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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향기ㅡ몽골(울란 바타르)
서울은 연일 무더위다. 2006년 8월 6일 12시 5분발 몽골 항공기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다.
폭폭 찌는 더위에서 탈출, 시원한 레드 와인 한 잔이 입 안 가득 퍼지자 정수리를 가득 채운 더위가 사르르 사라진다.
몽골 승무원의 한국어 방송이 부드럽게 기내를 맴돌고, 아침 일찍 서두른 피로가 술기운처럼 몰려온다. 한국말을 참 곱게도 한다.
3시 25분 징기스칸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공항은 우리나라 작은 도시의 버스 터미널처럼 아담했다. 대합실을 나오면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엔 웃음꽃이 절로 피었다. 어느 이국의 공항에서 이렇게 살가운 정겨움을 느껴 볼 수 있겠는가? 낡은 버스를 타고 울란 바타르 시내로 들어갔다.
울란바타르는 “붉은 영웅”이란 뜻. 몽골의 수도이다. 징기스칸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높이 50m, 내부의 엘리베이터를 타면 동상 꼭데기 까지 갈 수 있고, 징기스칸처럼 거대한 독수리를 팔뚝에 올려놓고 기념사진도 남길 수 있다.
1911년 몽골은 외몽골의 독립으로 두개의 나라로 나뉘어진다. 울란 바타르는 ‘우르가’에서 1924년 인민 영웅 ‘수흐 바타르’를 기념하여 이름이 바뀌었단다. 인구 13만의 도시, 녹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크고 작은 산등성이에 둘러 쌓인 ‘둘라’강을 앞에 두고 좌우로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집들이 펼쳐져 있다.
도시 중앙엔 화력발전소가 고원 지대인 이곳을 커다란 파이프에 뜨거운 물을 통과시켜 도시 전체를 덮혀 준다.
메마른 이 곳은 나무가 자라기 힘들지만 강 주변엔 드문드문 나무들이 키재기를 하고 강변에선 초동들이 수영을 즐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취하다보니 참, 오늘이 일요일이다.
가이더 아저씨는 50대 초반의 록가수처럼 머리에서 신발까지 검은 진으로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공무원 월급은 한달 9만원 정도지만 부패가 심해 1억5천짜리 외재차를 몰기도 하고 160평짜리 고급 아파트는 1억을 훨씬 넘기도 한단다. 또 교육열이 높아 3달 학원비가 한화 백만원 정도지만 끈질기게 영어 학원을 보내며 우리네처럼 치맛바람이 쎄단다. (이건 몽고리안의 특징일까) 시내의 스카이샵 매장엔 한국 물건이 넘쳐 나기도 한다.
1911년 독립하였고, 18세기 청나라 땐 라마교가 전파되어 시내에는 높이 26M인 관음상을 모신 간등사원, ‘수호 바타르’영웅 동상이 중앙에 서 있다.
1921년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서 종교 탄합이 심해졌으나 간등사원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이들은 유목민들이라 유적이 거의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사라지는 그들이 자유롭다.
자이승 승전탑이 있는 뾰족하게 솟은 오름 옆 산에는 징기스칸 탄생 100주년을 기려 흰 돌을 박아 그의 초상화를 꾸며놓았다. 탑으로 가는 계단 중간에서 차를 내려 올라가는데 바람이 세차다. 탑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산을 따라 동서로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 눈에도 조밀하고 칙칙하다.
탑 위에서 하늘을 나는 흰 구름과 초원을 달리는 바람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노래를 듣는다. 지상의 자잘한 모습보다 하늘을 향한 그들의 기상과 맑은 영혼이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팔레스 호텔 방에서 일몰을 본다. 산 위로 해가 진다. 9시 반이다.
