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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2 V3.0
나오는 사람들
차영군: - 여, 20세. 재수생. 자기가 싸이보그라고 믿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잘 부끄러워한다.
박일순 - 남, 23세. 점으로 소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물건, 성격, 특기, 정체성 등을 훔친다. 안티소셜 진단을 받았다.
오설미 - 여, 48세. 우울증으로 전기충격 치료를 받을 때마다, 부작용으로 기억을 조금씩
잃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낸다.
이대평 - 남, 45세. 탁구를 잘 치는 전직 경관, 신경질적이다. 아내가 괴물이라고 믿는다.
왕수진 - 여, 33세. 뚱뚱하다. 수면비행법을 개발하여 잠을 자면서 날아다닌다. 피부미용에 병적으로 몰두한다.
김은영 - 여, 35세. 중학교 때부터 유일한 친구였던 효진과 늘 대화한다. 사실 효진은 곁에 없지만.
황규석 - 남, 34세. 동시 통역사였던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으로, 7개 국어를 구사하게 된
언어학 박사. 일명 황박.
신덕천 - 남, 43세. 잘못된 일은 늘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잘못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뒤로만 걷는다.
엄마 - 여, 49세. 순대를 중심으로 한 돼지부속전문식당을 운영한다. 뭐든지 감추기를
좋아하고 말할 때 틀리기를 잘한다.
할머니 - 여, 71세.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갔다. 자기를 쥐로 여긴다.
최슬기 - 여, 29세. 정신과 1년차 레지던트, 차영군의 담당의. 조금 서툴지만 순진하다.
김준범 - 남, 34세. 정신과 3년차 레지던트, 박일순의 담당의. 자신감이 있다.
여자 아나운서 - 여, 30대 초. 영군: 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공의 인물. 싸구려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들판 (새벽)
비가 내린다. 영군과 일순이 어깨동무하고 앉아,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풀들이 바람에 막 흔들린다.
영군 방 (새벽) - 과거
바닥에 널린 트랜지스터라디오의 부품들, 인체해부도 비슷한 회로도의 세부 이미지들 위로 크레딧. 상담 중인 슬기와 영군 엄마,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들이 마구 뒤섞여 들린다. 공구를 들고 라디오를 조립중인 영군 .
슬기:
(소리)
이번 일 있기 전에 영군: 이한테 특별한 변화는 없었나요?
갑자기 밥을 안 먹는다든지…….
여자 아나운서:
(소리)
일, 스피커를 끼우고 망을 방향에 주의하여 조립하겠어요.
영군:
(지시에 따라 작업하며 중얼중얼 혼잣말)
일……. 스피커……. 망……. 방향…….
영군 엄마:
(소리)
제가 사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고요.
여자 아나운서:
(소리)
이, 바리콘을 화살표 방향으로 끝까지 돌려놓고 바리콘 기어의 에이자가 위로 향하게 하여
볼트 이쩜육 곱하기 오로 조이겠어요.
영군:
(골똘한 표정)
이……. 바리콘……. 화살표 방향……. 기어……. 에이자……. 볼트…….
영군 엄마:
(소리)
식당 일이 너무 바빠서……. 외할머니는 사실 영군이가 키워주셨는데…….
상담실 (낮)
의사 가운을 입은 슬기와 40대 초반의 영군 엄마, 마주 앉았다.
슬기:
네?
영군 엄마:
아니, 제 말은 외할머니가 영군 일 키우셨다는 거죠.
여자 아나운서:
(소리)
삼, 손잡이에 금속판 이 곱하기 이십삼을 밀어 넣은 후, 뒷 케이스에 안착시키고
뒷 케이스의 안쪽에서 다시 판을 위에서 아래로 밀어 고정시키겠어요.
영군:
(소리)
삼……. 손잡이……. 금속판……. 뒷 케이스……. 판…….
슬기:
외할머니께서는…….
영군 엄마:
(말을 끊으며)
요양원 갔어요, 치매 때문에……. 육 개월 동안 무만 드시다가.
슬기:
무……. 요?
영군 엄마:
깍두기 담는…….
슬기:
아- 예…….
잠시 정적.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영군 엄마 전화기가 울린다.
영군 방 (새벽) - 과거
씬2 연결.
여자 아나운서:
(소리)
사, 볼륨 노브를 볼륨에 끼우고 볼트 일쩜칠 곱하기 사로 조여 고정시키겠어요.
