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생활 남편이 이력
혹독한 겨울도 지나고 열매의 가을도 지나 꽃피는 봄도 맞이했든 시절들 남편은 급도 없이 밀어 붙었다.
1, 겸무청으로 근무한 회계계
24세 때 공무원 시험합격 1960년 2월 29일부터 고암면사무소 근무 8년 창녕군청1968년 2월5일부터 근무 가장 비중이 큰 일반회계를 맡아 보았는데 회계계에 간지며칠 안 되어 계장이 바뀌고 보니 업무파악 및 마비된 각종 장부의 정리과정에서 원천세와 읍면전도 자금 및 조립비와 하자 보증금등유용사건이 계속 들어날 뿐 아니라 봉급 담당직원의 봉급봉투 분실 및 고의적 착오 사건 등이 수시로 발생하여 사후수습 및 변상조치에 무척골치를 앓기도 하였다한다. 한번은 14개 읍면직원과 군청직원 월급을 주산으로 두들겨 밤샘하고 정리를 하여 열쇄를 채웠는데 돈이 많은 봉투 한 개가 없다 너희들이 변상해라 상부에 알리면 죽는다. 그래서 두달 월급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애매하고 정리되지 못한 세입 세출이 현금출납부를 각종증빙 서루와 일일이 대조하여 1964년부터 5년간을 소급 정리 하였으며 지출명령 관계로 재무회계 규칙을 정상화 시켰다 한다.
2, 감사 업무 강화를 위하여 신설된 초대 감사계장
감사계장에 보직을 받자마자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대 양곡사고가 남지 배효도 창고에서 발생하여 신문마다 대서 특별보도 되었으므로 진상조사 및 사후조치에 골치를 않게 되었다 수납된 정부양곡뿐만 아니라 그 창고에 보관중인 남지읍의 구호양곡 및 자조근로사업용 양곡과 양곡 부산물까지 부족한 대 사고가 발생하자 배효도 사장은 창고문을 잠가둔 채 도주하고 없었으므로, 진상조사를 하기 위하여 담벽을 뚫고 들어가 보니 외면상보기에는 창고에 양곡이 가득 차 있었으나 흔들흔들 움직이기에 헤쳐 보았드니 밖에만 양곡가마니로 발라 놓았을 뿐 안에는 부산물인 헌 가마니와 등겨 등이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무부 및 감사실에서 협동조사실에서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발견되어 전 양정계장이 구속 및 파면되고 전출된 전 산멉과장도 파면되었으며 현 과장과 계장 및 남지의 읍장, 총무, 산읍계장 등도 진계조치 되었으므로 남해로 전출된 구태옥 전 군수께서도 감독책임상 사표를 제출하고 공직에서 물러나셨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다.
3, 사기 당하였던 시장부지를 도로 기부 받은 관재계장
시장 장옥은 대부분이 연약한 기둥에 함석지붕으로 되어있어 바람이불면 곳곳에서 도괴현상이 일어나 계속 복구 및 보수 하여야만 되는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공설시장부지를 일제 조사하여 미등기된 부지를 군유로 등기하는데 역점을 두고 추진하던 중 지방유지들의 기부로 조성된 유어시장부지의 한가운데 요지에 있는 한필지가 소문난 토지부로카인 배모씨에게 바로 얼마 전에 이전등기 되었음이 발견되었다. 특히 배씨는 미등기된 학교운동장부지들을 자기 앞으로 이전 등기하여 말성이 많았던 유명한 토지사기꾼이였으므로 이것도 사기 당하였음이 틀림없는 것 같아 진상을 조사하여보니, 그 시장부지를 기부한 분은 이미오래 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도 얼마 살지 못하는 중병에 걸려있었으므로 배씨가 가난하여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투병중인 아들을 찾아가 약값을 좀 줄것이니 선친명이로 되어있는 유어시장 부지를 자기 앞으로 이전등기 하여달라고 꾀었던바 처음에는 강력히 거절하였으나 배씨가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약이라도 한번 써봐야 되지 않겠느냐 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은 결과 우선 약이 급하다보니 배씨의 사기행위에 넘어가 약값으로 조금만 받고 이전등기서루를 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부지를 기부한 아들이 죽을죄를 지었다면서 눈물울 흘리며 잘못을 호소하는 내용을 그 데로 적어 拇印(무인)을 날인 받은 뒤 배시에게 찾아가니 자기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다면서 큰소리를 치기에 부득이 경찰서에 사기죄로 고발조치하였다. 그런데 사기죄로 실행을 받더라도 시장부지를 도로 찾는 데는 다시 民事訴訟(민사소송)을 거쳐야 되는 등 절차가 복잡할 것 같아, 경찰서 형사계장과 의논하여 배씨를 술집에 불러놓고 나는 배씨를 지역유지로 추겨 올리면서 당초 부지도 지역유지들이 기부한 것이니 당신도 이 기회에 지역을 위하여 다시 기부하는 아랑을 베풀어 보라고 사정을하고, 형사계장은 사기죄로 처벌하겠다고 위헙을 하여보니, 처음에는 어림도 없었으나 술이거나하게 자기가 약값으로 준것과 등기 수속비까지 합하면 35,000원이나 들었다며 그 돈을 내가 변상하여 줄 것이니 지역발전을 위하여 기부하는 좋은 일을 한번 해보라고 추겨 올리면서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35,000원을 변상하여 주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기부서와 이전등기서류에 날인을 받아 시장부지는 도로 찾았으나 비공식적인 절차에 의하고 보니 변상금 35,000원으을 빛내어 사후에 갚느라고 고생하기도 하였다.