1995년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지가 저무는 20세기를 보면서 지난 천년(서기1001년-2000년)의 역사에서 전체 인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뽑힌 이는징기스칸이었다.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지금도 ‘타타르의 멍에’라 하여 무서워하고 또 저주를 퍼붓는 서양인들이 그를 뽑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쪽으로 부터 동방으로의 통행이 자유로워지자 상인들과 모험가들을 유혹하였고, 마르코 폴로의 무용담은 컬럼버스의 꿈이 되었다. 컬럼버스는 유럽과 아메리카 두 대륙을 연결 시켰다. 컬럼버스는 다른 사람이 동쪽으로 떠날 때 서쪽으로 떠났을 뿐이다. 왜, 그는 대양을 가로 지르면, 중(원)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 했을까? 그는 이미 쿠빌라이 칸의 궁전에 관해 엄청나게 묘사해 놓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었던 것이다. 컬럼버스는 마르코폴로가 간 육로를 해로로 가려 했을 뿐이다. 만일 이슬람이 동서양 사이에 장막을 치고 있었다면, 마르코폴로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없었고, 폴로보다 앞서 정착문명의 장막을 무너뜨린 그 누군가가 있었다. 우주처럼 광대한 지구를 좁게 만들어 사람들이 대륙을 넘어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 최초의 지구촌 시대를 연 인물. 바로 징기스칸이 있었다.
징기스칸 시대에 정복한 땅은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며, 알랙산더 대왕과 나폴레옹과 히틀러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울란바트르로 가는 몽골 비야트항공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에 ‘징기스칸’이라고 그들의 언어로 적혀 있다. 비행기뿐 아니라 그들은 무엇이든 지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마다 그 이름을 붙여둔다.
울란바트르에 도착하면 ‘징기스칸’호텔에서 ‘칭기스칸보드카’를 마시고 ‘칭기스칸’이라 써진 지폐를 쓴다. 몽골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숭모하는 영웅 ‘칭기스칸’이다.
이르쿠추크-동시베리아의 파리
8월 7일 6시반에 공항으로 향했다 해는 7시쯤에 뜨기 시작한다. 게르들은 부스스 잠을 깨고 붉은 현대식 지붕과 함께 마을을 장식한다. 공항은 북적이고, 몽골 가족이 여행을 가는지 전통복을 입은 할머니 한분이 곱게 앉아 계신다. 작은 쌍발 비행기는 8시 10분 이르쿠추크를 향하여 출발한다. 지정석이 없어 맨 앞자리에 앉았다. 한 줄에 네자리 가운데가 통로다. 날씨가 맑아, 창가에서 몽골의 초원과 바이칼을 마음껏 볼 수 있으리라, 요란하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에 귀는 멍해지고, 내뿜는 격한 오일 냄새는 때 아닌 멀미를 일으키려 한다. 파란 풀이 부드럽게 깔린 산맥들. 고불고불 골짜기를 감돌며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들이 미쳐 감지않은 실타래처럼 엉켜 보인다. 아래 세상은 온통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우린 하늘에서 가장 평화로운 색채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바이칼이 가까워지자 점점 산줄기가 높아진다. 초록들이 사라지고 ‘천지’를 닮은 작은 연못들이 군데군데 정안수를 담은 보시기마냥 흩어져 있다. 녹지 못한 얼음 무더기도 여기저기 허옇게 널려 있다. 신비롭다. 다시 숲들이 울창해지며 초록이 짙어진다. 그리고 바이칼이다.