영군:
사……. 볼륨 노브……. 볼륨……. 볼트…….
영군 엄마:
(소리)
응, 순대 칠십 킬로에 머리고기, 귀떼기, 오소리감투…….
새끼보두 가져왔어? 아냐, 아냐, 백 킬로는 받아야지, 요샌 잘 안 나오잖아.
그래……. 혓바닥 육십 킬로하구…….
상담실 (낮)
씬3 연결. 전화기를 닫는 영군 엄마: . 가만히 지켜보는 슬기.
영군 엄마:
……. 그런데 이런 것도 관련이 있을까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슬기:
말씀해 보세요.
여자 아나운서:
(소리)
오, 앞 케이스의 스피커에 절연지를 끼우고 기판을 조립한 다음
뒷 케이스를 볼륨부분부터 비스듬히 덮어 볼트 이 곱하기 팔 네 개로 조여 고정시키겠어요.
영군:
(소리)
오……. 앞 케이스……. 스피커……. 절연지……. 기판……. 뒷 케이스……. 볼륨 부분……. 볼트…….
영군 엄마:
……. 왜 그 생각이 났을까……. ?
어렸을 때 학교 갔다가 배가 아파서 집에 일찍 왔는데요…….
영군 외가 (낮) - 회상
시골집의 재래식 부엌. 쭈그리고 앉은 영군 외할머니 뒷모습. 책가방을 메고 부엌 입구에 서서 놀란 눈으로 엄마를 보는 어린 영군 엄마.
어린 영군 엄마:
엄마……. 뭐해?
깜짝 놀라서 돌아보는 영군 할머니. 고구마, 무, 당근, 쌀 등이 들어 있는 밥그릇, 모여앉아 먹는 쥐들.
영군 엄마:
(소리)
……. 쥐들한테 밥을 주고 계셨어요.
슬기: :
(소리)
예에…….
여자 아나운서:
(소리)
육, 테스터를 연결한 다음, 라디오의 스위치를 켜보겠어요.
테스터의 셀렉터 레인지는 이백오십미리암페어 레인지에서 점검했을 때
십에서 이십오미리암페어면 정상입니다.
영군 방 (새벽) - 과거
씬4 연결. 라디오 스위치 켜는 영군, 테스터의 바늘이 정상레인지에서 움직인다.
영군:
육……. 테스터……. 라디오……. 스위치……. 셀렉터 레인지……. 정상
여자 아나운서:
(소리)
칠, 점검이 끝났으면,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바리콘 노브를 돌려 방송을 잡아보겠어요.
영군:
칠……. 점검……. 안테나……. 바리콘 노브……. 방송…….
안테나를 뽑는 영군. 끝없이 나오는 안테나, 천정에 닿는다. 노브를 돌려 주파수를 맞추자 음악 흐른다. 라디오에 들어온 붉은 전원 램프. 벽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는 영군, 주위에 에워싸듯 갖가지 소형 전자제품들이 널렸다.
영군 엄마:
(소리)
그날 밤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엄마가 사실은 쥐라고…….
더 이상 숨기고 싶지가 않다고…….
제가 우리 엄마 딸인 것처럼 그 쥐새끼들도 그렇다고…….
상담실 (낮)
씬5 연결. 건조하게 술회하는 영군 엄마.
영군 엄마:
엄마는 어미쥐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슬기, 말문을 닫는 영군 엄마. 실내에 침묵이 흐른다.
여자 아나운서:
(소리)
팔, 전선의 한쪽 끝을 두 개로 갈라 피복을 벗기겠어요.
다른 쪽 끝에는 플러그를 연결합니다.
영군:
(조용히 기어가 부품 상자를 뒤지며 중얼거린다. 소리)
팔……. 전선……. 피복……. 플러그…….
여자 아나운서:
(소리)
구, 양 손목을 칼로 그은 후…….
영군:
(소리)
구……. 손목……. 칼…….
영군 방 (새벽) - 과거
씬7 연결. 이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영군의 왼팔, 큼직한 커터로 오른손목을 긋는 중이다.
영군 엄마:
(소리)
불쌍한 우리 엄니, 그 겁 많은 양반이…….
여자 아나운서:
(소리)
피복을 벗겨낸 전선을 한 쪽씩 넣고…….
영군:
손목……. 피복……. 전선…….
