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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
모든 경제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
‘위기 속에서는 누구나 사회주의자’라고들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난타당한 각국 경제가 전 지구적 경제 붕괴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아선 것이라고는 대규모 국가 개입뿐인 상황에서, 정부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주장하면서 기업이 망하고 은행이 파산하며 자가 소유자가 담보대출을 갚지 못하는 사대를 방치할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비록 일부 국가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통제하기도 전에 봉쇄 조치를 뚫고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말이다.
보통 때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른바 자유경쟁 시장의 작동에 조금이라도 간섭할라치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에 따르면 공공 투자가 너무 많을 때 가격 메커니즘의 자연스러운 작동이 왜곡되는데, 이 가격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사회의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도록 촉진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가격 메커니즘을 배제하고 이 문제에 대처하려면 가용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며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는 중앙 계획에 따르게 만들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시스템이다. 선의의 관료적 개입이라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며 이는 효율성을 강화하기는커녕 약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우익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사기업을 공공 소유로 만들거나 공적 자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토대를 제공하는 슘페터적 힘(창조적 파괴)을 방해한다.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제품을 생산하거나 신기술을 연구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저렴한 대출을 제공하면 이러한 기업들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인센티브가 제거된다. 이들은 국가 담당자와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부패와 후견주의clientelism에 빠져들게 되면서 기업 지배구조가 손상될 것이다. 관료는 국가가 후원하는 민간 대기업 내의 동조자와 함께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것이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그들에 따르면 그린 뉴딜은 환경 파괴를 더욱 악화하는 부패와 비효율성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통해 반박된다.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은 국제 독점기업들과 국가 및 국제기구 깊숙한 곳에 포진한 그들의 고객 사이의 뿌리 깊은 결탁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온갖 부채와 비효율성을 낳고 있다. 금융, 기업, 정치 엘리트들은 경제 활동을 계획하기 위해 협력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이익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정부는 격랑 속에서 더 작은 경쟁자들을 흡수하고 환경 및 노동 규제를 비웃으며 조세를 회피함으로써 경제 전체에서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기업들에 다시 보조금과 저렴한 대출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전면적 구제책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중앙은행은 경제 전체에 자본을 어떻게 할당할지에 대해 계획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자산 가격을 부풀리고 용처가 어디든 아랑곳하지 않고 민간부문 전체에 저렴한 대출을 제공하는 것이다. 화석 연료업체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려는 로비에 여념이 없으며 공해 유발 기업들은 쉽게 저금리 대출을 받고 있다. 쓸모없는, 아니 더 나아가 해로운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이들 대다수는 그 공급 방식 역시 매우 비효율적이다)도 국가의 아낌없는 지원 덕택에 부도의 운명을 벗어나 살아남았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총체적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국가와 자본가, 그리고 여타 막강한 지배계급 행위자들은 그들 자신과 이들을 낳은 시스템의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위기 앞에서 자본주의 국가, 은행, 기업들은 각자 행동의 결과가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경기 하강의 충격을 억제함으로써 근본적인 정치·경제 변혁 요구를 미연에 방지한다. 부는 영향력으로 변환되고, 영향력은 다시 부로 돌아온다. 경제 문제에 비정치적 해법이란 없다. 모든 경제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다.