‘성스러운 바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란 애칭에 우리 민족의 발원지, 바이칼은 타타르 어로 ‘풍요로운 호수’란 뜻,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민물호수다 육지와 육지 사이에 박아 놓은 쐐기모양 모양새로 길이는 부산에서 평양정도, 면적은 남한의 10분의 1 크기, 수심이 깊은 곳은 1637m, 수량은 미국의 5대호를 합친 것보다 많다. 맑은 날엔 수심 30-40m까지 훤히 보일정도로 맑다. 바이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 336개인데 호수와 물이 빠져 나오는 출구가 알가라 강 하나뿐. 바다처럼 넓다더니, 640km가 한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하늘은 흐리다. 회색에 가까운 흰빛 물, 호수 위엔 배하나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물만 채워진 가장자리 끝엔 조약돌처럼 옹기종기 마을이 있고 철도가 보인다. 11시 5분 이르쿠추크도착,
이르쿠츠크(시베리아의 파리)
바이칼 호수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르쿠츠크’를 거쳐야 한다. 19세기 중엽 1867년 알라스카가 미국에 팔리기 전까지는 알레스카도 이루쿠츠크 관활지였으며, 앙가라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이다. 바이칼에서 빠져 나오는 앙가라강이 도시를 동서로 가로 질러 흐르고, 거리에는 재정 러시아 시절에 지어진 건축물과 고풍스런 목조 가옥들이 많아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린다. 러시아의 남쪽, 36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재정 러시아 시절 정치범들의 유형지로 사용되었다. 바이칼 호수덕에 시베리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온순하지만 한 겨울에는 영하 30도 까지 기온이 뚝 떨어진다. 1991년 러시아가 개방의 물결을 타긴 했지만 몽골에 비해 폐쇠적이고 ‘모스크바나 페테스브르크’같은 큰 도시에 집중하다 보니 우르쿠츠크에는 개발의 손길이 못 미쳐 지금도 러시아의 시골로 생각되어지는 곳이다.
시내 중심엔 큰 호텔이 (앙가라,바이칼)딱 2개여서 주로 외국인이 쉬어 가며 관광은 7,8,9(3개월)월에만, 10월부터 6월은 비수기이다. 겨울이 춥고 길어 ‘보드카’라는 독한 술을 마시며 책을 읽고 긴 겨울을 보낸다. 남 시베리아에 위치한 우르쿠추크도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살며 브리트니족(몽골),러시아인,고려인, 우즈백인,중국인등 다양하다. 시내 중앙 광장 높은 건물엔 우리의 전자 시계처럼 그날 그날의 날짜,기온이 자동으로 표시된다.
공항 입국이 쉽지않다. 여행사에서 작성해준 입국신고서가 새로 바뀌었다며 다시 작성하란다. 몹시도 무뚝뚝한 러시아 여인, 입구에 서있는 말끔하고 단정한 몽골 가이더‘ 바트 샤이한’을 만나서야 러시아 여인의 곱지않은 느낌을 지운다. 몽골대 한국어과를 나온 27세 청년은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다. 몽골어가 워낙 힘든 발음이라 외국어 배우기가 쉽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어도 잘했다.
바이칼 호텔에 짐을 풀었다. 점심 식사 땐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우리의 도착을 환영 하는 걸까, 몽골과 달리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가로수들도 울창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마음부터 여유롭게 한다.
식당에서 나올 땐 비가 그쳤다. 자작나무 숲이 우거져 100년이 넘은 목조 가옥들이 도로 주변에 서 있다. 검은 빛으로 벽과 지붕 끝에 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정교한 장식을 보여준다. 우르쿠추크인들은 솜씨가 매우 좋아 나무 집을 많이 지었으며 틈새는 이곳에서 많이 나는 꿀을 발라 단열과 내구성을 길렀고 오늘날까지도 건재함을 보여준다.
도시 전체는 중앙난방으로 화력발전소가 있다고 한다. 소나기가 지나간 길에 꽃노점상들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꽃을 좋아한단다. 5걸음만 걸으면 꽃집이다. 먹을것이 없어도 꽃은 산다나, 여유일까,아님 예술성일까,
트루베츠카야 박물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울 만큼 이르쿠추크가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트루베츠카야와 11명의 여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잠든 곳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뒤쫓아 프랑스까지 나아갔던 젊은 러시아 장군들은 유럽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들의 조국을 비관하게 된다. 귀족의 자제들이었던 그들이야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을 위하여 위로 부터의 혁명을 도모하게 된다. 이들을 ‘데카브리스트’라 일컫는다. ‘데카브리’는 12월을 의미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혁명은 실패하고, 1825년 피의 응징을 받아야했다. 전쟁에서 이겨, 유럽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고 돌아와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으켰던 혁명, 600여명의 혁명 관련자들 중 주모자 5명은 사형, 120명은 이곳 ‘우르쿠츠크’로 유배를 당한다. 가장 추위가 혹독한 ‘치타’지역에서 손발에 22kg이나 되는 쇠고랑을 차고 노동징역을 당했다.