슬기: :
(소리)
영군이도 아나요, 그 얘기?
여자 아나운서:
(소리)
고무테이프를 감겠어요.
영군 엄마:
(소리)
영군이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날따라 기분이 그랬겠지, 우리 어머니가요…….
저도 곱창이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어요.
선생님도 그럴 때 있으시잖아요, 환자들하구.
영군:
고무테이프…….
여자 아나운서:
(소리)
팔,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겠어요.
영군:
팔……. 플러그……. 콘센트…….
영군, 케이스를 열어 틀니를 꺼내든다. 왼손으로 틀니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앰프와 스피커, 턴테이블이 연결된 멀티탭에 자신의 손목이 연결된 플러그를 꽂는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경련하며 쓰러진다. 조용히 온몸을 들썩이며 피를 흘리는 영군. 손목부터 점점 까매지는 영군의 팔. 새끼발가락에서부터 차례로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연두색 불이 들어온다. 엄지발가락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며 삐- 소리 난다.
영군 엄마:
(소리)
……. 그런 건 관련이 없겠죠, 영군이 자살하구?
초록색으로 발광하는 엄지발톱 클로즈업 화면에 제목 활자 나타난다.
들판 (새벽)
씬1 연결. 퍼붓는 듯한 비, 멀리 하늘에 번개가 쩍.
여자 입원실 (낮)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영군, 양 손목에 붕대를 감았다. 초점이 없는 눈, 틀니를 쥔 채 떨리는 손. 곁에 서서 영군을 내려다보는 환자, 설미.
설미:
(조용하게)
너 같은 어린애한테 여기 밥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부모들이 생각이 있는 건지, 원…….
(침대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은영을 보며, 소곤거리지만 은영한테 다 들리게)
역시 부모가 젤 중요해, 여자한텐 특히 아빠……. 저기 쟨…….
(입을 다물고 도리질하며)
아냐, 아냐……. 그런 얘긴 하면 안 되지…….
영군의 침대를 밀어 복도로 나가는 설미.
3층 복도 (낮)
입원실이 늘어선 복도. 영군의 침대를 밀고 나가는 설미. 환자와 의료진들, 지나다닌다.
설미:
십 년 전쯤에 환자 하나가 사라졌대, 오동수라고…….
딸꾹질이 멈추질 않아서 괴로워했대, 창호지처럼 얇고 창백한 남자였는데…….
의료진에, 군경예비군 합동수색대에, 산에 쎄파트까지 풀어서 찾았지, 위험한 정신이상자라고…….
(코너에 놓인 커다란 오동나무 괘종시계에 팔을 얹으며)
한 일주일 걸렸을까……. 시계가 딸꾹딸꾹 소리를 낸다는 걸 깨닫기까지…….
(경련하듯 일 초 일 초 지나가는 초침)
오동수는 이 안에서 편안하게 웅크리고 죽어있었다는 거야.
죽어서도 딸꾹질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지, 오동수가.
잘 들어봐, 저 소리…….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군. 설미, 천천히 침대를 밀고 간다.
잠시 후 -
<이 자를 고발한다>고 쓰인 대자보를 다 붙인 대평, 한 걸음 물러서서 만족스럽게 보고는 홱 뒤돌아선다.
대평:
(종이를 말아 입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보호사들이 와서 대평을 저지하며 끌고 간다. 저항하며 고래고래)
누가 시켰느냐, 이 자식들아, 이 도둑놈들아!
박일순을 잡아가라……. !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몸부림치며)
경찰! 일일구! 의사 선생님!
침대를 밀고 와 곁에 서서 구경하는 설미와 영군. 보호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대평. ‘본인은 10년도 넘게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박일순이란 이름의 이 자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간 것이다. 저는 경찰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15년 전부터 그것을 키워 왔는데 집도 잃고 아내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긴 본인은 그것이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경찰 제복을 입고 탁구대 옆에서 V자 포즈를 취한 사진이 붙은 대자보가 보호사들에 의해 떼어진다. 소란을 지켜보다 혼란스런 틈을 타 입구로 빠져나가는 설미와 영군.
설미:
경찰 좋아하네, 유니폼 변태 주제에…….
지 마누라 세일러복 입혀서 죽이구, 집에 불 지르구…….
여자 입원실 (낮)
여성 6인실, 슬기가 들어온다. 멍하니 누운 은영, 뜨개질을 하는 환자1, 벽을 보고 앉아 중얼거리는 환자2.
