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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도덕, 이성 그리고 믿음
들어가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485년 출가된 저명한 고전 "신학대전"(의식수준 730)에서 이성과 믿음의 통합문제를 다루었다. 이 위대한 저서는 수세기에 걸쳐 고전의 당당한 영광을 누려왔다. 이 책은 이성이 믿음을 강화하고 선명하게 하며, 동시에 믿음도 이성을 강화하고 선명하게 만든다는 전제를 보여준데 공로가 있다. 이로써 이성과 믿음사이의 갈등을 풀 수 있는 해법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이성이 계시의 빛을 받았을때, 비로소 가장 진실하고 높은 수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계시는 주관적 깨달음과 참된 영적 이해를 활성화시키는 반면, 이성은 스콜라 철학의 학문적 객관성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선형적 내용을 제공했고, 계시는 이해에 꼭 필요한 비선형적 맥락화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영적 구조라는 믿음과 이성을 통합시키고 이를 미디어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과학과 기술로 지배되는 세상과 연관시켜야 할 과업도 있다. 이 믿음을 현실적으로 더욱 침해하는 것은 정치화된 철학적 왜곡과 오류가 전방위적으로 충격을 가하면서 논리와 이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진성성과 진실의 기준까지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진성성과 진실의 기준까지 훼손되어 사실상 거짓이 진실/신뢰도와 똑같은 법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결과 어느 워싱턴 법정에서는 어떠한 법적 진술(표현의 자유)도 확증가능한 물질적 사실로써 뒷받침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비방이나 명예훼손에 관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그리하여 과도한 거짓말과 입증가능한 진실이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판결은 의식수준 170으로 측정된다).
역사적으로 믿음은 줄기차게 공격받아 왔지만, 지금은 기본적인 이성마저 훼손되고 말았다. 실제로 현실검증에 필요한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저해할 정도로 손상된 것이다.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역전은 현재지배적 학계는 물론 전세계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 버젓이 입에 오른다. (그들이 주로 언급하는 거짓으로서 윤리적/도덕적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탈구조주의를 들 수 있다).
신성을 대체한 나르시시즘
앞서 이성에 대한 도전에 이어 종교적 교리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악영향도 함께 일어난다. 현재 전세계 주요 종교중 하나는 위선적으로 "신의 재림"을 인용하면서 증오, 테러, 죽음의 종교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자유해방 기독교'는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등 기독교 근본교리를 무효화하는 정도까지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대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를 인정하였다. 그 결과 개신교는 신자 수가 50% 감소했으며, 카톨릭교회도 '현대화'시도때문에 많은 신자가 빠져나갔다.
현대화가 유발한 영향은 가령, 서력 기원전-후 표기를 B.C에서 BEC로, AD에서 CE로 대체하는 등 기독교 자체가 세속화를 촉진하는 역설적 시도에서 증명된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이미 아야톨라 호메이니명령 한마디에 공식적으로 서력을 거부한 이슬람 비기독교도들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태도(결국 과도한나르시시즘에 해당하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변형은 전세계 기독교도들과 2천년 역사를 '전혀 신경쓰거나 의식하지 않는'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런 모욕이 시작되자 훨씬 더 불쾌한모욕이 잇따랐다. 2008년 2월 켄터베리대주교는 영국이 샤리아 율법을 승인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미국 칼럼리스트 캐슬린 파커 등은 유럽내 의사표현의 자유에 이슬람이 가하는 위협을 주목하고 있다(2008년 2월 15일, <워싱턴 포스트 작가그룹>).
이 논리대로 기독교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언급도 없애야 할 것이다. 불교도 붓다에 대한 언급을, 유대교도 모든 예언자와 신을 뜻하는 히브리 이름을 없애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비종교 집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종교자체가 없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서구세상은 연대를 숫자로 지정하는 것을 고수한다. 올해는 2008년이다. 이 연도를 어떻ㄱ ㅔ지정하든 2008은 그리스도 탄생이후 2008년이 지났음을 표시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BC 350은 실제로 그리스도 탄생하기 350년 전을 뜻한다.
비록 현대로 가장한 상태지만 그 숫자 연대는 여전히 그리스도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쩌면 진짜 현대는 에디슨의 전기발견, 아니면 증기엔진 발명 혹은 더 확실하게 실리콘 칩과 컴퓨터 탄생을 기점으로 시작하도록 연대를 매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사상경찰'에서 그리고 "종교적 감수성 경찰"까지 등장했다. 누구나 쉽게관찰할 수있듯이,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민감한', '올바른', '우월한'태도는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과 통하는데가 있다. 그런 나르시시즘은 이 세상이 만인의 유아적 에고에 부응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유치한 기대와 사리사욕에 눈먼 파벌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만연한 가짜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 갈등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며, 결국 육체적 생존에 필요한 능력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어쩌면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나르시시즘 경찰"일 것이다. 지금까지 '민감하게 의식하거나 신경쓰지 않는'이라는 이 단어를 경멸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매우 무신경한 태도이며, 그런 말은 타자를 모욕할 의도가 있는 형용사에 불과하다.
