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주를 짝사랑한 김영갑과 `비밀의 화원`

[돌담]

제주를 짝사랑한 김영갑과 '비밀의 화원'

3코스 온평~표선 올레(총 22km : 6~7시간)

2010년 10월 14일 (목) 09:10:30

온평 포구→도대불→통오름→독자봉→김영갑 갤러리→바다목장 올레→신천리마을올레→표선 백사장→표선 당케 포구

온평리 바닷가.
도대불 하나 외롭게 서 있다.
혼자 길을 가는 여행자는 도대불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도대불은 옛 등대다. 글자그대로 도대道臺불, ‘길을 밝히는 불’이란 뜻이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도대불은 보재기(잠수부)들에게 생명의 등불이었다. 솔칵송진류이나 상어기름, 석유, 카바이드 등을 이용해 불을 켰다가 뱃일을 마치고 아침에 돌아오면 껐다고 한다.

말에서 내려 걸어갔던 난산리

온평리에서 멀어질수록 밭길은 난산리로 인도한다. 난산리는 마을이 생긴 지 800년이나 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예로부터 박사, 교사, 작가 등 학자들이 많이 나오는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주민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 

  ▲ 억새꽃 사이로 보이는 통오름

여기서 통오름은 그리 멀지 않다. 통오름은 아침에 오르는 것이 좋다. 통오름 꼭대기에 서면 사방으로 말미오름, 수산오름, 다랑쉬오름 등 38개의 오름이 보인다. 제주섬에 있는 오름이 모두 합쳐 368개이니 10분의 1을 여기서 다 볼 수 있는 셈이다.

오름의 형세가 밥통이나 물통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통桶오름이다. 먼 옛날 제주섬이 바닷물에 잠겼을 때는 담배통 만큼만 물 위에 남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독자봉이 있는데 통오름과 아스팔트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마을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고 하여 독자봉이라고 불려졌다고 하는데 오름 이름 탓일까 이곳 신산리에는 독자들이 유독 많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뚜렷한 근거를 갖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저 민담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어도를 영혼에 인화한 '김영갑'

아름다운 제주의 오름과 바다에 반해 20년 가까이를 제주에서 살며 ‘비밀화원’을 가꾸었던 말총머리 사진작가가 있었다. 고故 김영갑.

그가 생전에 공들여 지은 두모악 갤러리에 들러보자.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으로 정상에 봉우리는 없고 대신 백록담이란 분화구만 있어 ‘머리가 없는 산’이라 뜻으로 두무악頭無岳으로 불렸던 데서 유래한다.

• 

  ▲ 김영갑의 뼛가루가 뿌려진 두모악 갤러리 정원의 감나무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은 제주인 그 이상으로 제주를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1982년부터 3년 동안 샛살림하듯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사진을 찍다 제주섬만이 가진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1985년 아예 제주에 둥지를 튼다. 그 뒤 김영갑은 눈을 감을 때까지 오름과 바당(바다)을 오가며 노인과 해녀, 들판과 구름, 오름과 억새 등 제주섬의 속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인 정희성은 김영갑이란 이름 앞에 ‘이어도를 영혼에 인화한 사진가’란 수식어를 붙였다. 딱 들어맞는 표현인 것 같다.

섬사람들은 카메라를 메고 오름을 이리저리 휘저어 다니는 말총머리 남자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김영갑은 어떤 때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했고 또 어떤 때는 가수로 착각한 사람들로부터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에 외로움과 궁핍함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밥 한 끼를 걸러 그 돈으로 필름을 사고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를 뽑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도시의 친구들이 그리워져 울적할 때는 그만의 비밀화원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영갑은 폐교인 삼달초등학교를 얻어 갤러리의 초석을 다질 무렵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얼마 뒤 김영갑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렌즈 속의 풍경을 둘로 나누는 송전탑이었다.

투병생활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눈을 감는다. 그의 뼛가루는 자신이 손수 만든 두모악 갤러리 감나무 아래 뿌려졌다. 가을이 되면 마당과 뒤뜰에 심어 놓은 10여 그루의 감나무에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열린다. 투병생활을 하던 방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가방과 카메라들이 주인을 잃은 채 놓여 있다.

바다와 목장이 어우러진 바다목장 올레

갤러리를 나와 밭에 난 샛길을 걷는다. 소똥 냄새가 뒤따라온다. 잰걸음으로 소똥 냄새와 간격을 두자 이번에는 앞에서 농약 냄새가 내려온다. 황급히 코를 막고 걷는다. 생전에 김영갑도 그랬을까.

• 

  ▲ 오솔길을 내고 있는 억새꽃 무리.

