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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기관단총 |
생산년도 | 1941~1950 |
구경 | 7.62mm |
사용탄약 | 7.62x25mm 토카레프 |
탄창 | 35발들이 바나나 탄창 71발들이 드럼 탄창 |
무게 | 3.63kg(탄창 없을 때),5.5kg (71발 드럼탄창) |
작동방식 | 블로우백, 오픈 볼트 |
연사속도 | 900발/분 |
최대사거리 | 200m |
길이 | 269mm |
전장 | 843mm |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 베트남전 당시의 북베트남군 등 공산진영에서 사용하였다.
독일군은 휴대법과 모양 때문에 발랄라이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따발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어 키릴 문자로 읽으면 입에 착 감기게 "뻬뻬샤"라고 부른다.
'아빠'라는 뜻의 '파파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밀덕계에서는 별명 '파파샤'가 정식명칭보다 더 알려져 있었다.
6.25 직전 북한에서는 PPSh-41 를 "따발총 49식 기관단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김일성이 각료, 군지휘관들과 한 컷. 김일성 바로 왼쪽이 심복인 김책이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자체 제작된 연발총기라고 생각된다. 북한에서는 49식이라는 이름으로 제식화했으며,
이후 6.25 남침의 상징이 되었다.
5. M1/M2 박격포
포열 전장: 1.22 m
전체 중량: 151 kg
포열: 48 kg
포다리: 24 kg
포판: 79 kg
유효 사거리: 515 m~
최대 사거리: 4 023 m
2차대전 때 미군이 개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원래 연막탄과 화학탄을 운용하기 위한 M1 화학탄 박격포의 후신으로 개발되었다.
1차 대전 이후 화학무기 규제 풍조 때문에 작열탄을 쓰는 방향으로 돌아서서 M1 기반으로 개발한 것이 M2.
포다리가 양각대가 아니라 단각대 형태였다. 그리고 박격포에서는 비교적 드문 편인 강선식 포신, 탄 역시 일반적
박격포탄의 안정핀이 없는 일반 총탄이나 포탄 형태에 가깝다.강선식은 연사속도가 좀 느려지고, 강선의 두께 만큼 포가
과열에 약해지는 단점이 있으나 바람에 영향을 덜 받는다. 조준경을 포구 근처에 끼워서 조준하기
때문에 쏘기 전에 반드시 분리 했던 점 또한 M2의 특징이자 단점 중 하나.
3분할해서 도수운반 가능하지만, 보다시피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포판은 2인이 앞뒤에서 들고 운반하게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다.
6. M3/곡사포
구경 | 105mm |
전장 | 3.94m(견인상태)/포신장 1.88m |
전폭 | 1.70m |
전고 | 1.27m |
전비중량 | 1,130kg |
포탄중량 | 14.98kg(유탄) |
발사속도 | 최고 분당 4발, 지속 분당 2발 |
포구초속 | 311m/s |
최대사정 | 7,586m |
유효사정 | 6,525m |
부앙각 | -9〜30도 |
좌우사각 | 45도 |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야포에 비해 국군의 대응 전력은 사거리나 화력 모두에서 절대 열세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쟁 초기에도 국군 포병부대는 그야말로 놀라운 분투를 펼쳤고 오히려 북한군을 압도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창군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고의 중화기였던 105밀리미터 M3 곡사포(이하 M3)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신화를 썼던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국군은 창설 당시에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을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였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 이후에도 국군이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65,000명의 병력을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지원하기로 한국 정부와 1949년 9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남침을 위해 북한에게 충분한 물자를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국군이 38선 경비와 국내 치안 유지에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만 하였다.
▲ 한국전쟁 당시 M3 곡사포 발사 장면
<사진:육군 한국전쟁사 싸이트>
M3 곡사포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대 중화기였다.
흔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북한군 전차가 튀어나와 아군이 당황한 것처럼
묘사된 글이 많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북한군의 전력 증강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전쟁 전에 수 차례에 걸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전차와 야포 그리고 전투기의 공급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남북간의 전력 격차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북한이 남침 능력을 오판하여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포병 장비도 당시 미군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155밀리미터 M1(이후 M114) 곡사포는
고사하고 보병 지원용으로 대량 사용하던 105밀리미터 M2(이후 M101) 곡사포도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국군에게 2.36인치 로켓포와 57밀리미터 대전차포 그리고 M3을 공급하여 주었지만
이마저도 대부분 정비를 요하던 상태였다. 하지만 국군은 이를 해방된 내 나라를 지켜 주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 귀하게 다루었다.
<출처및참고자료:유용원의군사세계>
7. SU-76 경자주포
SU-76 | |
중량 | 10.6t |
전장 | 4.88m |
전폭 | 2.73m |
전고 | 2.17m |
승무원 | 4명 (전차장, 포수, 장전수, 조종수) |
장갑 | 16mm ~ 35mm |
주무장 | 76.2mm ZiS-3 대전차포 1문 |
부무장 | 없음.병사들의 개인화기로 방어 |
엔진 | GAZ-203 가솔린 엔진 2기 (170hp) |
출력비 | 17hp/t |
현가장치 | 토션 바 |
항속거리 | 320km |
속도 | 45km/h |
생산량 | 14,292대 이상 |
<한국전쟁 당시 촬영된 사진. 미군과 국군이 격파된 SU-76을 둘러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북한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당시 T-34/85 수량의 절반이 넘는 150대 이상을 남침에 사용하여,
초반에 장비가 부족한 국군에 크나큰 출혈을 강요했다. 이후 국군에 장비가 인도되고 UN군이 증원되면서,
역시 상부 개방식 경장갑 전투실 덕분에 다수의 SU-76이 유엔군과 한국군의 바주카, 대전차포, 육박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또한 그 당시 국군은 훈련도 빈약하고 기갑장비 자체를 본 일이 극히 적어서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를 전차로 오인할 정도였으므로 SU-76을 격파해도 전차 격파로 센 일이 많다.