문제는 홀로 남게 된 부인들에게 주워진 선택권이었다.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혼하거나, 아니면 귀족신분,재산,자식까지 버리고 남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영하 40도가 넘는 엄동설한의 머나먼 길을 썰매 마차로 주야를 달려 11명의 부인들이 남편을 찾아왔다고 한다. 첫번째로 남편을 따라온 여성은 예까쩨리나 투루베츠카야이고 1년이 넘어서야 자신들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니, 영화같은 실화다.
마리아 발꼰스까야(1805-1863),그녀는 참으로 훌륭한 여성이었다. 높은 지위의 아버지와 왕비의 비서였던 어머니와 한살 된 아들을 두고 그녀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그녀를 외면하고 30년이 지난 후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 자기 딸이 가장 훌륭한 여성이었노라고 말했다 한다.
발꼰스키공은 1790년에 태어나 1860년까지 산 인물로 그는 청춘을 혁명에 바쳤고, 그리고 유형 당했다. 그들의 혁명은 100년 후 공산혁명을 낳게하는 근원이 되었다.
아침이면 부인들은 탄광으로 들어가는 남편들을 면회하고 음식을 갖다 준다. 그녀들은 이곳에 와서 수공예품을 만들어 남편들을 공양했다. 러시아의 최고 가문애서 자란 여인들은 모든 가정일들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어떤 여인은 혹한의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 갔고 , 남편들도 마찬가지, 살아남은 자들은 감옥생활을 마치고 이르쿠추크나 주변의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아 살았다.
발꼰스까야의 집에는 숙부 ‘톨스토이’의 사진이 걸려 있고, 푸쉬킨의 데드 마스크가 걸려 있다. 푸쉬킨은 마리아를 사랑했고, 마리아는 발꼰스키를 선택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발꼰스까야를 주인공으로 탄생되었다. 음악을 사랑했던 그녀의 집은 이르쿠추크 지식인들의 문화센터로 시낭송, 음악회, 정치토론의 장이 되었고,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혁명가와 낭만적인 여인들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서 음악회가 열린단다.
마리아의 초상에는 힘든 여정과 인고의 시간과 성숙한 삶과 초월된 세상이 들어 있다. ‘발꼰스키’와 ‘트루베츠카야’가 생활하던 집이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200년전 그들의 열정과 숭고한 사랑을 간직한 그들의 집을 나선다. 주인공은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검은 목조 가옥은 아직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비에 젖은 모습으로 묵묵히 서있다.
자작나무 키 큰 숲들을 돌며 노래하는 앙가라강이 있고, 변함없이 늘 푸르게 반짝이며 흐르는 바이칼의 은빛 꿈들은 아마 그들의 희망이리라.
키로프 광장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
이르쿠추크에서 최초의 석조 건물인 키로프 광장 한가운데는 영원의 불이 타고 있다. 그 중 스파스키 성당은 전형적인 정교 교회양식을 갖춘 성당이었으나 볼세비키 혁명 후 종교탄압으로 공동주택에서 1981년 ‘에사 민속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전시품은 수공예품, 러시아풍의 빨간색 꽃무늬들 화려한 문양이 있는 여성복 루바까등이 1층에 전시되어 있고, 2층엔 주로 사제와 주교의 화려한 제의복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단자리에는 금박의 화려한 표지의 1700년대의 성경책 2권이 놓여 있다. 공산화가 되기 전 시베리아의 신앙은 아주 독실했음을 전시품에서 알 수 있었다. 1950년대 경제 사정이 아주 어려웠을 때 여자들은 손수 옷감을 짜고 의복을 지으며 소박한 패션을 만들어 나갔다. 자기 일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르쿠추크 여인의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앙가라 강가엔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알 수 없지만 예전의 성스럽던 모습은 외관에도 남아 있고, 아가씨들이 부르는 성가가 울려 퍼진다. 역시 인간의 목소리는 그 어떤 악기소리보다 아름답다 생각되었다. 칼막스 거리가 시작되는 앙가라 강변으로 가족들이 산책을 즐기는 모습, 연인들, 아이들의 모습이 강풍경과 어울려 하나의 그림이 된다. 앙가라의 물결도 여기선 천천히 흐른다. 거리엔 오래된 유럽식 건물이 대부분이며 레닌동상이 서 있다. 해가 남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 왔다. 창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 뒷뜰에 자란 나무를 보며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모든 것이 오래전부터 보아온 풍경처럼 낯익다.