위 내용을 볼때, "민감하게 의식하는"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이기적 신경증, 흔히 쓰는 말로 이기심에 맞춰 복무한다는 뜻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짐작하건대 세간의 이목을 끄는 고위급 인사들, 어쩌면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갈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런 민감한 태도를 타자들에게 투사하는 바람에, 정작 매년 미국비행기를 타는 승객 7억 5천만명의 진짜 심정은 깡그리 무시된다. 승객들은 끝날줄 모르는 긴 보안라인에 서서 "몸수색'과 짐수색을 받으며 탑승 절차가 지연되는 사태를 겪는다. 신발 폭약하나 때문에 충격적인 비용을 들여 7억 5천만 켤레의 신발을 벗겨보는 어이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는 미국에 초청받지 않은 여행객들이 매우 연역한 자존감을 갖고 있어서 출신국가가 어딘지 등을 물어보면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진행되는 것이다. 허나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부주의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들은 상식에 근가하고 합법적인 주권국가의 합리적, 방어적, 생존을 위한 이익추구의 문제로 접근하여 (홍채 인식을 포함한) 프로파일링(정보자료수집)을 활용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신경적적 증후군을 가리켜 "반동형성'이라고 부른다. 반동형성이란 개인이 어떤 결점의 반대방향을 독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그 결점을 벌충하려고 과도하게 애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실제로 타자의 감정에 대단히 무신경한 것이다. 이런 방법을 동원하여 소수집단은 개인적 이익을 취할 의도로 다수집단을 규제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성숙해지려면 자신의 이기심에 책임지는 법을 배우고, 이글스의 유명한 노래처럼 "그것을 극복하기"마련이다. 혹시 그게 안된다면, 이제 대안은 전체사회를 최저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테러리스트 용의자들과 직면하는 일이 혹시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할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우려때문에 결국 전체사회의 생존조차 위협받게 될 것이다.
위에 기술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은 여전히 행동을 가늠하는 세상의 지침으로 남아있다. (2006년 5월 갤럽조사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50%이상은 여전히 기본 도덕적 교리를 지킨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인의 85%이상은 도덕적으로 쇠퇴하는 흐름이 생겨났다고 의견을 표했다.
실재를 대체한 감정
의식척도에서 200이하 수준은 가짜와 부정적 감정을 가리킨다. 200부터 그 이상의 측정수준은 점진적 진실수준과 긍정적 감정을 나타낸다. 400대에 가면 진실은 감정을 압도하여 우선순위가 되는 논리와 이성으로서 드러난다. 어린 시절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성숙해져야만 그 감정은 이성이라는 실재에 항복하게 된다. 그 결과 결국 이성적이고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는" 통합을 이룬다. 부정적 감정은 주로 종속되고, 긍정적 정서만이 완전한 지배자로 허용된다.
의식수준 200이하의 감정은 자기도취적이고 동물적/에고 중심적이다. 흔히 에고 중심의 감정은 합리화되고 (그냥 사람이니까) 용서되곤 하지만, 그렇다고 칭찬할만한 것은 아니다. 진정시킬수 없는 감정은 공공생활이나 진지한 담론을 논하기에는 유치하고 부적절해 보인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책임질만한 능력이 있다고 예상되는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종종 어떤 행동이건, 아니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고 합법화하기 위해 감정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의식수준 200이상과이하의 사회분파 사이에는 심각한 간극이 존재한다.
나르시시즘은 이성을 제약하는 기층으로서 감정을 부추기고 타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그 감정을 이용한다. 따라서 인구의 단 1%라도 신성을 언급하는 것때문에 불편해진다면, 엄연히 인구의 99%가 이신론이라는 사실조차 단지 다수자인 그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무시되어야 한다고 여긴다.그 결과 소수 집단의 신경증적 성향과 미성숙함이 다수 집단을 지배할 가능성이 생긴다. 불복종 시위의 99%가 시작되는 지점이 바라 이런 과정이다. 이들의 시위는 자기중심주의를 당연히 맞춰 주어야 할 권리로 부풀린다. 그런 권리는 폭력, 폭동, 방화, 강도, 집단학살, 그리고 축구경기나 파리거리 폭동에서 표출된 파괴사태 등을 합리화한다. 나르시시즘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위치성이기 때문에 프로파링링 논쟁으로 비화될 뿐 아니라 인종주위, 성차별주의 종교주의로 쉽게 전환된다.
