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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지 소개 * 백제 문주왕 시절의 산성, 공산성 *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입구에 사비문이다. 사비문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의 정문이다. 이 문은 1986년 11월 건립된 70㎡ 규모의 목조건물로 팔작(八作)지붕 3간 측면 2간의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황포돛배와 함께 700년 대백제를 느끼다! * “푸른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백마강에 황포돛배 뜬다” 구름 한 점 없이 깊고 깊은 푸른 하늘 위로 보름달이 둥실 솟아 은은한 달빛이 부여의 진산 부소산을 에워싸고 있다.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이 천지를 진동 하던 날 숨막히듯 가뿐 숨을 내쉬며 부소산을 오르는 여인들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다시는 보지 못할 절경에 마음이 더 아팠으리라. 이 같은 역사적인 사연과 아름다운 풍광을 바탕으로 황포돛배를 재현하고 백제의 한이 서린 백마강을 일주하는 관광은 색다른 감흥을 줄 것이다. 백마강을 일주하는 황포돛배는 길이 19.8m, 폭 4.5m 규모로 승선인원은 47명 정도이며 외형은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내부는 편의시설과 안전설비를 갖춰 안전도를 높임은 물론 관광객이 소음으로 인한 불편이 없도록 무소음 전기 모터를 장착하였다. 황포돛배는 백마강의 고란사와 수북정간 3.5km 구간에 걸쳐 왕복 운항하게 되며 관광객을 매료시키는 부여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궁원지(宮苑池)로, 조성 기록이 명확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궁남지의 조경기술은『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궁남지는 규모와 정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1970년 부소산에 국립부여박물관이 개관. 유물 양이 많아지면서 금성산으로 자릴 옮겨 다시 문을 열면서 백제에 관한 전시의 폭이 넓어졌다. 4개 상설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 약 1천 점의 유물이 전시되는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금강 유역 선사시대
청동기 부여부터 걸어보자. 제1전시실 초입, 부여 송국리 발굴조사를 토대로 청동기 시대의 마을을 모형으로 만들어 놨다. 반달돌칼, 간돌검, 간토기 등 유물을 통해 선사시대의 일상이 어떠했을지 윤곽이 잡혀간다.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부여의 원삼국시대 유물도 볼 수 있다.
한국 청동기를 대표하는 석기 유물 '간돌검' 한국식 동검은 요령식에 비해 검몸이 곧게 뻗어 있으며 마디가 뚜렷하다. 이 모양을 토대로 철기시대의 철검이 비슷한 형식을 보인다. 곱은옥은 석관묘에서 동검과 함께 자주 발견되는 유물 중 하나다. 천하석이란 것을 다듬은 장신구로 1쌍씩 발견돼 귀걸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양식이 철기시대 말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미뤄보아 당시 부여의 '유행'이지 않았을까 싶다. 대쪽모양동기는 특이한 외관으로 이곳 유물 중 으뜸이다. 볼록한 겉모양에 얕은 곡선미로 무장돼 있으며 상하, 좌우로 대칭이 뚜렷하고 정교한 무늬는 흐트러짐이 없다. 게다가 마감까지 깔끔하다. 이 동기는 부여가 시베리아 일대의 샤머니즘과 관련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물이라고 한다. 백제의 사비천도와 멸망
제2전시실은 백제와 사비성 이야기로 가득하다. 먼저 '사비(부여) 천도'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자. 웅진(공주)에서 지내던 백제 동성왕은 더 좋은 수도를 세우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 1순위는 한강유역. 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한강을 안정적인 국토로 되찾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이 사비에 측근을 보내 성을 쌓도록 지시하고, 사비에서 자주 사냥했다고 전한다. 동성왕이 사비를 눈여겨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무령왕 그리고 성왕에 이르면서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도시 이전 계획을 세우고 재도약의 단초를 사비 천도로 마련하고자 했다. 성왕 16년, 천도가 추진됐고 국호는 '남부여'로 개칭된다. 부여는 지방과 달리 '5부5항제'라는 특별한 제도로 정비됐다. 수도를 5부(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로 나눠 각 부에는 5항을 두는 등 세심한 관리로 왕권 강화까지 도모했다. 그 5부 중 하나인 '전부'가 새겨진 돌이 제2전시실 초입의 유물이다.
투박한 무광 흑색, 탄탄한 종아리를 연상시키는 여러 개의 다리… 어떤 작품일까 하고 봤더니 벼루다. 멋으로 느껴지던 외관이, 벼루라고 하니 너무 멋낸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 먹을 갈아 어디에 글씨를 썼을까. 백제의 기록은 돌이나 나무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많다. 1300년은 단단한 돌도 무뎌져서 새긴 글자가 알아보기 어려워지게 되는 긴 시간. 그럼에도 부식되기 쉬운 나무에 적힌 기록이 남아있으니, '목간'이라고 한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1993년 10월, 논바닥에 대한민국의 이목이 쏠렸다. 국립부여박물관 발굴팀에 의해 흙 속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전문가는 이 발굴을 "기적"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 귀중함은 1300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백제의 옅어진 맥박이 다시 고동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말 그대로 향을 피우는 물건이다. 당시 국교인 불교와 관련된 의식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청동을 주원료로 만들어 도금한 6세기의 작품이다. 뚜껑, 몸체, 받침으로 구성되며 높이 61.8, 무게 11.85kg으로 향로 중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향로 위부터 아래로 살펴봤다. 뚜껑 맨 위에는 날개를 펼친 봉황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5개 산봉과 그 사이마다 신선이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봉황과 관련된 고대설화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아래로 물고기, 사슴, 학 등 물·땅·하늘의 27마리 동물이 배치돼 있다. 몸체 아래는 용을 형상화한 받침이다. 이 용의 모습이 한국 고대에 표현되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어디선가 비슷한 역동성과 신비한 분위기가 본 기억이 있는데, 바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용과 비슷한 느낌이다. 향로의 외관만큼 그 속에 담긴 내면세계도 벅찬 감흥을 부른다. 봉황은 음, 용은 양을 대표하는 신수로서 음양관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선 5명, 산봉우리 5개에서 겹치는 5라는 숫자는 오행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백제의 5부5방제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와 5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부여에서 꽃 핀 불교 사비 천도 후 백제의 불교문화는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사지, 폐사지로 남아 미미한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정도만이 남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장인의 작품들, 절정에 이른 백제의 불교유물을 제3전시실에서 주로 다뤘다. 아쉬운 만큼 눈여겨 살펴보게 된다.
도깨비를 묘사한 사각형 기와가 눈길을 끈다. 목재의 단면이 사각인 지붕의 뼈대 끝에 달렸던 기와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이런 목재가 사용됐던 것으로 봐서 독특한 건축기술이 적용된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표정에선 생동감이 살아있는 듯 위엄이 전해진다. 유리 너머 유물 중엔 파편처럼 작은 조각을 맞춰놓은 것이 더러 있는데, 그 앞에 서게 되면 웬지 모르게 마음이 아련하다. 반대로 생동감 넘치는 표정, 섬세한 문양에서는 볼수록 진귀하고 선조의 미적 감각이 세련돼 보인다. 관람하면서 유리벽에 이미가 닿기를 수차례, 백제 유물은 끌어다기는 힘이 쎄다.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
첫댓글 자세한 사진 설명 모두 최고입니다
오늘도 길상여의(吉祥如意) 같은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상세히 올려 주었네요 이번에도 이틀이면 만차 예상합니다
백산 신청 올립니다
백제역사의 중심
부여 공주
즐거운 이벤트입니다
순천 백우RC회장님도 함께 동행하게 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