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회와 메리먼 해리스 감독
조선에서 미 감리회는 계속 성장하였다. 1908년에 미 감리회는 그동안의 성장을 기반으로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조선선교연회 시대를 마감하고 조선연회를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조선 반도에서 펼치게 되었다.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선연회(Korea Annual Conference)로 격상되는 과정에 중심에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역시 해리스 감독이었다. 그는 조선선연회와 조선연회 조직에 중요한 공을 세운 미감리회 감독이다.
1908년 일본감리교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해리스는 명예감독으로 추대되어 실제적으로 일본교회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이라는 선교지가 있었다. 1908년 3월 11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제4회 조선선교연회가 해리스 감독의 주재 하에 개최되었다. 이때 선교연회에서 연회로의 승격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해리스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하게 토론을 거쳤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부를 물었다. 투표 결과 찬성 12표, 반대 2표로 가결되어 해리스 감독은 조선연회가 조직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제4회 조선선교연회는 제1회 조선연회를 겸하게 되었고 역사에는 제1회 조선연회로 기록되었다. 실제적으로 조선에 연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리스라는 감독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일로 인해 해리스는 1908년에 그의 거처지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기게 되어 조선감리교회는 감독이 상주하는 연회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888년 38명에 불과했던 소규모 조선의 신앙공동체가 20여 년이 지나서 수만 명의 대교회로 성장했다. 이런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해리스가 조선 상주 감독이 됨으로써 조선감리교회가 더욱더 체계적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제 조선에도 미국인 감독이 임명받았다는 차원을 넘어서 미국인 감독이 조선에 머문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다. 제1회 조선연회 둘째 날(1908년 3월 12일)에 해리스 성역 40주년 축하 행사가 개최되었다. 해리스 감독은 조선에서의 활동적인 사역으로 조선감리회는 많이 성장했다. 해리스는 1908년 조선연회가 조직되면서 조선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해리스 감독은 1916년 은퇴할 때까지 조선감리회를 위하여 성실하게 감독직을 수행했다.
1908년 당시 미 감리회 조선연회 교세는 5개 지방, 63개 구역, 241개 교회, 입교인과 학습인 합쳐 24,244명이었다. 해리스 감독이 사회로 개회된 제1회 조선연회는 영문서기에 베크(S. A. Beck, 白瑞岩) 목사를, 국문서기에 손승용(孫承鏞) 목사를, 부서기에 데밍(Charles Scott Deming, 都伊明) 목사를, 회계에 포웰(E. Douglas Follwell) 목사를, 통계서기에 모아(David Hastings Moore, 文約翰)를 각각 임명했다. 또한 경성지방에 존스(Geo Heber Jones, 趙元時) 감리사, 영변지방에 모아 감리사, 공주지방에 케이블 감리사, 평양지방에 노블(魯普乙) 감리사, 수원지방에 버딕(George M. Burdick, 邊兆鎭) 감리사를 임명하였다. 미 감리회 조직 연회에 참석했던 선교사와 한국 목사는 베크, 베커(A. L. Becker, 白雅德), 벙커(Annie Ellers Bunker), 케이블, 데밍, 존스, 모아, 모리스(C. D. Morris, 慕理是), 노블, 루퍼스(W. C. Lufus, 劉芙秀), 테일러(C. Taylor), 윌리엄스(F. E. C. Williams, 禹利岩)였으며, 한국인은 손승용, 이익모(李益模), 홍승하, 장락도, 김창규, 권신일, 김우권(金禹權), 현순, 김창식이었다. 1908년 5월에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있는 리릭 홀(Lylic Hall)에서 열린 미감리회 총회에서 해리스 감독은 일본 및 조선의 선교감독으로 연임되었다.
1909년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평양제일교회에서 제2회 조선연회가 해리스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미 감리회 조선연회는 경성지방에 노블 감리사, 평양지방에 노블 감리사, 영변지방에 모리스 감리사, 수원지방에 버딕 감리사, 충청북지방에 케이블 감리사, 충청남지방에 스웨어러 감리사를 임명하여 지방을 확대 조직하여 감리교 선교의 성장을 보여 주었다. 해리스 감독은 제3회 조선연회(1910년 5월 2일 개최), 제4회 조선연회(1911년 6월 21일 조선연회(1912년 3월 5일 개최)를 이끌었다.
제5회 조선연회는 1912년 3월 5일부터 12일까지 상동교회에서 해리스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공주동지방에 테일러(Corwin Taylor) 감리사, 공주서지방에 스웨어러 감리사, 해주지방에 데밍 감리사, 수원지방에 버딕 감리사, 경성지방에 데밍 감리사, 평양지방에 모리스 감리사, 평양서지방에 모리스 감리사, 원주지방에 벡 감리사, 영변지방에 모리스 감리사가 각각 임명되어 미 감리회가 해리스 감독의 지도하에 꾸준하게 발전된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제6회 조선연회는 1913년 6월 5일부터 1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배쉬포드와 해리스 감독의 공동사회로 개최하였다. 제6회 조선연회에서는 지방을 8개로 조직하였다. 제7회 조선연회는 1914년 6월 3일부터 8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루이스 감독과 해리스 감독의 공동사회로 개최되어 10개 지방을 조직하여 각각 감리사를 임명했으며 이 두 감독은 제8회 조선연회(1915년 4월 21일 개최)도 이끌었다. 루이스(Wilson Seeley Lewis) 감독은 1908년에 미 감리교 감독에 당선되어 조선연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제9회 조선연회(1916년 3월 8일 개최)는 해리스 감독이 이끌었다. 해리스 감독은 1916년 제9회 조선연회는 해리스 감독에게는 마지막이었다. 정년 은퇴하는 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별사를 남기고 조선연회를 웰치(Herbert Welch) 감독에게 물려주고 정년 은퇴했다.
은퇴 후 해리스 감독은 아내 플로라 베스트(1907년 9월 7일 별세)와 딸 플로렌스 해리스(1878년 10월 17일 별세)가 묻힌 일본에 자신도 묻히기를 원해서 일본 도교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거처를 정했다. 이곳은 미감리회가 설립한 학원이고 아내와 딸이 묻힌 아오야마 묘지와 가까운 곳이었다. 1919년 노년의 해리스는 아내 플로라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베스트(Elizabeth Best)와 재혼하고 쓸쓸한 노후를 외롭지 않게 보냈다. 1921년 동맥경화증세가 심해져 결국 해리스 감독은 5월 8일 저녁 6시 아오야마 학원 자택에서 별세하고 그의 아내와 딸이 묻힌 아오야마 묘지에 장사 되었다.
일본에서 오랜 시간을 목회했던 해리스 감독은 친일적 성향이 많았다. 그래서 조선교회를 관할하면서 일본 편향적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했던 대표적 친일파 감독이었다. 1907년 한국 감리교 개척자인 스크랜턴 선교사가 목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을 떠나게 된 것도 해리스 감독의 편파적인 친일 정책 때문이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1916년 은퇴하고 돌아갈 때 일본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2등 훈장인 서옥장(瑞玉章, Order of the Sacred Treasure)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리스 감독은 조선에 감리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선교회가 조선선교연회로 발전하고 다시 조선연회로 성장하기까지 해리스 감독의 공로는 길이 기억해야 한다.
그는 몇 권의 저서들도 남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887년에 출판한 《Address: Japanese Buddhism》, 1907년에 인쇄된 감리교 감독의 총서《Christianity in Japan》, 1910년에 출판된 《Save Korea》, 《Competent Witnesses on Korea as a Mission Field》 등이 있다.
해리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