앙가라 공주의 슬픈 사랑 -앙가라 강
아들을 336명과 한명의 딸을 둔 왕이 있었다. 336명의 아들은 바이칼로 흘러 들어오는 지류를 말하고, 딸 하나는 유일하게 밖으로 흘러 나가는 강 앙가라를 말한다.
예쁜 딸의 배필은 이미 아버지가 정해준 터였다. 공주에겐 정혼자 말고 사랑하는 남자 멀리 있는 강 에니세이가 있었다. 에니세이를 향해 도망치는 앙가라에게 비정한 아버지는 바위를 던져 죽게 한다. 그 바위가 ‘샤면 바위’이다. 사랑을 찾아 도망치는 앙가라의 마음처럼 물 흐름이 매우 빠르다. 오늘도 에니세이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은 그 빠른 물결로 남아 있다. 겨울이 되어도 강은 얼지 않는단다. 강 언저리엔 도망치고 싶은 공주를 숨겨주고 싶은 듯 늘 안개가 자욱하다. 이르쿠추크 사람들도 강주변 공원과 산책로를 거닐며 앙가라 강에 대한 사랑을 즐긴다. 앙가라의 뜨거운 열정이 흐르는 것인지, 이르쿠추크 여인들은 아름답다. 자작나무 처럼 큰 키에 복숭아 꽃처럼 뽀얀 피부를 가졌다.
오후 자유시간 엔 이르쿠추쿠에서 가장 번화가인 무역의 거리 우리츠카바에서 보냈다. 햇빛이 강하여 걷기에는 덥고 그늘은 시원하지만 어디 앉을만한 자리가 없다. 이리저리 돌아 다닌다. 다양한 인종에 온갖 패션이 거리를 활보한다. 여기가 젊은이의 거리란다. 여자들의 과감한 노출패션에, 높은 하이 힐, 아슬아슬한 치맛자락, 푹패인 가슴팍 큰 가슴을 내밀고 당당하고 힘차게들 걷는다. 러시아인들은 꽃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발레를 즐기고 문학을 사랑한다. 예술가의 고운 혼들이 이들속에는 흐르고 있다. 열정적이다. 분위기 좋은 러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밴드의 신나는 연주를 듣는다. 곡은 어느새 애상적으로 변해 간다. 밖은 여전히 활기차고, 7시가 넘어도 햇살은 따갑다. 낮이 긴 여름. 강물은 빠르게 흐르고, 나무는 쑥쑥 자라고, 사람들은 여름 한동안 신나고 활기찬 외출을 즐긴다.
자작나무 숲에서 ‘라라’를 만나다-달찌마을
바이칼로 가는 길은 싱싱한 나무들의 향기로 가득하다. 러시아의 노래들 바로 흰 자작나무 숲이다. 숲 속엔 시베리아의 민속촌 동화 같은 ‘달찌마을이 있다. 마을 앞에는 새벽 별빛처럼 앙가라 강이 흐르고, 섬세한 목공예로 도배된 집들은 성주의 집, 성채, 가정집, 유리 공예집, 그리고 18세기 시베리아 최초의 학교도 있다. 이곳은 코삭스인들의 주거지였다.
코삭스인들은 16세기에 시베리아에 파견된 용감한 군인들을 일컫는 말로 이곳에 정착하여 가정을 이루고 전사가 되었다. 시베리아는 몽골어로 ’시빌‘즉 풍부힌 산림을 뜻한다. 이곳은 원래 몽골족의 터전이었다. 지금도 몽골족인 브리아트족이 살고 있다. 몽골족들은 이곳을 뺏기고 황량한 초원으로 갔다.