4, 추억을 가장 많이 남긴 관리계장
관리계는 건설과의 주무계로서 건설사무, 하천관리, 방제, 주택 및 건축, 상수도, 운수 등 그 업무가 너무나 광범위하므로 항상 바빠도 밥은 집에서 먹는다, 그날은 서울출장 갔다가 오는 날 밥을 해놓고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앞집 정주사가 와서 말했다. 서울서 오셨는데 집에 못 오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임시직원 신주사가 내무과장 처남인데 관리계장 도장을 훔처 집 허가를 내고 관리계장이 집 허가를 내 주었다고 경찰서에서 큰소리 처 서 출장 갔다 오는 사람을 바로 구속시켰다 한다.
* 정신이상 직원 해임 및 그 후유증
성주사가 우리 집에 와서 상수도 지키는 오수사는 집도주고 포도 밭도 주고 월급도 주면서 나는 월급을 안준다, 내가 총이 있으면 다섯 사람 죽인다. 군수, 사회과장, 과리계장은 재일 면저 죽인다. 그래도 내가 샘에가서 생수 퍼다가 사까리(설탕대용) 타서 미슈가리 한 대접타서 주면서 노인이 밤에 다니다 넘어지면 큰일 남니다, 잡수시고 가세요 했다. 그러는데 남편이 와서 타일려 보냈다,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왜 오주사는 많은 해택을 주면서 성주사는 월급을 안 주었소, 오주사는 표도 나무도 기가 심었고 상소도 밥낮으로 지키니 숙소도 있어야하고 성주사는 수도 요금을 받아 가로 챈다. 그 다음날 많은 사람이 보는데 예리한 도구로 남편 뒤에 와서 찍으르 하는데 잡아 너 죽이고 내 감옥 간다, 맥살을 잡고 목을 조르니 그제야 살려달라고 살살빌고 도망갔다,한다 국회의원 성낙현 빽믿고 친동생이 당시 여당인 공화당 지역구 사무국장의 직위에 있으므로 그에 대한 체면상 강력한 조치를 하기가 곤란하여 달레려고 했는데.
5,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 간부양성반 파견교육
6, 한해 설계만 하여놓고 떠난 기획예산계장
7, 행정 계장에서 돈까스사고
국회의원선거 공무원 시험 인용문재 군수님 심장마비 큰일이 많았다. 그래도 영산면 감사 이틀째 되는 날 감사장에 점심을 시켜 먹을려는 되 손님이(농사과장 당시 내무과장 친형)와서 돈까스를 시켜 감사원의 군농사과장과 면장 부면장 총무계장등 10여명이 돈까스 식사를 하였는데 외식을 단속해야할 행정계장과 면장이 같이 먹었다고 징계를 먹었다. 그때 나이 35세 10년 공든 탑이 와장창 무너진 것 같았다. 행정계장자리도 물러나고 행정 통신기도 때 가고 풍문에 의하면 남편의 건에 대하여 별것 아닌것 잡아왔다는 비축을 받았다는 설도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의 진급 탈락되어 손해가 많았다,
* 공든 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8. 체납세 일소에 역역을 둔 세정계장
9, 14일근무한 산업계장
10, 평가계장에서 사무관 자리에 영전
11, 공직생활에서 홍역과 같다는 사무관승진시험
일년만에 있는 시험 많은 경쟁자를 뚫고 많은 고생 끝에 7월 24일 합격 통지가 와서 8월 1일부로 사무관승진 인사발령장을 받았으니, 그렇게나 고대했던 사무관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샘이다.