슬기:
(은영에게)
새로 온 환자, 어디 갔어요?
(반응 없는 은영)
……. 못 보셨어요?
(눈만 돌려 문을 보는 은영)
설마……. 설미씨랑……. 요?
휴게실 (낮)
탁구 시합 구경꾼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가면 쓴 남자 일순, 특이한 서브를 구사하면서 상대방을 완전 제압하고 있다. 탁구대 반대편 구석에는 모여서 쉬는 환자들, 그 사이에 선 설미와 침대의 영군.
설미:
(애처로워하는 표정, 영군의 볼을 쓰다듬으며)
우리 혜정이가 살았으면 딱 너만 할 텐데…….
내가, 이 미친년이, 술 먹고 목 조르지만 않았어두…….
(설미의 손길에 움츠러드는 영군.
설미,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일어나 영군이 잘 볼 수 있도록 침대 한 쪽을 높인다.
칼로 그은 흉터가 여러 개 있는 설미의 손목. 무표정한 얼굴로 반응이 없는 영군: )
저기 저 남자 분……. 저 아저씨…….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무릎을 모으고 바른 자세로 앉은 덕천을 가리키며)
경산서 농사짓다 오신 분이거든.
(주변 환자들, 솔깃해서 소곤거리고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
평생을 노총각으로 살면서 주변에도 잘 하구 그렇게 얌전했나 봐.
근데 그만 자기 손으로 받은 송아지를 사랑하게 된 거야.
이름이 정흰가 그래.
그래 가지구 정희를 안방에 데려다가……. 말도 못하고 손도 없는 것을
자기가 그냥 다 세수도 시키고 티비도 같이 보고 그랬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게 징그럽다고 아저씨를 병원에 넣은 거야.
아저씨는 정말 정신적으로만 정희를 사랑한 건데…….
(덕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 자기는 경기가 보이지도 않으면서 따라 박수)
저기 가면 쓴 남잔 말이야, 무지무지한 꽃미남이었대.
근데 군대에서 하두 성추행을 당해서 머리가…….
(동정어린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는 설미)
그래서 잘 생긴 자기 얼굴이 죄라면서 담뱃불로 얼굴을 죄다 지져놓구…….
(귀에다 소곤거리며)
그리구……. 자기 손으로 직접……. 항문을 꼬매버린 거야.
(문이 벌컥 열리며 진한 화장을 한 수진, 들어선다. 깜짝 놀라는 설미)
아유, 쟨 꼭 저렇게 쿵쾅거리며 다녀……. ?
……. 언제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야겠다.
화장품이 가득 든 비닐가방을 영군 침대에 털썩 내려놓는 수진, 기름종이를 꺼내 얼굴을 두드린다.
수진:
(색깔이 완전히 변한 기름종이를 잠시 경악한 얼굴로 들여다보더니, 구겨버리며)
아- 우울해.
(문득 발견했다는
움찔하는 영군. 얘기를 경청하던 환자들도 흠칫 놀라 수군거린다. 몸을 돌려 나가는 설미.
슬기:
(한숨을 쉬며)
설미 아줌마 말씀, 다 거짓말이야……. 그래, 다 거짓말이다, 그 부분만 빼고.
전기충격 치료를 받을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없어져서…….
그래서 얘기를 막 지어내는 경향이 있으셔, 기억 대신에.
경기가 끝난 듯 와아, 하는 탄성 터진다.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는 일순, 가면을 벗자 멀쩡하게 잘생긴 얼굴. 침대를 밀고 나가는 슬기, 일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영군. 의기양양한 일순, 영군을 발견하고 유심히 본다.
준범:
(소리)
신환은?
3층 복도 (밤)
나란히 걷는 슬기와 준범.
슬기:
말을 안 해.
준범:
우울증?
슬기:
엄마가 좀 디스턴트하구…….
외할머니가 분열증이었나 봐, 쥐라고 생각했대.
준범:
시어머니가 무서웠대?
슬기:
어떻게 알어?
준범:
쥐 망상 환자를 두 명 봤는데 다 시어머니가 무섭다구 그러더라.
슬기와 준범, 스테이션 앞을 지난다. 링거액 병 스탠드에 몸을 의지한 채 발을 끌며 나타나는 영군, 환자복 위에 트레이닝복 상의를 걸쳐 입고 다른 손에는 종이 쇼핑백을 들었다.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일순, 영군의 틀니 끼운 입매를 유심히 본다. 일순이 안 보이는 것처럼 지나쳐 가는 영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는 일순, 따라간다.