이곳 ’타이가‘지역의 수목은 70년-80년쯤 자라 밀도가 높고 탄탄하여 세계 시장에서 각광을 받는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 하늘 위로 쭉쭉 뻗은 흰 가지들 , 숲에 쏟아지는 햇빛마저도 녹빛이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하늘거리는 가지는 ’라라‘의 손짓이 된다. '닥터지바고'의 설원을 달리는 마차의 뒤로 보이던 그 숲이 자작나무 숲이었다.
늑대의 울음이 살아있다는 시베리아의 그 숲, 야생화 같은 여인, ’라라의 테마 송‘이 숲 사이로 흘러 넘친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살, 설원을 해매던 지바고의 눈에는 자작나무의 흰 가지가 ’라라‘의 따스한 팔로 비쳤으리라. 라라를 닮은 자작나무 숲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에 또 한번 취했다.
도로 가에는 수박을 팔았다. 모든 집들의 문은 이중문이다. 유리 창틀은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흰 레이스 커튼이 하늘거린다. 창틀에 놓인 예쁜 화분들이 신혼 방처럼 들여 다 보고프게 했다. 멀리서 보면 예쁜 그림을 액자에 끼워 놓은 듯 도드라져 빛을 발한다.
그리운 호수-바이칼이여
8월 8일 화요일 드디어 바이칼에 왔다. 이르쿠츠크에서 동남쪽으로 70km쯤 가면 바이칼과 앙가라 강이 만나는 곳에 작은 항구 라스트 비앙카가 나온다. 강한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차창으로 바이칼을 내다 본다. 온통 환하다. 몸 구석구석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호수 바이칼은 2500만년 전쯤 지각 운동이 의해서 이루어졌다. 바이칼의 물속 200m 이하의 온도가 언제나 4도c 정도를 유지하는데 이 맑은 물의 비법은 호수의 바닥에서 크고 작은 지진활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 지진 덕에 호수의 물은 항상 정화된다고 한다.
바이칼 호수의 26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 샤머니즘의 고향 ‘알혼’섬이다. ‘시휴르따’ 선착장에서 연락선(빠롬)을 타면 갈 수 있다.
‘부르한 바위’는 아시아 대륙에 존재하는 9개 성소중 하나로 이곳의 설화(나뭇꾼과 선녀), 바로 우리민족의 시원이다.
언덕 위에 있는 바이칼호텔에 짐을 내리는 동안 전망이 확 트인 곳으로 달려가 호수를 내려 다 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바라 보았던 이 호수, 따가운 햇살아래 마음껏 맨 몸을 드러낸 눈부신 청량빛 보석, 샤파이어 빛을 닮은 바다 같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눈부신 감동을 만난다. 이렇게 멀리멀리 돌아 오래오래 기다려 여기 왔구나.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이 생각난다. N형 나는 바이칼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다보면서 이 글을 쓰오. 라고 시작했던최석이 친구 N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던 곳, 끝내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던 곳이. 사랑하는 사람의 뒤를 따라 생을 마감하였을 정임이의 넋이 있는 곳이, 그들의 맑은 영혼이 녹아 오늘도 호수는 은빛으로 빛난다. 바이칼 호텔 202호 호숫가 식당에서 바이칼의 명물 ‘오물’생선 튀김을 먹었다. 맛이 담백하다. 옆에 있어도 그리운 당신처럼 우린 온통 바이칼 이야기다. 아! 우린 바이칼의 초대를 받은거야. 유람선에 올라 뱃전에 서서 다가오는 호수의 물빛도 청녹빛이다. 물빛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내려놓은 듯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린다. 1시간 정도 유람을 하고 내려서 호숫 물에 손을 담가 본다. 바이칼 호수에 몸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단다. 작은 자갈들이 사그락 거린다. 태고의 순수를 간직한 물, 차가움이 전류처럼 심장으로 모인다.
