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멸(入滅)과 정각(正覺)
앞서 우리는 <열반경>에 보이는 입멸과정이 붓다의 정각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입멸과 정각을 살펴보자.
<열반경>은 붓다의 정각과 입멸을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말라족의 푸쿠사가 바친 황금가사가 붓다의 몸에 입혀졌을 때, 찬란했던 그 가사는 광채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란 아난다에게 붓다는 설명한다. "아난다여! 그와 같도다. 아난다여! 두 경우에 여래의 피부는 매우 밝고 빛난다. 두 경우는 무엇인가? 아난다여! 여래가 무상(無上)의 최고의 정등 정각을 이루는 밤과, 여래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을 이루는 밤이다." 왜 붓다의 피부가 두 경우에 그렇게 빛난 이유는 두 경우가 서로 동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붓다고사는 왜 붓다의 피부가 그렇게 이 두 경우에 빛나게 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주석을 하고 있다. 첫째, 이 두 경우에 온 세계에 있는 신들이 음식물에 영양소를 넣어 이것이 피부로 하여금 빛나게 만든다. 두 사건이 똑같이 특별하므로 신들은 특별한 영양소를 음식에 넣는다. 붓다고사의 주석은 <자타카(Jātaka)>를 참고하면 더 분명해진다. "다른 경우엔, 신들은 영양소(oja)를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에만 넣지만, 정각한 날과 입멸의 날에는 그들은 그것을 음식 그릇에 넣는다." 두 번째, 이 두 경우에 엄청난 행복감이 붓다로 하여금 특별히 광채를 나투게 한다.
정각한 날, 붓다가 "오늘, 수백만 수천 수백만 년 동안 쌓여왔던 번뇌의 더미가 버려지게 되었다."고 사유할 때, 엄청난 행복감이 그에게서 일어났다. 이러한 행복감은 곧 붓다의 피부를 매우 빛나게 만들었다. 입멸의 날, 붓다가 "이제 오늘 나는 수백 수천의 제불이 들어간 반열반이라는 도시에 들어간다고" 사유할 때, 엄청난 행복감이 그에게서 일어났다. 이것이 그의 육신으로 하여금 똑같이 빛나게 했다.
정각한 날과 마찬가지로, 입멸한 날도, 붓다는 똑같은 행복을 느꼈다. 주목할 것은 열반이 슬픔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정각과 같이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붓다고사가 특별한 음식과 엄청난 행복감이 똑같이 붓다의 육신을 빛나게 한 원인들로 이해했는데, 이 두 원인들의 이면에는 두 사건이 동등하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각과 열반이 동등하다는 생각이 다시 붓다에 의해 피력되었다. "두 공양 음식은 다른 어떤 공양보다도 똑같은 열매,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무엇이 그 둘인가? 무상 최고의 정각을 이루기 전(前) 여래에 의해 취해진 음식과 무여의열반직전 여래가 취한 음식이다." 다른 어떤 공양보다도 이 두 음식 공양이 똑같이 더 많은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열반과 정각이 동일함에 기인한다.
붓다고사는 왜 이 두 공양 음식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열반은 똑같고, 등지(等至, samāpatti)도 똑같고, 회상도 똑같기 때문이다." 첫 두 이유는 교리적인 측면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부가적인 것으로, 수자타와 춘다가 똑같은 식으로 그들이 공양한 음식물에 대해 기억할 때 똑같이 행복했다는 것이다.