여기에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이미 계획 경제 속에 살고 있다면 결정권자들은 감시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계획이 민주적으로 결정되지 않아도 되는가? 위기에서 비롯된 지구자본주의의 독점화는 이러한 권력과 소유의 질문을 대중적 토론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전 지구적 독점기업들과 이들을 뒷받침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에 대한 싸움 없이는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많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에서 출현 중인 과두제 경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근로 대중에 대한 공직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경제 자체를 민주화하는 것이다. 정부 부처, 중앙은행, 비정부 공공 조직들은 모두 더욱 강화된 공적 감시 아래 놓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초거대기업들과 금융기관들에 공적 소유와 민주적 통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부가 대규모 구제 프로그램에 착수한다면 그 대상이 되는 기업들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민중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의제의 목표는 우리 경제를 탈탄소화하면서 동시에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이런 계획에 반대하며 늘 같은 주장을 다시 꺼내들겠지만 우리가 이미 국가에 의해 계획되는 비경쟁적, 독점적 경제에 살고 있다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들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돌아가자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거기에 실제로 도달할 길(막대한 사회·정치적 비용을 치르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을 지도로 그려 보일 수 없는 한 이런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은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며 현재 진행되는 상당 수준의 국가 계획(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작은 규모로 시행돼왔고 앞으로도 몇 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을 강조하면서 민주적 그린 뉴딜을 주창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유주의 정치·경제가 구축한 ‘국가’와 ‘시장’ 사이의 경계선은 지금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 희미하다. ‘계획이냐 아니냐를 고민할 때는 지났다. 이제는 ’누구를 위해 계획해야 하는가‘를 선택해야 할 때다.(97~102)
누구의 이익을 위한 계획인가
사회주의가 대기업을 위한 복지를 뜻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가 엄청난 규모로 부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사회주의는 대기업을 위한 복지 따위가 아니다. 국가 개입 수준이 높아지면 저절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는 주장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자본주의 국가가 일시적인 노동시장 개입과 전략적인 국유화를 통해 스스로 쉽게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보건과 교육에 정부가 지출하는 금액(현 상황에는 오히려 무급휴직furlough제도의 기업 융자)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가 될 수는 없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독점자본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니며 ‘국가사회주의’나 비슷한 류의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부르주아 개혁주의 관점은 매우 널리 퍼진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이 선보이는 계획이 어느 정도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아래 남아 있다. 자본주의, 그러니까 실제로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의심할 바 없는 자본주의 말이다.”
각국 정부의 비상 대응이 없었다면 코로나19 위기는 즉각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을 것이다. 파산 절차 중에 실시되는 자산 염가 매각이나 절망에 빠진 채권자가 쏟아내는 투매는 부채 디플레이션 과정을 촉발시켰을 것이고, 그로인해 자산 가격이 떨어지면서 미청산 부채의 실질 가치가 상승했을 것이다. 채무에 비해 자산 가치가 급락하는 상황에서 이제껏 신용도가 높았던 가계, 기업, 금융기관들도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부채 디플레이션 순환은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에 거의 무제한으로 지원과 보증을 제공하는 곤욕을 치른 덕에 방치됐다. 달리 말하면 기업 지원 정책은 자본주의를 그 자신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지원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영국에서는 소비자 지출이 GDP의 약 65퍼센트를 차지한다. 노동자들이 자동차, 주택, 의류, TV, 식료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1980년대 이후 빚을 연료로 삼은 지출의 극적 확장 덕택에 이제는 거의 누구나 입수할 수 있게 된 다른 소비재의 홍수를 소화해주지 않는다면 경제는 무너질 것이다. 영국 정부는 지출을 늘리고 있으니, 영국 자본가들(사실은 전 세계 자본가들)이 더 많이 지출하기 위해 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리 스티븐슨은 이렇게 주장한다. “정부는 부자들의 지출 감소를 대신해 새 화폐를 찍어내고, 그 덕분에 근로 대중이 부자들에게 계속 돈을 상납할 수 있다.” 이 지출은 부유층이 계속 이득을 보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1분도 더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나라든 정치권력의 근본 성격은 항상 노동과 자본의 힘의 균형, 그리고 이 균형이 제도화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최근 영국 정부의 전례 없는 개입은 금융 주도 성장을 떠받치는 동맹, 즉 대자본가와 자가 소유자들의 이익을 뒷받침했다. 금융 시스템은 늘 그렇듯이 국가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대기업들은 거의 무제한의 유동성풀을 제공받았다. 한편 담보대출이 있는 가계에는 즉각 3개월간의 담보대출 상환 유예 조치가 실시됐다.