신풍리로 내려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레스토랑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주욱 내려가다 기역자로 꺾어지면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 나온다. 도로 양쪽으로 소금을 뿌린 듯 가득 피어난 하얀 억새꽃들이 아름다운 오솔길을 내고 있다. 오솔길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원근법에 따라 오솔길은 바다가 가까울수록 점점 좁아진다.

바다 앞에서 뚝 끊긴 길은 다시 기역자로 방향을 틀어 해변을 따라 S라인으로 이어진다. 돌담 너머로 신풍리 바다목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바다에 수평선이 있다면 목장에는 지평선이 있다. 드넓은 초장이 만들어 놓은 지평선 위로 야자수가 총총히 심겨 있어 남국의 정취를 더한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들을 바라보다 나도 풀썩 앉는다. 고개를 돌리면 바다다. 갯내음과 풀내음을 번갈아 맡을 수 있는 올레다.

연초록 잔디와 검은 갯바위, 코발트빛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광을 만끽하다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가면 바당올레다. 바닷가에 돌멩이를 눕혀 울퉁불퉁한 바닥을 평평하게 하고 양 옆으로 돌을 쌓아 길을 냈다. 그래도 바당올레를 지날 때는 발톱을 먼저 깎아야 한다. 발끝으로 체중이 옮겨지기 때문에 발톱이 길면 아프다.

감태 손질하는 표선 사람들

• 

  ▲ 감태를 손질하고 있는 표선 사람들.

바당올레는 밭길로 이어지고 밭길은 신천리 배고픈 다리로 이어진다. 신천리 올레가 끝나갈 무렵 표선 해수욕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해수욕장 도로에 널어놓은 감태를 마을주민들이 손질하고 있다. 햇빛을 받은 감태는 다시마처럼 까만 색을 띠는데 화장품 원료로 쓰일 만큼 보기답지 않게 효용 가치가 높다.

표선 해수욕장 옆으로 난 산책길을 걷노라면 찰랑거리는 바닷물의 유혹에 못 이겨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표선 바다가 그러해도 좋을 만큼 온순하지만은 않다. 예로부터 한번 폭풍우가 몰아치면 마을 전체가 파도에 휩쓸렸고 해마다 아이들이 빠져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제주의 창조신이자 바람의 여신인 설문대할망에게 마을의 안녕을 빌었었다.

속옷명주 한동 모자라 연륙교 건설 못해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의 셋째 딸로 제주의 1만 8,000 신들 중 대표적인 여신으로 손꼽힌다. 한라산을 베게 삼고 성산일출봉을 빨래바구니로 사용할 정도로 키가 컸다. 아무리 깊은 바다라 할지라도 무릎까지만 찼다.
이런 설문대할망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소중이(속옷)가 한 벌뿐이라 매일 빨래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주섬 사람들이 제주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아 주길 부탁하자 자신의 소중이를 만들어 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설문대할망의 소중이를 만드는 데는 명주 100동이 필요했다. 제주섬 사람들은 온 섬을 다 뒤져 명주를 모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99동만 모아지고 딱 한 동이 모자라 끝내 연륙교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대신 설문대할망은 표선 마을주민들의 소원을 받아들여 포구를 만들어 주었다고 전해온다. 그것이 바로 당케 포구다. 당케는 당과 개가 합쳐진 말인데 개는 제주어로 포구나 만灣을 말한다.

도새기와 비바리

여기서 더 갈 것이 아니라면 제주 민속촌 박물관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눈여겨볼 것은 제주의 뒷간, 즉 통시다. 통시는 통새라고도 하는데 육지 지방의 뒷간과 다른 점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 사람이 볼일을 보는 뒷간과 돼지막이 같이 있어 언제든지 돼지가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속에 있는 것을 비워 내려 하면 성질머리 나쁜 돼지가 가끔 “괙~ 괙~”소리를 내며 머리를 쳐들고 대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미리 준비해 둔 막대기로 돼지의 머리나 등을 툭툭 치면 좀 누그러진다.
제주 민속촌 박물관에는 제주돼지 즉 도새기가 두어 마리 자라고 있다. 도새기는 인분을 먹고 자란다. 비오는 날의 통새가 생각난다. 양옆으로 놓인 넓적한 팡돌에 발을 딛고 일을 보고 있는데 도새기가 탁탁 귀를 털기라도 하면 사방팔방 황금빛 오물이 날린다. 비바리(처녀)라도 올라가 있으면 도새기 중에는 물개쇼를 하듯 짧은 목을 뺀 채 두발로 서서 겅중겅중 뛰어오를 태세를 하는 놈들도 있다. 도새기도 비바리를 쉽게 보는 것인가. 그러나 할망한테 걸렸을 때 그 도새기 영락없이 죽음이다.

*이 글은 강민철 작가의 제주올레 기행산문집 <올레 감수광(컬처플러스 간)>을 축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