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실상
6.25전쟁기간 (1950년 6월25일에서 1953년 7월27일)
전쟁발발 1년 동안에 서울을 빼았겼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의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남침시작
1950년 6월 26일 13시경, 의정부가 남침 하루 만에 점령
1950년 6월 27일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방어부대들은
창동지역을 포기하고 미아리·태릉 일대로 분산 철수했다.
1950년 6월 28일 날이 밝으면서부터 서울은 북한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철수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1950년 10월 9일 38선 돌파
1950년 10월 19일 평양입성(육군1사단)
1950년 10월 26일 6사단 7연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했다.
1950년 11월 초순 중공군은 30개 사단 30만여 명이 인해전술로 참전하므로 후퇴
(이후 중공군은 100만 명으로 증강됨)
1950년 12월 11일 미군과 한국군은 장진강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흥남철수작전 실시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된다.(일명 1.4후퇴)
(이때 미국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의정부에서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으며,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이 부임했으며 미국에선 한국을
포기하자는 여론이 생기었다.)
1951년 4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에 맥아더장군 의해 해임되었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정부는 대한민국의 범위를‘38도선이남 지역’으로 하기를
원했고, 맥아더 원수는 전쟁에서의 완승을 원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
한 이상 38도선은 무의미하며,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전의지’에 제동을 걸기위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다.
1951년 7월 10일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휴전협상 진행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27,000여 명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전격적으로 석방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 조인
1.4후퇴 당시 UN군의 전쟁지침 하달내용
1. 1951년 1월 인민군의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한다.
2.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3. 한국정부로 하여금 제주도로 이전 하고 본토 수복을 위해 저항을 계속하도록 지원한다.
4. 대상 인원은 행정부관리와 그 가족 3만 6,000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5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 명을 포함하여 도합 100만 명 규모였다.
5. 한국정부도 모르는 실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6. 맥아더장군이 미 국무부에 들어가 강력히 항의하여 국무장관인 러스크의 해명을 얻어냄
7. 37도선에서 적을 저지하였고 또 적이 공세를 멈춤으로써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우리의
전투부대파병(16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16개국)
의료지원부대(5개국)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물자지원국(20개국)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쿠바, 에쿠아도르, 엘살바도르,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레바논, 리베리아, 멕시코, 니카라구아, 파키스탄,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전쟁의 전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중화 인민 공화국의 마오쩌뚱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해 왔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적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다. 이 때 서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 주었다.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했다.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펼치고 같은 해 9월 28일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함락하고 통일을 눈 앞에 두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에는 휴전선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상으로 현재 휴전중인 전쟁으로 지금까지 6.25 전쟁 기념 61주년 행사가 열렸습니다.
6.25전쟁은 요약을 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입니다.
전쟁의 배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종전을 1주일 앞둔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2011. 6. 27
자유의 다리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다리로
6·25전쟁 중 파괴되었으나 84공병대원들에 의해 임시로 복구된 모습.
개성휴전예비회담시 북한군과 중공군
인천항의 유엔전차양륙함
1951년 3월 23일 문산읍
남쪽 지점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끊기 위하여 낙하하고 있는 낙하산부대.
낙하산부대
1951년 한국에서의 유엔군 침투작전.
75mm무반동총
1951년 9월 6일 6·25전쟁.
원산폭격
1951년 유엔군이 B-26 폭격기로 군수품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청진항 미주리호(일본천황이 항복조인식을 하였다.)
기준 배수량 4만 5000 t 길이 271 m 최대너비 33 m 속력 30 kn 이상
마릴린먼로 주한미군 위문공연
1954년 2월 17일 미군캠프쇼를 마치고 환호받고 있다.
1.·4후퇴 피난행렬
강원도 강릉. 1951년 1월 4일 중공군에 밀려
유엔군이 후퇴하자 자유를 향하여 남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
6·25전쟁의 1·4후퇴. 북한백성 1/4이 남으로 피난을 하였습니다.
사진의 뒤쪽에 보이는 다리가 파괴되자 결빙된 한강 위로 건너는 피난민들.
6·25전쟁 중 1950년 9월 27일 전주에서 북한군에 사살된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
1950년 10월 19일 북한군은 함흥에서 300명의 사상범들을 동굴 속에 가두고 질식사시켰다.
흥남철수작전
6·25전쟁 중 북한 주민들의 피난 가는 모습.
미군의 M26 전차
6 ·25전쟁 당시 유엔군 9연대가 낙동강을 건너고 있는 적군을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육군준장 휘트니,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육군소장 알먼드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15일 후에 서울을 탈환합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는 장면.
1951년 5월 22일 홍천에서 공산군에게 전차포를 발사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37mm대전차포.
한국전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 조성된 한국전쟁기념공원
1951년 4월 3일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
왼쪽부터 리지웨이 중장, 히키 소장, 맥아더 총사령관.
한국전쟁 중 미국의 F4U 콜세어(Corsair)전투기가
북한 해상에서의 전투임무를 마치고 항공모함(USS Boxer)으로 귀환하고 있다.
낙동강방어선 9월의 공방전 상황도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블록화
입국하는 중공군을 환영하는 신의주 시민들
중공군 3차 공세 당시의 상황도
1951년 1월 철원에서 포로로 잡힌 인민군포로들 모두 방한복을 착용했다.
조선인민군
왼쪽으로 장교, 따발총을 든 사람들이 분대장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뿌린 삐라.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뿌린 삐라.
1950년 5월 전쟁 전의 남북지도 입니다.
1950년 9월의 상황
전쟁개시 80일 만에 대구와 부산만 남기고 모두 빼앗겼습니다.
1950년 10월 26일 6사단 7연대 압록강에 도달
하지만 100만명에 이르는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펴며 공격하므로 후퇴를 하게된다.
남북통일은 평화로 이뤄야 겠습니다.
6.25 전쟁
민족 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우리민족에게 다시는 이런 참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