새로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다시 태어나리라, 우리가 만난 수많은 시간들이 호수위로 흐른다. 배에서 내려 호숫가에 있는 노천시장에서 수공예품을 구경하고 작은 보석함 3개를 샀다. 자작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한 무늬가 각기 다른 보석함이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자갈밭에 앉아 한없이 넓어지는 물결을 바라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푸르러진다. 저녁 빛에 빛나는 얼굴 하나하나가 얼마나 곱고 예쁜지, 해가 진다. 다홍빛이 은은하게 호수 위로 색색의 물을 들인다, 수많은 빛들의 잔치가 여기에 있다.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작나무 타는 냄새-바나 싸우나
오후엔 호텔옆 건물에서 ‘바나’싸우나를 했다. 11명이 들어가는 바나실에 일행이 15명이라 함께 들어갔다. 우리네 찜질방과 비슷하지만 자리에 따라 온도가 다르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자 앉은 자리에 층을 두었다. 자작나무 장작에 불을 지펴 그 내음이 향기롭다. 바나실은 한쪽에 불이 붙은 숯 무덤이 있고 그 숯에 물을 끼얹어 증기로 싸우나를 하는거다.
싸우나 안에 있는 아궁이에 장작을 직접 떼서 물통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 물을 끼얹고 뜨거운 증기가 용솟음쳐 온통 나무 방을 뜨겁게 데워 버린다. 순식간에 땀이 쏟아져 내린다. 그러면 밖에 나와 찬물을 끼얹고 자작나주 잎으로 상대방의 몸을 두드려 준다. 안마도 되고 자작나무 향을 몸에 바르면, 땀구멍이 열릴 때마다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단다. 아! 바람처럼 몸이 가볍다. 그렇게 30분쯤 시시닥 거리다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밖엔 모기가 우굴우굴 하지만 지는 해를 따라 숲을 산책하기로 했다. 저녁놀 기득한 바이칼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바이칼 언저리엔 온갖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룬다. 한 종류씩만 꺽어도 손이 모자란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꽃은 자줏빛 무리지어 핀 패랭이꽃이다. 호텔의 객실에 꺽은 꽃들로 꺽꽂이를 해서 가득 채우고 디카로 사진을 찍어둔다.
밤 10시 10분 해가진다. 커다란 보름달이 천천히 바이칼 건너 호수로 내려앉는다.
조각배를 저으며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어부의 실루엣이 고즈넉하다. 어부는 꿈의 나라로 가는 신선같다.
7월의 보름달, 바이칼의 달이다. 어찌 이토록 아름답고 고운 밤을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크고 환한 달빛에 취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저 황홀한 달빛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새가 되어 만나지 않을까, 이 시간 나는 정결한 귀와 정결한 눈과 맑은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길-파노프 할아버지
앙가라를 따라 다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 강물은 호수처럼 넓고 둥글게 숲 사이를 휘돌아 흐르며 정감 있는 풍광을 만든다.
고뇌가 우리 몫이라는 여든 중반의 파노프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어느 전원 마을을 들어섰다. 조각가 할아버지는 스탈린 시대 반체제 작가였다. 그는 이곳으로 유형을 당했고, 풀려났을 때도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의 삶을 택했다.
집 앞에는 장승같은 나무 조각 몇 개가 문 앞을 지킨다. 초인종을 누르자 낡은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 한분이 나오셨다. 흰 수염, 흰 머리칼, 때묻은 작업복, 작달막하고, 강직한 얼굴의 그 분은 전혀 예술가답지 않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페치카를 손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마을 복판에 집이 있고, 집 뒤 텃밭의 온실에는 토마토,콩,당근,상추,딸기같은 채소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작업장은 온갖 도구와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고 벽에는 입다 걸어둔 옷들이 그의 생활을 말해 준다.
그림,조각,글을 쓰시는데 자신이 받은 핍박과 동료들의 희생,압제자들의 모습,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조각 작품 중에는 고뇌하는 여인상이 희망없는 눈으로 하늘을 향한 모습이 있는데, 그게 그의 조국 러시아라고 설명해 주셨다. 욕심없는 노작가는 여전히 꼿꼿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앙가라 강가에서 외줄타기 인생을 살며 조용히 노년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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