노동조합운동의 압력을 받자 영국 재무부 장관 리시 수낙은 위기가 악화되는 동안 고용주가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유지하도록 월 최대 2500파운드까지 노동자 임금의 80퍼센트를 국가가 보전해주는 무급휴직 제도를 발표했다. 현 복지 시스템이 실업수당 청구자들에게 충분한 생계비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수낙은 무급휴직 제도에 70억 파운드가 넘는 돈을 투입했는데, 이 규모라면 모든 실직자가 주당 20파운드 이상을 지급받는 셈이 된다. 그러나 긱 경제geek economy 영역의 불안정 노동자들을 포함해 500만 명에 이르는 영국의 자영업자 가운데 다수는 별도의 소득 지원 제도에 지원하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또한 법정 상병수당은 주당 약 95파운드에 머물렀는데, 이는 모든 선진국 경제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서 많은 이들이 병원비와 기본 생활비는커녕 임대료를 충당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한편 미국에서는 하원이 모든 미국 시민에게 1200달러를 한 차례 지급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의료보험도 없는 데다, 야박하고 이해하기도 힘든 복지 시스템의 수혜자가 될 기회조차 불평등한 미국의 2000만 실직자들에게 버팀목이 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액수지만 말이다.
*옮긴이 주-긱 경제: 기업들이 정규직은 전혀 채용하지 않은 채 필요할 때마다 노동 제공자와 임시로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는 경제 형태로, 주로 신흥 플랫폼 산업에서 나타난다. ‘긱geek’은 20세기 초 미국의 재즈 공연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연주자를 섭외해 일을 시키던 방식을 뜻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위기와 2008년 금융 붕괴이후의 위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2008년 이후에 많은 이들이 자기 집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고통은 엄청났지만 사회의 극빈층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19 불황의 경제적 리스크는 훨씬 더 개인화되어 있고 더 혹독하다. 높은 임대료와 교통비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정체된 탓에 영국은 코로나19가 엄습하기 전에 이미 생계비 위기를 겪고 있었다. 10년간 정부가 긴축을 실시한 탓에 가계 저축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고 800만 가구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과잉 부채와 씨름하고 있었다. 2017년은 1987년 이후 처음으로 가계가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한 해였고 그 차액은 새로운 빚을 내거나 저축을 줄여 충당되었다.
무급휴직 제도와 이와 비슷한 차영업자 지원 제도는 단기적으로 고통의 일부를 덜어줬지만,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은 빚을 지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이들이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기업들은 코로나19와 관련된 제한 조치를 어렵게 견뎌내고 있고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는 데다 공공장소 역시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문을 닫게 되자, 점점 더 많은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지속적인 대규모의 일자리 상실에 직면하고 있다. 어떻게든 바이러스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안정된 소득이 없는 자영업자, 제로 아워zero-hours contracts 계약 노동자, 긱 경제종사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그리고 커미션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은 궁지에 처할 것이다.
*옮긴이 주-제로 아워: 노동시간을 아예 정하지 않은 채 고용주가 요청할 때만 업무를 진행하는 비정규직 노동 계약을 일컫는다. 특히 영국에서 확산된 극히 불안정한 고용 형태이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남반구의 많은 국가에 팬데믹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유행 초기에 이들은 바이러스의 확산과 동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같은 지구 경제의 주변부에서도 확진자가 늘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외채난을 겪고 있던 많은 국가들은 지금 디폴트 직전 상황이다. 양자간 협약에 따른 채권자들과 국제기구들이 제공하는 지원은 근본 문제, 즉 일부 국가에서 영원히 완전 상환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어난 외채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다수의 국제 지원은 부대조건을 달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의 1차적 원인인 종속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한다. 이들 국가의 정부는 채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과 팬데믹과 싸우는 데 필요한 기본 자원을 제공하는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지구자본주의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우는 노골적이고 부당한 불평등은 기후 위기에 그리 책임도 없는 이들 국가에 앞으로 기후 붕괴의 대참사가 벌어질수록 더욱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102~108)
유일한 해결책은 전 지구적 그린 뉴딜
영국과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선포한 비상 대응 태세를 어떤 방식으로 해제하게 될까? 그리고 이러한 지원은 어떻게 남반구로 확대되어야 할까? 코로나19의 장기간의 부정적 수요 충격에 대한 최적의 해법은 전 지구적 그린 뉴딜이다. 이는 민주적으로 결정된 공적 우선순위를 중심으로 구축된 거대한 국가 투자 패키지로서 민주적 공공 소유의 확장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계획은 오늘날 경기 침체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장기적으로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중심부 나라들에서는 국가가 이러한 투자를 자력으로 추진하겠지만 남반구에서 동일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북반구의 기술과 자원의 이전이 필요하다. 극단적 기상 현상, 사막화, 기온 상승의 위험이 가장 높은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개발은행을 설립할 수도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결합된 규칙·규범과 단절한다면 국제기구들의 신뢰를 재구축하고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전 지구적 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억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코로나19 위기는 끝없는 자본주의 축적의 압박 아래에서 우리의 환경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할 때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답을 세상에 선사했다. 잇단 자연 재해로 갈가리 찢겨져 많은 이들이 생존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방법조차 없는 세상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연계가 더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상적 경제 활동에 엄격한 제한 조치들을 시행해야만 한다.