이후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대다수가 장비를 버리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다량의 SU-76이 UN군에게 노획되었으며, 이중 일부 차량은 정비를 하고 국군 표시를 페인트로 칠한 다음 국군에 의해 운용되었다.
그러나 노획 차량이므로 장기간의 정비운용이 어렵기 때문에 정식으로 한국군에 기갑장비가 인도되면서 차차 소모돼서 사라졌다.
이후로 모두 폐기처분되었는지 국내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한국전쟁 외에도 공여된 국가나 제3국에서 실전에 간간히 투입되었으며, 워낙 생산된 숫자가 많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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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공산권의 군사박물관에 1대씩은 보존되어 있다
8. M8 그레이하운드
M8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이었다. 총 27대를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았으며 모두 독립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미국이 이 장갑차를 공여한 이유는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에 기갑부대를 창설할 필요는 있으며
,
그 때 경험이 있는 기갑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얼핏 보기에는 전차와 비슷하며 탑승원 수나 좌석 위치가 전차와 비슷하나
장갑차이며 방어력 및 화력이 약해 공세적으로 쓰기에는 어렵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레이하운드가 한국에 도입된 후에는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38선을 순회하면서 아군측 전차로 선전하기도 했고,
심지어 T-34를 상대로 대전차전(!!)을 벌여 장갑차 2대의 연계 플레이로 우선 1대가 T-34의 무한궤도를
맞추어 기동불능에 빠지게 한 후, 무한궤도를 수리하려고 운전병이 전면장갑에 있는 해치를 열고 나올 때 바로
그 해치를 매복한 나머지 1대의 장갑차가 사격, T-34를 격파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태생이 장갑차인지라 무리하게 전차전에 투입된 결과 크나큰 피해를 입어야 했고, 이후로도 연이은 격전에 잇달아
투입되면서 점차 소모되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시작할 무렵에는 극소수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운용 기록은 1950년 11월의 청진 전투에 투입된 것이지만 그해 12월 흥남 철수에서는
적재 물자 목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시점에서 전량 소진된 것으로 추측되었지만
사실은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 손실분 중 일부는 타 부대로 파견된 것들이고 이후에
미국의 원조로 넘겨받아 52년도 광복절 사열식 사진에도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나온다.
9. M36 잭슨 구축전차
물론 M36은 본격적인 전차는 아니어서 사실상 경전차 취급을 받았지만 전차가 아쉬웠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게다가 화력만큼은 당시 미국의 주력전차인 M46 패튼과 사실상 동일했으며, 구경도 90mm라 지원포격용으로도 쓸만했다.
1953년 1월부터 정전 때까지 53전차중대 3소대장으로 M36 경전차를 몰고 전장을
누빈 김봉기(金鳳起·75·갑종24기)예비역 대령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M36 경전차를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M36 경전차는 주로 소대급 단위(전차 5대로 구성)로 실전에 투입돼 주로 보병의 돌격전에 기동간 화력지원을
하는 형태로 운용됐을 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같이 대규모 전차전을 벌인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미 북한의 주요 전차인 T-34/85는 퍼싱과 이지에잇, M46 패튼한테 다 갈려나갔다.
한국 육군에서는 1959년 퇴역했으며 이후 상당 기간 전방 지역 고지에서 고정포로 운용됐다.
현재는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이나 상무대에 위치한 육군기계화학교에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광주 금남로를 행진하며 지나 가는 대한민국 건군 최초의 기갑부대 창설 전차 M36 잭슨 구축 전차대 - 1955년 3월 1일>
10. T-34 중형전차
중량 32톤 /전장 6.68m 전폭 3.0m / 전고 2.45m / 승무원 4명 / ZiS-S-53 85mm 전차포 (적재탄수 60여발)
/ 7.62mm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360km / 최대속도 53km/h
T-34는 2차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차임에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기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북한군이 T-34를 앞세워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가장 최신형이라 할 수 있는 T-34/85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고 당시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로 격파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북한군이 보유한 T-34는 전쟁의 모든 것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전쟁 발발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말부터 다양한 전차 저지 수단이 확보되면서 이를 격파하는데
그다지 애를 먹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던 쓰라린 아픔과
서울 도심을 질주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T-34는 개발국이자 최대 사용국이었던 소련에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하여 조국을 구한
귀한 전차로 지금도 대접받고 있지만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상징물이 되어버렸다.
같은 사물이라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각각 다른 이에게
혜택과 피해가 동시에 나타나는 무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까지 6.25 한국전쟁에 사용되었던 대표적인무기 TOP10을 살펴보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