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에 남혁로를 광릉참봉에 수망으로 천망하여 낙점했다가 정원이 2원인 광릉참봉에 함경도 어사의 추천인과 합하여 3원이나 추천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영조가 친필로 낙점 사실을 취소하고 추후에 調用하라는 지시가 적힌 천망단자이다.
천망단자의 실례로서 좋은 자료이다. 이 천망단자가 남혁로의 집안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승지가 같은 집안 사람인 남태회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남혁로는 보름쯤 후에 다시 선릉참봉으로 추천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갈 수가 있었다.
南赫老 光陵參奉 천망단자는
① 남혁로 천망 기록
② 吏曹 광릉참봉 천망단자
③ 南泰齊가 쓴 천망단자 제발
④ 남태제가 쓴 남혁로 묘지명
으로 구성되어 있다.
* 남혁로(南赫老, 1733 ~ 1767)
1759년(영조35) 己卯式年試 進士 2등 18위 전체등위 23/100
자 重晦 생년 1733(영조9, 癸丑) 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京
전력 幼學 시제 二詩 부모구존 慈侍下
부 南泰休(通德郞) 형제 南廷老, 南喆老
출전 『崇禎三己卯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 古朝26-29-39)
* 남태제(南泰齊, 1699 ~ 1776)
본관은 宜寧. 자는 元鎭·觀甫, 호는 澹亭·鶴野. 할아버지는 도승지 南致熏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南弼明, 어머니는 한성 판윤 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 『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해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상인 沈壽賢을 탄핵하다가 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 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臺閣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紀綱頹廢, 재용 낭비, 풍속 乖悖, 時派와 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배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으며, 1743년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유수를 역임했다. 그 뒤 1760년에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거쳐 정헌대부가 되어 형조판서·예조판서·세자우빈객·도총관·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대부가 된 뒤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 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우아하고 시문에 華實이 구비되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 저서로는 『담정유고』가 있다. 시호는 淸獻이다.
* 남태회(南泰會, 1706 ~ 1770)
본관은 宜寧. 자는 聖際, 호는 紫巖. 楊根 출신. 할아버지는 南尙熏이고, 아버지는 儀賓都事 南近明이며, 어머니는 李萬封의 딸이다. 형이 남태기다.
1736년(영조1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7년에 文學이 되고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1752년 수찬이 된 뒤 헌납·교리 겸 문학·승지 등을 두루 거쳐 1757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762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767년에는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된 뒤, 다시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769년에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獻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