대봉쇄의 지속이 기후 붕괴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봉쇄는 전 지구적 탄소 배출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 위업은 상당수 경제 활동을 거의 정지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통해 달성됐다. 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가지 못하고 더 많은 이들의 일상적인 이동과 소비가 억제된 상황에서,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감소할지 몰라도, 인간의 소득 또한 억제됐고 공급 사슬이 끊겼으며 그 결과로 수백만 명이 빈곤, 노숙, 파산 일보 직전 상태가 됐다.
기후 붕괴에 적응하는 과정과 코로나19에서 회복되는 과정은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 비용과 잠재적 이득은 균등하게 분배돼야 하며 이를 견뎌내기 가장 힘든 이들에게 강요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장기적으로는 기후 붕괴가 코로나19보다 훨씬 더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근거로 지속 가능한 녹색 경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데 이 국면을 활용한다면, 우익은 그런 지출은 감당하기 어렵다고만 이야기할 것이다.
표면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는 거짓이다. 선진국들이 2030년까지 넷 제로net zero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전 지구적 그린 뉴딜은 나머지 국가가 자신들의 탈탄소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줄 것이고, 녹색 교통과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엄청난 투자, 녹색 기술 연구, 상당 규모의 녹색 건축 및 개보수 프로그램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지금 당장 일자리를 새로 만들고 수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경제가 장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총량을 확대함으로써 세수를 늘리고 이에 따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신용도를 높일 것이다.
*옮긴이 주-넷 제로:온실가스 배출량(+)과 제거량(-)을 더했을 때 순 배출량이 ‘0’인 상태를 말하며, ‘탄소중립carbon neutral’이라고도 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이번 세기 안에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대멸종과 문명 붕괴를 피할 수 있으며 그러려면 2050년까지 넷 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전망한다.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보면 기후 붕괴 대처 실패에 따른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기후 붕괴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중이며, 이렇게 되면 불과 몇 년 안에 지구의 많은 부분이 거주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 5년은 기록이 시작된 이래 온도가 가장 높았으며, 평균 기온 상위 20위는 모두 지난 22년에 몰려 있다. 우리의 숲이 파괴되고 대양이 산성화되는 상황에서, 기후 변화의 영향이 현재 SF소설의 소재인 ‘온실 지구’ 같은 재앙을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앞당기는 일련의 티핑 포인트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경제적 근거에서 따져 봐도 경제와 환경의 장기적 피해를 막기 위해 지금 바로 광범하게 개입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기후 변화를 해결하려면 수조 달러 상당의 화석 연료가 땅속에 남아 있어야 하며 화석 연료 기업들은 ‘좌초 자산’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감안한다면 화석연료 산업의 주식 평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구 경제에 1조 달러에서 4조 달러에 이르는 탄소 거품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한편 이들 자산이 좌초 자산 신세를 면한다면 환경과 정치, 경제의 파국이 한꺼번에 몰아닥쳐 어떤 식으로든 수조 달러는 족히 넘는 피해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후 변화에 대한 대처가 적절한지 아닌지가 아니다. 누가 그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가 문제다.
*옮긴이 주-좌초 자산: 주변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가치가 크게 떨어져 조기 상각되거나 부채로 돌변할 위험이 있는 자산을 말한다.
