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따뜻한 남쪽 바닷가이다. 늘푸르러 하늘을 치솟는 울창한 대밭이 있고, 긴 고샅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맘 때면 하얀꽃을 피워 가을엔 노랗게 익은 탱자가 주렁 주렁 열리고, 가시로 빽빽한 탱자나무 숲엔 참새들의 삶터로 석양이면 모여든 새들의 우짖는 소리에 귀청이 터질듯 하다. 지금은 머릿속 기억만의 어렷을 적 고향 모습이다. 우리집 대밭은 오래전 돌림병으로 자취를 감췄고, 그 많았던 참새들도 지금은 보인둥 만둥인 채, 탱자나무 가지엔 앙상한 가시들만이 눈에 띌 뿐이다.
분망한 일과로 고된 중에도 지척의 산등성이를 넘어 불어준 시원한 바람이 있어 너무 고맙고, 그 바람에 실려 퍼진 아카시아향이 육신의 위안을 준다. 마침 산등성이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려니 문득 고향의 탱자꽃 향이 콧속을 스멀거린다. 아,탱자꽃이 그립다. 동구에 늘어선 탱자나무 길을 걷고도 싶다. 어서 바쁜 일들이 끝나면 제 백사, 나는 고향에 다녀오리라. 비록 지금은 모두 사라져 변해버렸지만, 기억여행만이라도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좋와 늘상 찾는 찻집, 평화다원에서 청태전차를 마시며 질리며 보내야겠다.
우리집 대밭은 이미 사라져 없지만, 대신할 곳이 그곳엔 있다. 낮은 산자락, 맑은 호숫가에 고즈넉한 모습의 평화다원은, 대밭에 감싸여 있으며, 대밭 사이로 억불산을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이름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찻집이다. 가경의 경관도 좋으려니와, 이 집의 찻맛은 예사를 초월한 천하 신품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의심되고 궁금하면 직접 맛보면 수긍할 것이다. 아니 찻집을 운영하는 평화다원의 내력만 들어도 납득이 갈 것이다. 찻집의 주인은 천년의 전통인 우리 고유의 “청태전”차 제조의 명인인 “김수희” 차인이시다.
“청태전”차는 청정한 산야의 야생 찻잎으로 만든 전차(錢茶) 일종의 고형(固形)인, 우리 고유의 차이름(茶名)이다. 청정의 자연환경인 장흥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즐겨 애용되온 전통의 발효차이다. 장흥은 삼국시대에 창건된 선종의 본산인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 주변의 비자림(榧子林)숲에서 자생한 청정의 찻잎을 이용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차가 청태전이다.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경세유표’에 장흥의 차(茶)이야기가 기록되 있고, ‘가오고락’과 ‘임하필기’에서 전차인 장흥의 ‘청태전’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 19곳의 다소(茶所)중 13개가 장흥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장흥의 ‘청태전’은 선약(仙藥)으로 통해 치유의 단방약으로 읽찍부터 즐겨 음용해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조가 까다롭고 커피와 같은 새로운 음료에 밀려 거의 외면되어 왔다. 김수희 명인은 거의 평생을 야생차밭을 누비며 채취한 좋은 찻잎으로 천년 고유의 맛인 ‘청태전’차 제조에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장흥을 중심으로 한 차인들과 함께 노력의 결실을 얻어, 이처럼 맛과 효능이 뛰어난 ‘청태전’이 다시 꽃피운 것이다.
2008년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 녹차콘테스트’에서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에서 100여종의 명차들과 당당히 겨뤄 “최고 금상” 수상의 영광을 획득했고, 지금은 ‘청태전’의 구수하고 독특한 맛과 향기로 까다로운 일본의 다인들도 ‘동양의 3대 명차’로 인정한다. ‘청태전차’는 일반 녹차보다 카데킨성분이 많이 함유되 있고, 발효과정에서 생성된 페놀화합물의 일종인 플라보노이드 물질을 많이 함유해, 인체 기능 향상에 유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정의 장흥 산야엔 보림사의 비자림 이외의, 부산면 관한마을, 행원마을, 천관산 기슭, 평화마을 중샘터, 장흥 읍성공원등에도 야생차가 지천으로 널려 자라고 있다. 김수희 명인은 이런 천혜의 조건의 차밭을 누비며 어린 순을 채취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시들린 후, 쩌서 절구에 찧어 고형차를 만들고, 맑고 고운 바람과 하늘에 오랜 시간을 발효시킨다. 이처럼 명차는 여간 아닌 지극정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같이 만들어진 차를 마시며 다원에 앉아 창밖의 가경을 바라보는 것은, 선경이 바로 이곳인 듯 싶다.