일순:
(소리)
입 튀어나온 신환, 희고 넓은 앞니 때문에……. 쫓아가게 되었다.
멈춰서는 영군, 천정을 본다. 일렬로 줄지어 켜진 형광등들.
영군:
(조그맣게)
야아, 너희들……. 내가 왔어, 형광등 아기들아.
……. 못 알아듣는 척 해도 소용없어, 나 싸이보그야.
잠시 후 -
틀니를 끼운 채 쇼핑백을 옆에 두고 커피 자판기 앞에 앉은 영군.
영군:
여기 형광등은 새침한 편인가 봐.
나타나는 일순, 바로 옆에 와 앉는다. 솜털도 보일 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도 모른다. 자판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영군을 관찰한다.
일순:
(소리)
환청에……. 혼잣말……. 스키조프레니안가.
영군:
에이-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그렇게 인사성이 없으면 안 되지.
넌 괜찮니, 하루 종일 일하고?
쇼핑백에 슬쩍 손을 넣어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다시 넣는 일순. 만능 돼지코, 플라스틱 도시락통에 가득한 건전지들, 요일팬티 세트, 전동칫솔, 가루치약, 빨간 벨벳으로 된 보석 케이스. 슬쩍 영군을 보면, 하얗게 반짝이는 틀니.
일순:
(소리)
이는 열심히 닦는 듯…….
영군:
아, 그래? 그럼 율무차로 부탁할까?
(컵 떨어지는 구멍에 얼굴을 바짝 갖다 붙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영군.
보다 못한 일순, 일어나 ‘율무차’ 버튼을 눌러준다, 종이컵 떨어지고 음료수 나오는 소리)
고마워.
영군:
(컵을 꺼낸다. 두 손으로 따뜻한 컵을 감싸고 곰곰 생각해보더니)
……. 그럼 병실 쪽 형광등은 좀 붙임성이 있겠네? 아무래도 밤엔 쉬니까?
여자 입원실 (밤)
다른 환자들은 다 잔다. 영근의 침대 머리맡에만 독서등 켜졌다.
영군:
(틀니를 낀 채 독서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어……. 그 대목에서 궁금한 게 있는데…….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니, 니가 형광등인지?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나는 내가 싸이보그라는 걸 살면서 알았거든?
하얀맨들이 와서 앰뷸란스에 할머니를 태우고 가가지구…….
(인써트 - 흰 옷 입은 남자들이 할머니를 강제로 앰뷸런스에 태운다.
엉엉 울면서 할머니한테 매달리는 영군.
차창을 내다보는 할머니, 뭔가 말하는 입 모양. 입술을 읽으려고 집중하는 영군)
할머니 틀니 빼놓구 가서, 틀니 줄려구 쫓아가는데
(틀니를 빼서 보여주고 다시 끼우며)
틀니가 있어야 무를 잡수신단 말야, 우리 할머니 쥐잖아.
근데 자전거가 와서 나를 태우고 쫓아가는데
자전거는 앰뷸란스를 못 이기거든,
그래서 내가 막 울었더니 자전거가 그랬어, 싸이보그는 다 이긴다구.
“너는 싸이보그면서 그런 것도 모르니?”
물론 난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척을 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앰뷸란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였어.
그래서 내가 자전거한테 뭐라고 했는지 좀 물어봐줄래?
3층 복도 - 시계 앞 (낮)
오동나무 괘종시계에 거만한 자세로 팔을 얹고 기대선 영군.
영군:
(엄숙하게)
……. “병신, 빳데리가 떨어졌잖아”…….
(자세를 바꾸고)
그래서 내가 교육방송 듣구 충전을 했잖아.
(신을 벗고 발을 들어 엄지발가락을 가리키며)
여기까지 불이 들어와야 충전이 된 거거든……. 이거 봐봐, 지금 다 떨어져가잖아.
3층 복도 - 공중전화 앞 (밤)
수화기를 든 영군, 뒤에 줄을 선 환자들.
영군:
(송수화기에서 들리는 뚜뚜- 소리에 아랑곳 않으며)
거기서 하란 대로 충전을 했더니 앰뷸란스가 일루 데꾸 오더라.