그린 뉴딜의 주창자들은 이 물음에 선명한 답을 내놓는다.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보다 탄소 배출 책임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탈탄소화의 부담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짊어져야 한다. 옥스팜Oxfam에 따르면, 지구 인구 가운데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탄소 배출의 절반에 책임이 있으며, 영국 인구의 상위 10퍼센트의 탄소 배출량은 하위 10퍼센트 가계 탄소 배출량의 3배나 된다. 그뿐만 아니라 탈탄소화 지지 여론을 튼튼히 구축하려면 우리는 탈탄소화가 일자리, 교통, 조세에 끼칠 충격을 우려하는 근로 대중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이에 답해야 한다.
많은 자유주의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기후 정의는 개인의 행동 변화가 아니라 시스템 변화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공해기업들은 우리가 기후 붕괴를 개인적 책임의 문제로 생각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본다. 예컨대 기후 붕괴를 둘러싼 대중적 논의가 플라스틱 빨대, 쓰레기 재활용, 채식주의에 맞춰진다면 석유기업들은 굉장히 편리해질 것이다. 거대 공해기업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야기한 피해에 대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거대 공해기업들이 적어도 1970년대부터 화석 연료 사용의 후과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이미 드러났지만, 이들은 그 이후에도 수십억 달러 상당의 이윤을 벌어들였다. 심지어 그 이윤의 일부는 기후 변화 부정론을 후원하는 데 쓰였다.
탄소세를 부과하거나 소박한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대신에 근로 대중은 오염 유발 행위에 대한 금지를 강화하고 투자 촉진으로 탄소집약부문의 일자리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재활용, 에너지 절약형 전구, 플라스틱 빨대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람들이 기후 붕괴를 개인의 수준에서 사고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압박하는 운동이 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탈성장’ 같은 현학적 유행어는 희소성과 빈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기후 행동에 나서지 못하게 방해한다. 기후 붕괴에 대처하려면 자연 환경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격할 수 있는 대중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린 뉴딜은 전 지구적이어야 한다. 또한 현존 국제기구들의 바깥에서 근로 대중 사이의 협력을 통해 추진되어야 한다. 전 지구적 그린 뉴딜은 기후 붕괴의 지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금융 지구화를 떠받치는 제국주의 체제와 대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자본 이동은 2008년 금융 위기가 일어나는 데 한몫했을 뿐만 아니라 남반구의 자금을 빨아들여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런던의 시티 같은 금융 소용돌이에 풀어놓았다. 현재 자본의 흐름은 전 지구적인 팬데믹 가운데 있는 수십억 인구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책임이 있는 각국 정부의 지불 능력을 위협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남반구 외채 탕감이다.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세계은행과 IMF는 기후 변화를 다루는 것과 같은 국가 개입에 대해 단지 눈살을 찌푸리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이를 금지하기까지 한다. 선진국들은 지구 경제의 새로운 규정을 작성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남반구 국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떠안도록 강요받는 대신 번영으로 나아가는 저마다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강대국들은 남반구에 해만 끼치는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 이 위기는 오랫동안 지체된 국제 무역 및 투자에 대한 법률의 개혁에 착수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며, 그러자면 조세 회피와 싸우고 투자를 촉진하며 제국주의적 추출을 방지해야 한다. 동시에 부유한 국가들은 남반구 국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자원 기술 이전을 단행해야 한다. 또한 이들은 기후 변화에 맞서기 위해 다른 부국들과 협력해야 한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평화로운 시기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엄청난 수준의 공적 지출과 국제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09~116)
‘국가를 위한 재정 긴축’이라는 거짓말
팬데믹이 끝날 즈음에 북반구 여론이 그린 뉴딜이 아닌 긴축정책으로의 복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만취할 때까지 술을 퍼마시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방만한 시기 후에는 원금 회수와 숙취에 시달리는 속죄의 시기가 온다는 생각이 우리의 상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이 전제는 임금 인상을 저렴한 대출로 대신함으로써 근로 대중의 머리 위에 상환 불가능한 가계 부채를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결과만을 낳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
영국의 집권 여당인 보수당은 여전히 자당 지지층의 이익을 런던의 시티에 중심을 둔 국제화·금융화된 자본가계급의 이익과 조율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콜린 레이스의 표현처럼 보수당은 “권력을 쥐는 데 필요한 지지층의 이익과 전 지구적 자본의 요구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영국 자본의 모든 부분을 단결시키는 몇 가지 공통 관심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중 한 가지는 규제 완화, 법인세 및 자산세 인하와 이를 완전히 회피하는 방법에 대한 신호다. 자본 이동은 영국 경제의 국제화·금융화된 사업 모델의 토대이며 따라서 영국 자본가계급의 또 다른 중대한 공통 관심사다. 영국 자본의 모든 부문에는 최종 규제자이자 대부자, 계약 추심인, 안전 자산의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 또한 국가는 정부 조달, 아웃소싱, 자문, 회계, 국가 자산 사유화를 통해 이윤 추구의 길을 직접 열어줄 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해외에서 영국자본의 이익을 촉진한다.
