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속
조영순
내 몸 잘 길들여 익숙해진 땅
한동안 사람들에게 마음 주지 않아
마구 웃자란 잡초들이 손을 쓰~윽 내밀어
내 장단지를 훑고 간다 이미 주인 떠난 집 마당엔
코끝 간지럽혀 한바탕 재채기로 기분 좋게 한 강아지풀이랑
맹물처럼 살아 아주 순해 진
달맞이꽃 아아 저리도 속 깊어 가슴 미어진
보랏빛 어머니 적삼 그 얼비친 나팔꽃
오늘 비로소 꽃이 되어
제 힘에 겨운 속살 알차게 드러내고 있다
휘청대는 내 무릎 서로 얼싸 안은 채
여윌 대로 여윈 등에 한 바지게 햇빛을
냅다 부려놓고 가는 까실한 갈바람과
아주 오랫동안 풀섶에 서서
서로 어울려 어깨춤을 추고 있다
목련 핀 집
조영순
오랫동안 눈이 부셨다 맑은 길을 내는 그분의 미소 점
점 야위어져가는 손목 파란 핏줄들이 가끔 박동을 멈추
기도 하지만 까치발 딛고 영혼의 길 묻는 눈빛은 순하디
순하다 또릿또릿 눈뜨는 가슴은 젖빛으로 가득 채워져
더 이상 출렁이지 않는다 내 속에 마당 하나 만든 날 올
곧은 햇살 속으로 손 내밀면 새벽녘 교회당 종소리 따라
숨가삐 달려가던 그 자리도 언 듯 스친다
산책
조영순
참 오랜만에 개울가에 앉아 먼 하늘 바라보며 세수를 한
다 내 손금만큼이나 자잘한 가지위에 맑고 순한 눈꽃들
이 피어 있었다 뽀쪽하게 곧추세운 신경들을 하얗게 덮
어주고 있었다 컹, 컹, 컹, 개 짖는 소리 눈 속에 웅크린
앞산 뒷산 새싹들 깨우고 자꾸만 옆으로 눕는 개울물 따
라 세월의 잔기침도 함께 흐른다 까실하게 일어서는 삶
의 내력들 저마다 키를 낮추면 근심도 잦아져 눈부신 희
망으로 오는가 뒷집지고 빈 논둑길 돌아오는 핼쓱한 아
침, 말갛게 씻겨진 얼굴 새파랗게 댓잎들 반짝반짝 속눈
썹을 씻고 있다
쵸파티 해변 *
조영순
바다는 사리빛 깊은 속마음을 비로소 열어 보이고 있다
순간, 열릴 듯 싶잖은 말라붙은 풍경이 굵은 빗방울의
몬순에 지겨워지기도 하고 또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
다 아득한 수평선에 망고의 샛노란 하늘이 풀어지고 비
젖은 바람, 밤 내 울어대는 까마귀들과 섞이고 있다 그물
을 걷으러 떠나는 하얀 목선들, 손을 쫙 펴면 일시에 들
어올 것 같은 검은 새 떼들 *벨부리 스넥코너 지붕 위에
도 맨발의 아침은 오고 선잠 깬 아이들의 부시시한 눈빛,
둥둥 *타블라 치는 손끝은 더욱 빨라져 허구의 참깨치고
짜이빛 해변 걸어도 좋은 *보르겐 플라워 붉은 입술에
무르익은 체리 향기 등굽은 소 너머로 활짝 열리는
어둠 끝에서 오는 노래
*쵸파티 해변 : Marline Drive 북쪽 끝에 있는 해변
벨부리 : 오후부터 밤까지 더위를 식히러 해변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스넥을 파는 노점
타블라 : 인도사람들이 즐기는 작은 북으로 손끝과 북의 강도에 따라 고저가 달라지는 악기
보르겐 플라워 : 담장에 기대어 피는 다년생 덩굴 식물로 진자줏빛 꽃
메꽃
조영순
재개발 지역으로 밀려난 내 사는 곳 빈 항아리며 칠 벗
겨진 소반이며 한숨 묻어 있는 쪽마루를 버려두고 그렇
게 쫓기듯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마지막 남은 잿빛, 지
붕들이 무너져 내리자 이내 명아주와 망초가 발빠르게
들어섰다. 담벼락에 기대어 선 수수꽃다리 떠난 사람들
마음 한 자락 붙잡아 자잘한 그림자 둥글게 품고 있었다
멈칫했다 형광등 파랗게 깜박이는 내 작업실 비껴가는
길 잡풀들 틈새로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메꽃 한 송이
혼자서 둥글게 휘어지면서 아무에게나 손 흔들며 잘 놀
고 있었다 겨드랑이 끝 긴 꽃대 위 하얀 꽃술 여섯 개의
메아리 나를 껴안고 오오래 허리굽혀 세워두고 뜻도 없
이 출렁이는 허허로운 말들 들여다 보며 한 여름을 살았
다 젖은 몸으로 가늘게 휘청거리며 소나기 속에 섞여 들
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