붓다고사는 첫 번째를 설명한다. "세존은 수자타가 공양한 음식을 드시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에 들고, 춘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시고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었다. 이리하여 그 두 음식은 똑같은 과보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두 열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붓다고사가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anupādisesa-nibbāna-dhātu)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담마팔라(Dhammapāla)는 전자를 유루(有漏)-반열반(kilesa-parinibbāna)이라고 하고 후자를 5온(蘊)-반열반(khandha-parinibbāna)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자는 정각(正覺, sammāsambodhi)의 동의어이다. "최초엔 열반과 깨달음(bodhi)은 똑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생전에 증득한 열반은 유여의열반(sa-upādisesa-nibbāna)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직 5온(khandha)이 연료(upādi)로서 남아있다(sesa). 5온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을 때, 아라한은 무여의열반(anupādisesa-nibbāna)을 증득한다. 두 열반의 유일한 차이점은 집착(clining)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집착되고 있는 5온(clining aggreates)에 있다. 두 열반은 일시적으로 달리 이름 붙여졌지만, 그들 사이의 차이는 두열반의 궁극적인 상태의 가치에서 볼 때, 무의미하다. 각 열반은 정각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 열반이라는 실재의 본질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사실 경전에서 이 두 용어가 서로 교환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경우의 열반의 실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생전의 아라한이 죽었다고 해서 아라한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이 죽을 때 열반과 관련하여 더 이상 취해야 할 것은 없다. 그의 생존시 열반은 노(老), 사(死), 재생 등에 속박되지 않는다. 물론 5온은 그러한 것에 속박된다."
전통적인 상좌부(上座部) 입장은 두 열반이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 <논사(論事)>는 두 열반이 동일하다고 논증하고 있다. Abhidhammatthasangaha(ⅵ 14)는, "열반은 본질상 하나이지만, 논리적으로 다루기 위해 둘로 나눈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고사는 어째서 이 두 열반이 동일한 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각을 이루던 날, 그는 84,000코터의 등지를 이루고, 입멸의 날, 그는 똑같은 수의 등지를 이루었다. 따라서 등지의 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열반은 똑같은 결과를 가진다." 동일한 수의 등지가 정각과 열반을 동일하게 만드는 공통 분모라는 것이다. 나가세나 장노도 이러한 점을 지지하고 있다. 붓다의 정각의 날과 그의 입멸의 날에만 붓다는 9차제정을 순서대로 그리고 거꾸로 들어간다고 한다.
정각을 열반과 동일시하는 것은 붓다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고 그의 육신의 사후 붓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관심을 그의 죽음에서 붓다의 정각의 본질에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원은 붓다의 정각과 관련하여 그의 본질을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노만(Norman)은 여래 사후 존속 문제는 '붓다에 관한 사실을 알려는 참된의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라고 추측한다. 그는 계속해 설명한다. "붓다는 여래였고, 열반을 증득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았었고, 그의 제자와 함께 지냈다. 열반의 증득이 그의 육체적 상태에 뚜렷한 차이를 만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처럼 어려움의 결과로 두 개의 열반이라는 관념이 생겼을 것이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의 그의 생존시에도, 붓다를 있는 그대로 보기는 어렵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붓다는 바다처럼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도 헤아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붓다를 5온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붓다의 본질은 생시에 5온과 연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여래는 5온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없음을 보이므로써, 사후 붓다는 완전히 소멸했다고 믿는 야마카(Yamaka)를 사리풋타(Sāriputta)가 바로 잡은 후, 여래가 사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 때도 여래는 진실로, 실질적으로 파악될 수 없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붓다에게 접근이 가능할 때조차도 그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렵다; 사후 그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논의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것이다. "여래는, 내(붓다)가 말하건대, 지금 이곳에서 추적될 수 없다."
붓다는 박칼리(Vakkali)에게, "보기에 더러운 이 육신을 보는 것에 무슨 이득이 너에게 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붓다는 법을 보는 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참된 본질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법이다. 그는 성도 직후 선언했다. "내가 이제 막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세속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이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베이(Harvey)는 이 법을 열반으로 이해한다. "다른 말로, 열반을 "본다"는 것은 여래를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래와 붓다를 동일시하고 있고, 여래가 열반이기에 여래는 법신(法身)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여래에게 있어 유여의열반은 무여의열반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온이 현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즉 이 세상에서 또는 저 세상에서 5온이 존속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논의로 열반의 실상과 관련하여 적절하지 않다." 육신을 초월하여 붓다가 증득한 법에서 그의 본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물론 정각자붓다의 신체적 죽음은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은 아니다.
<붓다의 반열반에 관한 고찰/ 안양규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