하지만 논의를 더 전개하면 그림이 더 복잡해진다. 초거대기업과 금융기관들로 이뤄진 영국 자본 중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부분은 영국 경제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는다. 즉 이들 자본가의 이윤은 영국 소비자, 기업 혹은 국가의 경제 활동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의 인프라, 공공 서비스 혹은 임금 상태에 별 관심이 없다. 특히 소비자 대면 서비스와 영국 제조업의 남은 부분 같은 영국 자본의 다른 부문들은 국가 지출의 이러한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영국의 금융·전문직 서비스·부동산 부문은 역사적 뿌리나 그 규모의 강력한 조직 면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자본의 다른 부문보다 우위에 서도록 만들 수 있다. 이 자본부문은 앤드류 갬블이 ‘자유 경제와 강한 국가’라 부른 것을 선호할 이유가 충분하다. 즉 국가는 국내에서 자본이 바라는 바를 집행하고 국외에서 자본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야 하고, 동시에 민간부문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 영역으로까지 손을 뻗쳐 자본 축적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영국 정부가 긴축을 추구하는 첫 번째 이유다. 이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명령이었다. 논평가들은 영국 정부 적자와 국가 부채 규모의 감축을 위해 긴축한다는 공식 발표를 그대로 믿곤 한다. 그래서 이들은 보수당의 긴축 체제를 바라보며 실패라 외친다. 긴축은 저성장, 저투자, 임금 및 생산성 정체의 10년을 안겨준 전 지구적 장기 침체 추세와 충돌을 빚었으며, 이 때문에 공공 부채를 줄이려는 노력이 타격을 입었고 민간 부채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영국 지배계급은 어리석지 않다. 지배계급 구성원들은 분명히 국민소득에서 정부 부채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을 늘리기만 하는 긴축 의제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투자를 통해 영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 정부 부채를 줄이는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긴축은 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영국 지배계급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이들의 정치·경제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국가가 자본의 축적 전략뿐만 아니라 기본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나 중요해졌기에 영국 자본으로서는 영국 정부에 대한 통제가 더없이 중요해졌다.
영국 재무부와 시티는 보리스 존슨과 수낙에게 다시금 적자를 메꾸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조지 오스본은 이를 국채 보유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출을 축소하고 공공부문 부채를 감축하려고 시도하는 국면”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라면 이제는 국가 지출의 대대적 삭감이 생산을 줄이고 세수를 더욱 감소시킴으로써 실제로는 GDP 대비 공공 부채 규모를 더 늘릴 수 있음을 깨달았어야 한다. 정부는 일정한 형태의 법인세 인상을 통해 세입을 늘리려고 시도할 수 있겠지만 조세 회피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런 조치로도 세수는 그다지 늘지 않을 것이다. 토리당(영국 보수당) 투표층의 인구 구성과 영국 자본의 이해관계로 볼 때 자산세를 수용하기는 불가능하고, 소득세, 사회보험료, 혹은 부가가치세의 인상은 이미 억눌릴 대로 억눌린 소득에 더 큰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다. 많은 노동자는 위기가 끝나는 시점에 실업자 신세가 될 것이고 노동자 권리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은 정부가 국가 규모를 늘리지 않으면서 이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식 중 하나다. 아직 일자리를 잃지 않은 이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려는 시도로는 정치적 고통만 야기할 뿐 세수를 충분히 늘리지 못할 것이다.
