는 다르다. 스틸다트판 지름은 34.4㎝(13.5인치), 소프트다트판은 39.4㎝(15.5인치)다. 스로라인부터 다트판까지 거리도 스틸은 237㎝인 반면 소프트는 243㎝로 더 멀다. 먼 만큼 판의 표적은 크니까 조건은 비슷한 셈이다.
500년이 넘는 다트 역사
다트는 ‘작은 화살’이다. 영국에서 유래했고 스포츠로 정착시킨 나라도 영국이다.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 일본, 대만, 홍콩 같은 아시아 국가도 다트를 스포츠로 인정하고 있다. 올림픽 종목 가운데 창던지기와 양궁이 다트와 닮았다. 손으로 직접 던지는 창던지기와 도구를 써서 맞힌 점수를 더하는 양궁이 합쳐진 모양새다.
1980년대 국내 일간지 기사를 검색해보면 ‘다트’라는 단어가 한 호텔 바에서 열렸던 ‘작은 창 던지기 대회’에서 거론된다. ‘100년 전쟁’(중세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과 ‘장미전쟁’(15세기 영국의 왕위쟁탈전) 등 장기 전투가 지겨워진 영국 병사들이 소일거리로 간단한 게임을 생각해낸 것에서 유래했다. 처음엔 부러진 화살을 포도주 통에 던지는 영국식 투호였다. 오크통마저 귀해지자 군인들은 통나무를 잘라 부러진 화살을 던지고 놀았다. 나이테가 마르면서 생긴 갈라진 틈이 자연스럽게 점수 구역이 됐다.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선을 긋고, 구역마다 득점을 구분했다. 다트 보드의 원형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장미전쟁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승리하자 영국은 안정을 찾았다. 귀향한 병사들은 선술집(Pub)에 몰려들어 전쟁의 추억을 나눴다. 누군가 ‘추억의 표적 맞히기’ 놀이를 제안했고, 누군가는 ‘그때 못 끝낸 걸 오늘 결판내자’고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전쟁터 다트는 술집에서 되살아났다. 펍 주인은 영업 전략으로 손수 만든 다트 판을 벽에 걸고 더 많은 손님을 불러들였다. 다트와 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다트는 생김새와 노는 방법, 룰이 각양각색이었다.
다트 판의 절묘한 숫자 배열은 누가 만든 걸까? 높은 숫자를 노리면 양옆에 도사린 낮은 숫자들이 달려드니, 욕심을 내면 낭패를 보는 구조다. 1896년 영국의 목수인 브라이언 갬린이 지금과 같은 다트 판을 고안했다고 하나, 당시 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그런 인물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1992년 영국인 토머스 버클이 잡지 <다트월드> 기고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 버클이 1913년에 숫자 배열, 더블과 트리플 계산법 등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 자료를 내놓진 못했다. 높은 숫자 옆에 낮은 숫자를 배치하고 영역을 구분해 두 배와 세 배로 계산하는 현재의 다트 판을 ‘런던 보드’라고 한다. 어떤 보드는 골동품 애호가의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초 영국은 도시와 지방을 불문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다트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 다트는 전 세계인이 즐긴다. 미국에 다트를 전한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개척자들이다. 아시아 국가로는 홍콩이 제일 먼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초반 일류 호텔과 외국인 밀집 지역의 바를 중심으로 알려졌다. 맥줏집은 벽에 코르크 다트 판을 거는 게 유행이었다. 1990년대 중반 전자다트가 도입되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다트방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2~3년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다트가 여러 명이 어울리는 스포츠로 인식되지 못하고 기계 판매에만 그친 탓이다. 2000년 초반 한국의 한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로 온라인 기능을 탑재한 다트를 개발해 상금을 건 정기 대회를 열자 동호인이 급격히 늘었다. 이 회사는 다트 시범선수단을 구성해 전국을 돌며 알리기 시작했다. 맥줏집과 바에서나 보던 다트는, 이제 전문 다트 바는 물론 당구장, 볼링장, 게임센터, 카페, 음식점, 미장원, 직원휴게실이나 고객대기실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트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은 소프트 다트(전자다트)의 탄생이다. 1986년 미국의 한 회사가 다트를 전자화했다. 플라스틱 팁이 박히면 센서가 점수를 자동으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스틸 다트의 위험성과 계산의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 전후 온라인과 연결된 제품을 한국과 일본, 스페인, 중국 등이 내놓으면서, 다트 붐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