우리는 정담이나 진지한 말을 나눌 때면 늘상 술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술맛 때문만은 결코 아니리라. 얼굴만을 마주한 대담은 어쩐지 분위기가 너무 민숭스럽지 않는가. 그 민숭스럼의 대처로 술잔을 권하는 대화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커피나 일반 차는 계속 연음이 어렵다. 그런데 다인들을 보면 녹차는 술잔처럼 이용한다. 녹차 음차는 술잔보다도 대화 분위기에 유용하다. 더욱이나 ‘청태전’은 많이 마셔도 속이 항상 편하며, 따뜻하게 혹은 차갑게 마셔도 좋은 차이다. ‘청태전’은 오래 보관하면 더욱 성능과 맛이 향상되어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청태전’은 정담에 안성맞춤 적격의 차인 것이다.
나는 쉽지 않는 먼거리의 고향을 금년들어 벌써 세 번이나 다녀왔다. 이는 김수희 차인의 손수 끓여준 찻맛, 대숲의 바람소리, 아름다운 환경과 같은 여러 분위기의 탓도 있다.
그 집에 가면 차맛 뿐만이 아니다. 반세기도 넘어 다시 맛본 무우시루떡도 그 집이었고, 화로불에 구은 찰떡을 조청에 찍어 먹었던 맛도 즐겼고, 꼭꼭 싸서 보관해 둔 귀하디 귀한 홍매화 꽃잎을 ‘천태전차’에 띄워 마시며 자작시를 낭송하는 호사를 누린 곳, 이같은 것이 모두 ‘평화다원’에서의 나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나는 이곳 분위기를 진즉부터 글로 쓰고 싶었지만, 마치 메스컴에서 이용되는 그 빈번한 영업집 소개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그동안 머뭇거렸고, 사실을 진실되이 썼음에도 남들의 과장된 표현으로 비추일까 싶어 지금도 몹시 조심스럽다. 사실을 진솔하게 쓰려 노력했다. 이곳 기록의 근거는 김수희 다인에 의한 것이다. 혹 잘못이나 오해의 소지에는 고의성 없는 모두가 나의 부족함으로 이해 바라며, 그 때 낭송했던 자작시의 소개를 끝으로 청태전과 평화다원의 차이야기를 마친다.
꿈에 본 옛집.
김수희어릴 적 내 집은
추녀 끝이 가지런히 다듬어진 초가집.
사립문 옆에는 감나무가 서있고,마당 이 끝 저 끝에 명주실 매어 놓고
떫디 떫은 풋감 따서,
검붉은 색 질기디 질긴 낚시줄을
만드시는 아버지.헛청에 숯불 피워 냄비솟 얹어놓고
끓는 물에 자글자글 누애고치 넣어가며,
한손에 얼레 돌려 명주실 감겨지고
꼰데기 냄비솥에 쫑긋 쫑긋 돌려앉은 꼬맹이들.
“뜨겁다 물러 앉거라!”하시며 꼰데기를 거네 주시던,
늘 분주하신 어머니.여름 날 사립문 밖
도랑물이 흐르고,
고무신 배 눈 깜짝할 새 떠내려 가면,
한 짝 남은 예쁜 꽃신 꼭 쥐고 울던….
새록 새록 그리운 옛집의 어린 시절이
머릿속 한가득 채워집니다.아직도 그 옛집에서
빙그레 웃으시며 손짖하시는 아버지,
낭자머리 고운쪽을 머리 수건에 감추시고
땀을 씻는 어머니.
가슴 뭉클 잠이 깨어 뒤척이니
베갯머리 촉촉이 젖어 듭니다.이제 내 머리 희어진 할머니가 되어
어릴 적 놀던 집과
두 분 어른의 모습이
더욱 가슴이 어리도록 그립습니다.2006년 9월 5일. 평화다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