한편 보수당 지지연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존슨은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 지역에서 투자를 촉진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인프라 투자에 쓸 자금을 마련해아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투자는 자본이 정부의 아낌없는 혜택에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민간부문의 후원 아래 실시되겠지만 말이다. 의료와 사회적 돌봄은 사유화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그전까지는〕 이에 대한 지출 역시 늘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지난 정부가 그토록 치열하게 추진했던 다른 국유 자산의 사유화는 국유 기업들이 더욱 악화된 경제 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버티는 형편이기에 일단 중지된 상태다.
*옮긴이 주-민간부문의 후원: 앞에서 언급한 관급 공사의 민간주도투자 제도를 뜻한다.
**지난 정부: 역시 보수당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캐머런의 정부(2010~2016년)를 말한다.
그러면 그린 뉴딜은 어떠한가? 이런 투자 프로그램은 오래된 보수당 투표층에서는 제한된 지지만을 얻을 것이다. 토리당 지지층(대체로 퇴직한 고령의 자가 소유자)에게는 뚜렷한 공통 관심사가 있다. 주택 가격은 계속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그들의 생활수준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수요 증가와 맞물린 임금 인상과 새롭고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은 대부분 이미 퇴직한 보수당 투표층에게는 이득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중 다수는 일을 하지 않거나 퇴직을 앞둔 상태이기에 일자리, 임금, 노동시간, 노동권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교육에 신경을 쓰지도 않으며 먹고 사는 걱정이 없기에 연금, 의료, 사회적 돌봄 이외의 복지국가 영역에도 별 관심이 없다. 기후 변화가 자신들의 생활수준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대부분은 환경 문제도 그리 우려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경제적 충격을 흡수함과 동시에 이전부터 대두했던 모든 과제, 즉 불평등 심화, 생산성 정체, 환경 붕괴까지 해결하려면 공공 투자를 실시해야 한다고 경제적 견지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가령 팬데믹 와중에 상당 규모의 국가 주도 투자를 시행한다면 영국 자본에도 분명 이득이 될 것이다. 이는 국가 조달을 통한 이윤 추구의 직접적인 통로를 열어줄 뿐만 아니라 고용, 임금을 개선하고 이에 따라 경제 성장까지 촉진함으로써 경제의 다른 부문들에서 실시되는 투자의 리스크를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제조업체들과 소비자 대면 서비스업체들은 국가 주도 탈탄소화 부양책에서 틀림없이 이득을 얻겠지만, 자본 내 주도 분과인 고도로 국제화되고 금융화된 부문은 국가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지원만 얻으면 그만일 것이고, 그린 뉴딜은 그 경제적 성과의 정치적 지향과 관련해 이들에게 곤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전 지구적 경기 회복은 영국 자본의 수익성을 지탱해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국내에서는 전후 시기에 사용된 사회민주주의적인 경제 관리 방식이 일정 부분 부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유권자 중 정치적 행동력이 왕성한 부문에 대한 국가의 제한된 지원과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지원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적-코퍼리티즘적 경제 운용 모델의 출현이다.(116~123)
긴축 비판을 넘어 대중의 민주적 계획으로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2008년 금융 위기에서 비롯된 정치적 기회를 활용해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는커녕 의미 있는 부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도 실패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이 권력을 지켜냈다. 어떤 경우는 전복적인 새 운동을 허약한 연립정부 안으로 흡수하거나 체제 내 개혁을 추진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위기로 인한 반체제 압력을 경제적 구태에 전혀 위협이 안 되는 민족주의와 이주민 혐오로 변질시켰다. 표면적으로는 금융자본주의가 내재한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사회주의의 모든 가정을 확인해주는가 했던 2008년 위기를 좌파가 이용하지 못한 것을 볼 때, 과연 코로나19에 맞서는 대응은 더 나으리라고 기대할 여지가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은 과거의 교훈에 너무 짓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난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이번 위기에 맞선 대응은 2008년의 대응과는 매우 다를 텐데, 적어도 그 부분적 이유는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위상을 깍아내리려 한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에 있다. 하지만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더라도 압운을 맞추기는 한다. 지난번 위기처럼 이번에도 가장 취약한 사회 구성원들이 위기의 부담을 가장 고통스럽게 짊어지게 될 것이다.