12, 군민헌장제정과 현지발간에 보람 느낀 문화공보실장
구마고속도로 개설공사가 착공돠었는데, 계성고분군의 유물발굴도 하고 화왕산불이나서 수습하기도 했다. 창녕군민현장을 만들어 군내각기관사무실에 부치고 창녕군읍지는 다시 창녕항교증교인 저의시아버님이 재 인쇄 하셨다, 구마고속도로도 그때 개설했는데 주변환경정리도 많이 신경섰다고 한다. 78년 1월에는 김창수 군수와 같이 일본에 가서 부곡하와이를 유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3, 단기간에 군민을 많이 상대한 민방위과장
14, 수매양곡 操作(조작)에 골치앓은 식산과장
15, 부곡온천장 정화에 역점을 둔 사회과장
도로포장을 하는데 업자들이 철거방해는 물론 칼부림까지 해서 7월 2일 새벽 5시에 군청 전직원과 경찰서 전직원을 경찰기동대 200명 총 400명이 새벽5시에 마치 전투에서 전격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나갔다. 경찰서장이 지휘봉을 들고 강력하게나가니 포장시설업주들이 내일 철거하겠다고 했다.
16, 군청사와 관사를 이전 신축한 재무과장
17, 올림픽 해에 내무과장
4장, 집단민원 속의 창원시 도시계획국장 두 번 역임
새계에서 4번째 큰 도시계획, 박정희 대통령께서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정하였다한다. 창원시 도시계획 1년2개월 만에 양산 동부출장소장을 같다 와서 마무리했다 한다.
5장 기장군 복군의 기반을 구축한 동부출장소 소장
수만 명의 군민들이 대 환명했다. 在京(재경) 동래향우회를 열었다. 합군한지 20년이 되어도 고향을 아직 “양산”이라 하지않고 “동래” 라고 했다. 향교 초헌관으로 기장향교 석전제도 올리고, 국회의원도 두분 동부 출장소 분이다, 출장소 기구 확장과 청사 위치를 확청했다. 결혼 못 올리고 사는 36명 합동결혼식도 올려주고 해동사 신축 길도 딱아 주었다. 91년 8월 23일 태풍 글래디스의 영항으로 482mm의 폭우가 나려 동부 관내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희 공원묘지가 파계되어 부산대 의과대학 이교수가 악취 나는 시신들을 이교수가 일일이 검진 분석하여 신언이 밝혀지기도 하고 국립수사연구소에 의뢰하여 빍혀진 것도 있었다.
양 공원묘지 공히 유족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들과 합의하여 신원이 밝혀진 것과 밝혀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가매장한 후 추석성묘 유족을 위한 임시 위령소를 설치하고 항구적인 위령탑을 백운묘지는 그 이듬해 설까지, 신로암 묘지는 이듬해 추석까지 건립하기로 하였다,
제 6장 부군수로 고향을 위한 마지막 봉직(奉職)
고향을 위한 마지막봉직의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되어 보다 좀더 잘 해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의 고향인 창녕을 농업과 공업 및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문화관광이 조화된 즉 현대화와 유구한 전통문화가 슬기롭게 조화된 전형적인 군 형태의 고장으로 발전 시켜봐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각종 개발을 위한 농지전용과 토지형질변경허가 처리에 특별히 신중을 기하기로 하였다.
*생활쓰레기 매립장 문제, * 하수종말처리 시설문제 *낙동강모래채취문제 * 수성석산 문제 *산불 문제 군수공석 도지사로부터 경고 처분 받기도하고 11군단의 병력동원도하고 핼기까지 지원 받아 진화하여야만 되었다.*극심한 가뭄으로 고사되어가는 벼를 살리기 위하여 밤에도 물 뿌리기 하는 것이 KBS방송에서 와 찰영하여 가기도하고 강원도 원통에 있는 12사단에서 양수발동기 12대를 기정하여 왔다. 食水難(식수난) 까지 겪게 되자 마산, 창원, 진해, 밀양, 대구 등지의 소방차 지원을 받아 창녕읍 관내에 식수를 공급하여 주기도 하였다. *창녕공설운동장도 건설하였다. *대형 도축장도 건립하게 되었다. *간상소지 확장공사도 하고
94년 12월말 통합시로 인하여 6개군이 없어지면서 32년 근무한고향의 봉직에서 떠나게 되었다,
7, 長承浦(장승포)
갑자기 발령을 받아 혼자먼저가고 내가 짐을 실고 갔다. 너무 설령하고 배웅하로 따라간 사모님들 보기도 민망했다. 우리 수로원이 두 명이 같이 갔기에 다행이지 거제시 직원은 열쇠만 주고 갔다. 관사는 크고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었다. 여태 다녀 봐도 그런 대접은 처음이다. 그기도 모두이동하다가 보니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그 기 부시장이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만나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섭섭했다.
8, 문화예술의 향기 속에서 공직 마무리
그기는 관사도 고층아파트 남강의 경치가 아름답다, 가끔 연극도 보고 음악회, 쇼, 무용, 영화, 마당극, 도 관람하였다, 적년 퇴임을 13명 같이 하는데 남편은 녹조근정훈장과 도지사의 공로패, 격려금, 기념품 증정과 격려사를 했다.
퇴직자 13명은 모임을 만들어 해외여행도 많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