근데 말야, 나는……. 사용설명서두 없구, 라벨 같은 거두 안 붙어 있구…….
아직도 몰라, 내 용도가 뭔지, 왜 만들어졌는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어!
여자 입원실 (밤)
각자 자기 용무를 보는 환자들. 아래에서 위로 두드려주듯이 수분크림을 바르는 수진, 눈을 지그시 감고 리드미컬한 손놀림 점점 빨라지며 접신한 듯 기합까지 넣는다. 뛰어 들어와 침대에 올라앉는 영군.
영군:
(신이 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방송〜 방송〜 방송〜
(한 손으로 독서등을 켜고)
너도 들어 봐, 좋은 말씀이 많아.
쇼핑백에서 라디오를 꺼내 스위치를 누른다. 노이즈가 심하다. 소리를 줄인다. 주머니에서 배터리 두 개를 꺼내 양 손에 하나씩 쥐고 가부좌 자세로 앉는 영군, 잊어버렸다는 듯 틀니를 빼서 협탁에 올려놓는다.
여자 아나운서:
(소리)
명상의 시간…….
(눈을 뜨고 안테나를 올리는 영군. 안테나 계속 나와 천정에 닿는다.
다시 자세를 잡고 앉는 영군)
한밤중에 일어나, 냉장고 소리에 귀 기울여 보겠어요.
추운 겨울 아침, 밤새 돌았던 보일러를 느껴 보겠어요.
이들이 눈물겨운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
영군:
(중얼거리며)
냉장고……. 귀……. 겨울……. 아침……. 보일러……. 존재……. 목적…….
여자 아나운서:
(소리)
생각하라……. 저 등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영군:
(중얼거리며)
등대……. 사랑……. 마음…….
여자 아나운서:
(소리)
……. 다음 시간에 계속.
영군:
(라디오를 끄고, 탄식하듯)
나도 존재의 목적 하나만 있었으면……. !
그룹치료실 (낮)
가운을 입지 않은 슬기와 준범, 환자들과 둥글게 모여 앉았다. 수간호사와 간호사1도 보인다. 망가진 다리를 반창고로 붙이고 한쪽 알에 금이 간 안경을 쓴 대평,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리며 혼잣말하는 은영, 겁먹은 눈으로 이쪽저쪽 살피는 덕천. 멍한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앉은 영군, 가면 너머로 영군을 뚫어지게 보는 일순.
일순:
(소리)
입이……. 들어갔잖아!
슬기:
자, 그러면 안정실이 어떤 곳인지, 어떤 때에 가는지 아시는 분,
얘기해주시겠어요?
……. 일순님, 가면 좀……. 응?
(순순히 가면을 벗는 일순)
은영님, 뭐라고 하셨어요?
은영:
(놀라며, 멍청하게)
제가 말을 했다고요?
슬기:
수진님,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수진:
(우울한 목소리로)
우리가 너무 힘들구……. 죽구 싶을 때 가는 곳이에요.
슬기, 간호사1에게 살짝 눈짓한다.
간호사1:
(풍부한 손짓과 함께)
예, 수진님께서 잘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안정실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요
다른 환자분들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안전상 문제가 될 때
병의 치료에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 환자분 동의를 얻어서 들어가시도록…….
대평:
(말을 자르며)
동의는 무슨……. 내가 동의 못 한다니까
동의할 때까지 안정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안 그랬습니까?
슬기:
(얼굴이 빨개지며)
이유도 없이 다른 환우분을 때리시고 그러면
안정실에 들어가야 된다고 제가 전부터 말씀드렸잖아요?
대평:
(벌떡 일어서 일순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박일순은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덕천:
(옆자리의 황박사에게)
인신공격이 아닐까요?
대평:
공격이 아닙니다! 수비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도둑맞았단 말씀입니다!
슬기:
무엇을 도둑맞으셨는데요?
대평:
저의……. 탁구입니다.
환자들, 술렁인다.
슬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 아, 탁구를 도난당하셨나 봐요.
대평:
제가 탁구 챔피언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 있습니까?
(가슴을 치며)
그런 제가, 삼 일 전부터 간단한 리시브조차 못하게 된
반면,
박일순, 저 자는 어제만 해도 벌써 오승을 거두었단 말입니다!
(흥미가 생기는 듯 눈동자를 돌려 일순을 보는 영군)
그것도 제가 십이 년 전에 개발한 독창적인 서브 기술로!