경제 위기, 시장 집중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지배계급의 협력은 피할 수도 있는 시스템 내 결함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의 어떤 형태에든 내재한 본성이다. 위기, 중앙집권화, 정실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 위기 적응의 성공은 매번 필연적으로 새로운 균열과 모순을 낳으며 사회주의자들이 충분히 잘 조직되어 있다면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런 균열 중 하나는 경제 활동이 점점 더 정치화된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자본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형태의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면서 반대로 노동자의 힘을 증대시킬 수 있는 개입은 금지하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금융 위기 시기에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토대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신뢰를 유지하려면 경제정책의 특정 영역은 자연 법칙에 따라 설명되어야 하며, 이 영역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시장의 힘의 작동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는 허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분배상의 함의는 은폐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화폐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자연’ 이자율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중앙은행 독립과 기술 관료들의 통화정책 결정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시장의 이러한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면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관념을 유지하기는 훨씬 더 힘들어졌다. 국가가 자산 가격을 정책 대상으로 삼아 민간 대기업에 구제 자금을 써주고 이들의 부채 중 상당 부분을 매입하는 때에, 공공선을 증진하기 위한 개입이 시장 메커니즘을 방해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진다. 또한 국가가 이미 개입주의 성향을 보이는 상황에서 빈곤, 불평등, 기후 붕괴에 도전하는 종합 대책에 반대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실제로 이 통찰을 바탕으로 많은 개입주의 국가가 권위주의 성향을 보이는 이유를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는데, 이들 권위주의적 개입주의 국가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정치와 법률을 통해 국가에 제기될 수 있는 요구를 제한한다.
코로나19의 급작스런 발발로 국가 규모가 확장되자 많은 좌파들은 벌써 상당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많은 이들이 코빈주의Corbynism의 핵심을 이뤘던 긴축 비판이 적실성을 잃게 된 영국 정치에서 사회주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위기는 코빈주의의 토대였던 반反긴축 담론의 태생적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주의란 단순히 자본주의 국가 규모의 확장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지배계급, 즉 고위 정치인, 기업 소유주와 금융가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더 큰 국가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 침체, 팬데믹,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후 붕괴가 제기하는 도전에 대처하려면, 국가와 모든 경제·정치 제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중the public이 경제 활동의 합리적 계획에 참여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우리 공동의 자원을 사용하는 최선의 방안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다 함께 협력해야 한다.
*옮긴이 주-코빈주의: 반긴축을 부르짓는 노동계와 청년 세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2015년에 영국 노동당 대표에 선출됐다가 2019년 총선 패배로 물러난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의 노선을 일컫는다.
단순히 평등, 노동자 권리, 환경적 지속 가능성의 추구를 우선시하는 국가 계획만이 아니라 경제 활동에 대한 대중의 민주적 계획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팬데믹 이전에도 불과 2퍼센트만이 영국 경제에 어떤 수준의 개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반면 63퍼센트가 그린 뉴딜을 지지했다. ‘코로나 크래시’중에 국가 개입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이보다도 더 늘어났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고브YouGov가 2020년 4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2퍼센트가 일자리보장제job guarantee scheme 도입을 지지했고, 51퍼센트가 “정부가 자산조사를 실시하거나 구직활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모든 시민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했으며, 74퍼센트가 정부의 임대료 규제를 지지했다.
*옮긴이 주-유고브: 2000년에 설립된 영국의 국제적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 회사다.
일자리보장제: 민간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모든 구직자들을 정부의 고용청이 고용하자는 제안. 이 경우 완전고용이 이뤄지고, 고용청이 지급하는 급여가 자연스럽게 최저임금제 구실을 하게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성, 불평등, 부패는 집중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책임성의 원심력이 부재한 집중에 기인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국가의 지휘 하에 놓인 자원은 대중에 의해, 대중을 위해 할당되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의 영역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면 이 위기는 다른 많은 위기와 마찬가지로 그저 자본에 의해, 자본을 위해 이용되고 말 것이다.(124~129)
〔출처〕 코로나 크래시 The Corona Crash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장석준 옮김, 책세상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