전통적 지침
종교적/영적 세계의 오랜 통념에 다르면 인류의 영적 진화를 방해하고 순수와 진실을 공격할 정도로 부정적 에너지가 인류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왔다. 이런 에너지는 전통적으로 악한, 사탄의 악마의 또는 낮은 아스트랄의라는 형용사로 묘사되었으며, 이를 통해 부정적 에너지가 "신을 섬기지 않는" 사악한 차원에서 유래했음을 암시한다. 진실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진실을 압도하여 오히려 가짜와 자리바꿈을 시도하려는 그 에너지를 고전적으로 루시퍼적 에너지(신에 대한 오만한 반항)라고 불렀다. 그리고 순수와 사랑을 파괴하려는 에너지를 가리켜 '사탄의'에너지라고 칭했다. 루시퍼적 에너지는 오만한 태도로 힘과 통제력을 추구하는 반면, 사탄의 에너지는 신성모독, 성적 노예화, 사디즘, 폭력, 영적 타락, 전쟁과 파괴 등에 휘말린다. 둘다 유혹과 꼬임을 이용하며 양의 탈을 쓴채 본성을 숨기는 데 능하며, 놀랍게도 신의 허락과 승인을 참칭한다( 또한 별칭 샘의 아들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 데이비드 버코비츠 사태처럼 정신질환에 걸린 경우도 흔치 않게 등장한다).
이 두가지 에너지의 영향력은 오늘날 사회에서 전향된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타난다. 미디어 때문에 그 영향은 크게 증폭되고 나름의 힘을 얻었다. 더 나아가 이런 경향은 세계 지도자들과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유명 연예인들에 의해 미화되기도 한다. 그 모든 파괴적 경향은 인간의 나약함과 기만에 취약한 면을 겨냥한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은 곧 에고자체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에 매료된 결과다. 바로 여기에서 이런 일련의 흐름이 나오고, 점점 자기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의 역사에서 신을 궁극의 적으로 간주하여 종교적 진리를 끌어내리려 하거나 신을 사탄의 이미지와 개념안에서 재정의하려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가 니케아 공의회 당시 의식수준 900이상에서 그 이후 400대로 추락한 사례를 명심하라. 이 사례에서 의미심장한 점은 일례로 요한묵시록(70)을신약 성경에 포함시킨 사실이다(신약성경은 원래 묵시록이 빠진 상태에서 의식수준 800으로 측정된다).
이슬람과 무함마드의 몰락에 대한 과거의 묘사도 그 내용이 의미심장하다(진실대 거짓 16 참고). 무함마드는 쿠란을 구술할 당시에 의식수준 700으로 측저오디지만 3년후에 별안간 130으로 추락한다. 그러다629년 갑자기 칼을 들고서 소위 "성전"을 시작했다. 그 전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지하드는 의식수준 30으로 측정된다).
와하비즘(30)의 등장도 이슬람에 큰 손상을 입혔다. 와하비즘의 창시자는 의식수준 20으로 측정된다. 와하비즘의 유해한 가르침은 사이드 쿠틉(75)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이슬람 율법, 샤리아는 의식수준 190, 이슬람의 묵시록적 예언은 70, 그리고 이슬람 승리주의는 50으로 측정된다.
흥미롭게도 의식수준 200이상으로 측정되는 사람들의 80%는 현대 이슬람을 위협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에 의식수준 200이하 사람들 중에는 40%만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의 또 하나 내재적 착오는 신에 대한 숭배를 무함마드 숭배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나 전령에 불과했고 최상의 상태에서 의식수준 700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불과 3년만에 끝났다(알라/신은 무한으로 측정된다). 그후 무함마드는 전쟁을 통한 세속의 권력이라는 함정에 굴복했다. 이슬람의 점진적 추락은 와라크의 "쿠란의 진실 2002년)"과 에머슨의 "지하드 주식회사 2006년)에 자세히 나온다. 더 명징한 설명은 저먼의 '테러리스트의 사고 2007년"을 참고하라.
종교재판 등을 보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조차 전복이나 (종교재판 사례에서 보듯이) 사탄의 공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최근에 거의 파산하여 문을 닫은 교구의 사제들이 남자아이를 상대로 벌인 성범죄에서 적나라하게 증명된다. 이 참담한 현실은 피해자들이 수천건의 범률소송을 제기하면서 느닷없이 세상에 알려졌다.
