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요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도중에 광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기 일보직전에 처해있을 때,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놀라며 “그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하는가” 하고 고백적 독백(獨白)을 합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말을 확인해 보면 ‘명하여’(ejpitavsse)는 어원 에피탓소(ejpitavssw)에서 파생하여 ‘질서를 세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순종하는가’(uJpakouvousin)는 어원 휘파쿠오(uJpakouvw)에서 파생해서 ‘하급자가 말을 따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러한 용례의 의미를 통해 유추해보면 바람과 호수(물)에게 예수님이 잔잔하라고 명령하자, 그 말을 들은 피조물(하급자)의 존재인 바람과 호수가 질서를 세우고 따르는 장면이 나타난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무생물로 알고 있던 존재인 바람과 호수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예수님의 명령을 알아듣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이 특별한 사역으로 신비스러운 일을 드러내신 하나님나라의 일이 범재신론(Panentheism)과 관련된 개념이 함의되어진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범재신론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로 Pan은 ‘모든 것’, en은 ‘안’, theos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것은 신의 안에 있다’(All is in God)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와 같은 범재신론 개념을 처음 사상적으로 정립시킨 사람은 ‘화이트 헤드’(White Head)입니다. 그는 신은 ‘내재이며 동시에 초월(외재)’이라는 사상적 개념을 처음 체계화시킨 철학자였습니다. 하지만 화이트 헤드가 철학적으로 정립시키기 이전에 이미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보수신학전통은 이러한 범재신론적인 사유를 무시하거나 폄하시키는 오류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는 범재신론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범재신론적인 이야기가 자연만물에 ‘온통’으로 편재(遍在)해서 초월(超越)과 내재(內在)로 존재하면서 이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섭리와 경륜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이 바람과 호수를 통해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역은 초월적인 하나님뿐만 아니라 내재하셔서 온통으로 편재하신다는 것은 범재신론적인 개념을 함의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초월’과 관련해서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초월’을 선험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의 실현이라는 뜻이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초월은 ‘위’로나 ‘밖’으로가 아니라 ‘안’, ‘근본’, ‘원천’으로서의 방향성을 지닌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초월은 위로나 밖으로가 아니라, 자기 안으로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갈 때 확인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초월은 인간의 중심에 모셔져 있는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범재신론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 성경구절들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 중에 사도행전 17장 27-28절에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또한 바울의 서신서인 에베소서 4장 6절에 ‘만유(萬有)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라고 범재신론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따라서 ‘초월성’에 관한 부분은 엄밀히 말해 외재성을 넘어서는 광의적 의미로 초월성이 내재성으로 나투는(顯現) 자리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범재신론적인 이야기가 도마복음 113장에 독특하게 나타나는데,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넓게 퍼져 나간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재성과 관련된 가치술어적인 진술의 의미는 아주 중요한 사상적 주제로, 종말이 지연되면서 이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의 대답을 대화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는 1세기의 이집트도마공동체에서 중요하게 관련되어진 종말론논쟁을 편집한 어록으로 추측됩니다. 즉 도마공동체의 요청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때에 관해 예수님의 대답을 듣는 것이었으나, 도리어 도마공동체의 본래 기대와 다른 재해석된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나라’는 더 이상 마지막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세상에 넓게 퍼져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질문자와 대답자의 인식상의 차이에는 하나님나라를 보는 관점이 엄청난 괴리로 깊게 파여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자의 의도는 보이는 정치적인 하나님나라를 물었지만, 대답한 예수님은 그러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나라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관한 패러다임의 전환’, 즉 변혁된 하나님나라를 제시합니다. 이를 ‘그 나라’, 곧 ‘그 아버지의 나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아버지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아버지의 나라’는 역시 ‘온통’으로 이 땅에 편재하고 있는 범재신론적인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나라’가 편재한다는 것은 세계의 어디에서나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가 신이라던가, 신이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생명이라는 의미와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우주만물이 신이라는 범신론(God is in All)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광의적인 개념에서 볼 때 도마복음 역시 범신론적 사유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도마복음77장). 따라서 도마복음의 편재성은 범신론과 범재신론을 명확하게 구분한 개념이라기보다는 그 의미를 소통시키는 지혜신비영성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범신론을 니시타니 게이이치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신이 절대적으로 내재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힌두교적인 편재의 개념으로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지라도 브라흐만은 세계에 편만하며 우리 각자 안에서 아트만 곧 자아가 영원히 발견되는 것으로 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점은 역설적으로 이 ‘온통’의 하나님과 그 ‘나라’는 ‘온통편재’되어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통’으로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땅에 깔려있다’는 콥트어는 es she is, porS spread, ebol out, HiJ\m upon, pkaH the earth로 ‘그 땅에 넓게 펼쳐 나간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아버지 나라’가 현재적으로 내재되어 있지만, 부분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으로 편재성을 드러내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나라’를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냥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나라는 ‘내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널리 퍼져 있지만 육신의 눈으로 ‘그냥’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재성은 발견의 문제인 동시에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믿으라’고 일방적으로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지의 ‘앎’(souwn)과, ‘발견’(Gine) 그리고 ‘깨달음’(Hermhneia, 해석)을 강조합니다. 결과적으로 도마복음에서는 범재신론적인 관점으로 ‘앎’의 영지를 발견한 자는, 결국 신적 존재인 신성(神性)이 계시된 것으로 그 대의(大意)을 갈무리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범재신론적인 사역은 바람과 바다라는 피조물의 순종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하신 것은 물론, 우리가 그동안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자연만물 안에서 온통으로 편재된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비본질적인 신앙문제에 관련하여 맹목적으로 배척만 해 온 속 좁은 모습을 보여 온 것은 아닌지,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너무 자의적으로만 해석한 모습은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기부여를 찾을 수 있지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고 높은 주권섭리와 경륜의 계시로 보이신 범재신론적인 영적 스펙트럼을 우리가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제한시키는 어리석음이 있지는 않았는가?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일이 범재신론적으로 넓게 나타내신 예수님의 사역의 교훈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 시대적인 계시로 드러나는 영적징조(徵兆)를, 지금의 크리스천이 온통으로 깨닫고 실천생활영성으로 회복하는 앎과 삶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성령하나님, 그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복된 자들에게 주사 마음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아는 일이 충만해지기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