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사의공진주파는 진성면에 주로 세거하고 있는 통정공파인데 통정공의 손자 성재공(諱 禮勛)의 아들이 임진란 직후에 동산리에 살았다. |
|
| 동강재(東岡齋)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상동 진양땅 동쪽 50리에 우뚝선 월아산(月牙山)이 푸름을 더하고 장군봉은 남으로 달려가더니 아름다운 한 구획을 열었으니 택지동(澤只洞)이라 한다. 이곳은 정구헌처사(靜求軒處士) 휘 위(蘤)께서 단장하시던 곳이다. 삼백여년이 지난 1973년에 후손들이 처사공의 묘재사를 위한 재실을 마련하였는데 월아산의 동편에 있으므로 동강재라 부른다. 공은 황명처사(皇明處士, 諱 重慶)의 맏아들이시며 생원 성재공(誠齋公, 휘 禮勛)의 증손이시다. 숭정무진년(崇禎戊辰年, 1628년)에 태어나시고 배위는 진양하씨 찬(瓚)의 따님으로 송정선생의 손녀이며 1남 3녀를 두었다. 세월이 오래되고 많은 전화로 문적이 전하지 않아 안타갑지만 족보에는 시(詩)와 예(禮)에 대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경에 이르기를 *苾芬孝祀 神嗜飮食 卜爾百福 이라 하였거늘 즉 그대 향기롭고 효성스럽게 제사드리니 신께서 즐겨 음식 드시고 만복을 내리시리다.하였다. 그러므로 조상을 성경(誠敬)으로 모시는 자손에게만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재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
| 모월재(慕月齋)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상동 진주의 동쪽에 진산이 있으니 월아산(月牙山)이고 그 산의 남쪽에 동산(東山)이라는 마을에 옛날 월암(月菴)선생이 계셨다. 선생의 휘는 덕화(德華)이고 자는 여중(汝重)이며 월암은 선생의 호이다. 선생은 숭릉갑진년(崇陵甲辰年,1664년)에 근재공(謹齋公, 휘 苾)의 차남으로 태어나시어 갈암(葛庵)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숙종 기묘년(1699년)에 문과 급제를 하였다. 학유(學諭)로부터 승진하여 공조정랑(工曹正郞)에 까지 이르렀는데 곧 이어서 양산 운산 등 군수(郡守)를 제수 받았다. 이때에 향중 노소를 청하여 음례(飮禮)를 행하고 강연(講筵)을 열어 예속(禮俗)을 장려하여 풍토를 진작시켜 지방이 다스려졌다. 곧 군수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월아산 아래에 수 간의 정사(精舍)를 지어 종신토록 수양하였다. 공은 날마다 좌우에 도사(圖史)를 두어 날마다 공부를 방촌(方寸)에 쌓았고 화조(花鳥)를 보면서 물화에(物化)에 감응하였으며 객이 찾아오면 문득 술상을 마련하여 문장(文章)을 이야기 하거나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선생은 60세가 되던 의릉 계묘년((懿陵癸卯年, 1723년)에 별세하였는데 배위는 진양강씨 창세(昌世)의 따님이며 3남 2녀가 있다. 묘소는 중촌리 반야동에 있다.
|
| 경양재(景陽齋) 소재 :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 동산 경양재는 동산에 살고 있는 일가의 선조이신 처사공 휘 잠(埁)과 휘 중경(重慶) 두분을 위하여 지은 재실이다. 두분은 성재공(誠齋公, 휘 禮勛)의 장자와 장손이다. 성재선생은 성리학을 연구하고 경제의 뜻을 쌓아서 일찍이 진사(進士)에 올랐지만 당론이 분열되고 조정에는 편치 못함이 나타나는지라 호연하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는데 마침 임진왜란을 맞으니 이곳 동산마을로 돌아와 숨고서 엣날 어질고 밝은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에 감동하고 세상에 도덕이 자꾸만 떨어짐에 분개하여 시(詩)로 그 상한 마음을 탄식하며 마음의 발동을 맏겼고 아들에 이르러서 능히 어버이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는 세상에 이름내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후에 황명처사(皇明處士)라 일컬었으니 양공(兩公)이 뜻했던 업적을 실행으로 다스린 것이다. 남향선비들이 후에 성재선생을 위해 계(契)를 만들고 힘을 모아 광제정(光霽亭)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짓고서 매년 함께 모여 배움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으니 이 재실은 정자와 서로 바라보고 비추어보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원래의 재실은 화재로 잃으니 문헌이 전해지지 않지만 진양지(晉陽誌)에 그 기록이 있으니 196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재실기는 정산공(晶山公 諱 鉉德)이 썼다
|
|
| 아남재(牙南齋)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상동 동산리에 동암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에 지은 재실이다. 동암(東菴)선생의 휘는 현욱(鉉郁)이며 자(字)는 보경(輔卿)으로서 1879년에 태어나시어 면우 곽종석의 문인으로 1948년에 별세하셨다. 문집(東菴集)이 있다. 재실기문은 삭녕인 최인찬 옹이 지었다.
|
| 여례재(如禮齋)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예음 진성의 예음마을에 부사과(副司果)공 휘 명(蓂)의 증손자이신 휘 재징(再徵)공 이하 3세의 묘재사를 위하여 지은 것이 여례재이다. 재실기는 마산(청원리출신)의 秉熙 공이 지었으며 1994년에 건립하였다.
|
| 이추재(履秋齋)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택동 좌헌처사공(佐軒處士公) 휘 덕민(德敏)이하 4대의 선조분 여섯분을 위한 재실이다. 후손은 마진리 마호(磨湖)로부터 이곳 택동으로 이거하여 왔으며 여섯분이란 佐軒處士 휘 덕민(德敏) 松川公 휘 한무(漢茂) 휘 재보(再馥) 휘 국립(國岦) 敦寧府都正公 휘 국현(國琄) 敦寧府都正公 휘 국순(國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