위에 언급한 카톨릭 교회의 비극외에도, 최근에 들어서나 지금 현재까지도 "타락한 구루"들이 셀수없이 많다. 그들은 보통 의식수준 500대 중반대를 유지하다가 최고 700대까지 오르지만 유혹과 매력, 그리고그 역할 때문에 생기는 꼬임때문에 의식수준이 하락했다. 이는 타자들에게 미치는 힘을 갖게 되면서 생겨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에고의 결함과 약점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성적유혹, 지위와 돈, 그리고 영적 에고의 상승, 미디어의 관심,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우쭐함 등 여러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타락한 지도자들은, 사실상 그들의 스승들이 사전에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길로 빠진 것이다).
영적 노력의 부침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등 유명한 성인들의 역사를 담은 책에도 잘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붓다도 약점이나 영적 결함을 찾아내려는 악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렸다. 매일 이루어지는 영적 노력안에서도 죄책감과 속죄, 혹은 영적 오만에 빠지고 싶은 유혹 등 정신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자기 안에서나 밖에서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영적 노력의 장애물과 장벽이 현대적 생활자체의 특질때문에 발생한다. 현대생활에는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아 가고, 진실하지 못한 가치를 대면하고, 이성과 현실검증 자체를 공격하는 등 미리 계산된 유혹뿐 아니라 은밀히 조지고딘 유혹이 판을 친다. 가령 인터넷 블로깅은 정치이슈를 만드는 사탄의 에너지와 루시퍼적 에너지에 필요한 정보수집-보급의 지배적 기반이다(장 알려진 증오 사이트 등이좋은 예다).
최근 연구에서는 증오발언과 태도의 인과관계가 역전된 상황이 흥미롭게 발견된다. 양의 탈이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자. 특정 사건이 증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때문에 그 증오는 정당한 것처럼 표면적으로 합법화되고 합리화된다. 양의 탈을 썼다고 하면 대개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이미 널리 퍼진 가설적 추정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사건이 먼저이고 그 뒤에 증오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의식측정 연구에 따르면 그 순서는 사실 반대다(독자들도 개인적으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 증오심이 성격의 특성으로서 선험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증오발언 등으로 그것을 표면화하기 위해서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다. 오히려 증오가 외부 변명거리를 찾았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서 그 변명거리, 즉 외부사건이 하나의 원인으로 비난받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전쟁중의 군대조차 적을 증오하지 않았고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적 세뇌와강압에 굴복하여 행동하고 있음을 눈치챘던 2차 세계대전에서 잘 볼 수 있다. 심지어 군대는 상대편의 용감한 행위에 서로 경의를 표하고 악수를 청했으며, 전시에 적이었다가 전후에는 평생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카미가제 조종사를 두려워했던 것이지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그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오하는 사람은 그저 증오심자체를 사랑하면서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런 부류중에 고액연봉을 받는 저명한 교수들도 있는데, 그들은 대개 주요 언론의 관심과 홍보를 통해서 막대한 자기되취적 희열을 얻는다. 이로써 전쟁은 증오집단이 가장 좋아하는 무대이자 논리적 속임수로 스스로 피해자인척 행사하는 장이 된다.
안전장치와 방어
종합적 의식연구를 통해서 종교적/영적 경로와 영적 스승을 측정한 진실수준 수치는 쉽게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의식연구 이전에는 역사적으로 혼란을 줄 만큼 무수한 선택사항 중에 선별해야 했지만 이제 확실한 경로를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와서 불멸의 영혼은 매우 위태로운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만큼 진실한 가르침이나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의도와 노력을 쏟아 부을만한 가치있는 일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자주 이렇게 물어보는 게 좋다.
나는 의식수준 170으로 측정되는 조종사가 운행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안전을 도모한다면서 조심성없이 의식수준 170이 운행하는 비행기를 덥썩타고 있다. 영적 안전은 육체적 생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영적 진화에 저항하는 내부적 반발은 인간에고자체의 구조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의 에고는 자신의 한계와 실수하기 쉬운 성향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을 무지라고 한다. 에고는 외관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본질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이상 큰 문제가 아니다. 의식측정은 외관이 아니라본질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예수, 크리슈나, 붓다가 진실로 가는 길에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말한 "무지"는 이제 더이상 영적 진화를 막아서지 못한다.
영적 속임수는 이제 정말로 불가능하다. 양의 탈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속임장치로서 효과를 볼 수 없다. 본질상 순수하고 진실하고 성스러운 것은 그 성질 그대로 측정된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나서서 의식측정을 하더라도 가짜는 까자라는 성질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