수간호사:
(동정어린 얼굴로)
너무 속상하셨겠어요, 그런데…….
황박사:
(불쑥, 그러나 차분하게)
나도 도둑맞았소.
슬기:
예?
황박사:
……. 중국어.
난 아버지를 여읜 슬픔의 깊이를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해 중국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써든리……. 가슴은 벅차오르나
내 입으로 중국어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저 자의 입에서 마치 살다온 사람처럼 사성이 완벽한 쫑궈화가 술술술…….
나투어리히, 정확히 일주일 만에 되찾기는 했으나…….
수진:
(서둘러)
저도 한 달 전에 그랬어요.
갑자기 식욕이 싹 사라져서 밥을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피부 탄력이 어땠겠어요?
근데 일순님이 와서 제 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일주일 만에 입맛을 되찾았으니 망정이지, 얼굴 다 흘러내릴 뻔했네.
은영:
(미안한 얼굴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내 친구, 효진이……. 중학교 때부터 내 유일한 친구였는데…….
……. 내가 잠시 너를 잃어버렸지?
설미:
(울먹이며)
혜정아…….
각자 중얼대는 소리가 마구 겹쳐진다. 차가운 미소를 짓는 일순, 무표정하지만 눈은 일순을 향하고 있는 영군.
휴게실 (낮)
준범과 일순이 탁구를 칠 뿐, 다른 이는 없다. 가면을 쓴 일순, 연신 제자리에서 뛰고 기합을 넣는다.
일순:
(특이한 자세로 서브를 넣으며)
뭐만 없어지면 나한테 찾지.
준범:
(리시브하며)
그게 아니라…….
일순:
(공을 치며)
안 훔치면 뭐해요?
(공을 치며)
어차피 내가 훔쳐간 줄 아는데.
준범:
(공을 치며)
그게 아니라…….
일순:
(공을 치며)
그래서 날마다 엄마가 울었어요.
(공을 치며)
좋았어, 나 땜에 우는 게.
(공을 치며)
나 땜에 도망가 버릴 줄 모르구.
일순의 강력한 스매싱, 못 받아내는 준범. 소파 뒤로 공 굴러간다. 쇼핑백을 안은 영군, 뒤로 숨는다. 준범이 공을 가지고 가자 다시 머리를 내미는 영군,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준범:
(탁구채를 내려놓고)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일순.
(선선히 가면을 벗는 일순)
내가 얘기했잖아, 엄마는 너 때문에 나간 게 아니…….
일순:
(말을 끊으며)
좋아요, 인정!
어젯밤에 목요일을 훔쳤어요.
준범:
누구 목요일?
3층 복도 (낮)
느릿느릿 걸어오는 영군.
영군:
(혼잣말 중얼중얼)
거 참……. 사람이 어떻게 목요일을 훔치나?
갑자기 서서 쇼핑백을 열어보는 영군, 노란색 화요일과 파란색 금요일 팬티 사이에 있어야 할 초록색 목요일이 안 보인다. 감탄하는 영군, 다다다 뛰어간다.
일순:
(소리)
……. 니 탁구 가져가.
화장실 (낮)
칸막이 안. 뒤로 돌려세운 대평의 입을 막고 벽에 밀어붙인 일순, 등 뒤에서 뭔가를 돌리는 듯한 손놀림.
일순:
어차피 돌려주려고 했어.
(귀엣말로)
쳐보니까……. 자꾸 오른쪽 궁뎅이가 가렵드라.
마스크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순.
자판기 앞 (낮)
틀니를 끼고 자판기 앞에 딱 붙어 선 영군,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 소곤댄다.
영군:
귀인이 나타났어.
(팬티 세트를 살짝 들어 보였다 쇼핑백에 다시 넣으며)
여기 목요일 빠졌잖아…….
(부끄러운 듯 엉덩이를 치며)
아유, 월요일은 여깄지.
(흐뭇한 듯)
솜씨가 보통이 아니셔.
……. 왜냐면 내가 지금, 누가 훔쳐가 줬으면 하는 게 있단 말이지, 후훗.
틀니를 빼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음흉하게 웃는 영군.
일순:
(소리)
누나, 나……. 보여요?
정원 (낮)
벚꽃이 만발한 길을, 가면을 쓴 일순과 설미와 나란히 걷는다.
설미:
부분적으론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