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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의 시적 의미
신 진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1. 황무지이자 생태의 보고
전쟁이란 적대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지를 완벽하게 이행하도록 강요하려는 폭력행위이다. 정치가 상대방을 제압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데 목표를 둔다면 혁명과 전쟁은 그것을 더욱 치열한 형태로 이행한다. 전쟁과 유사한 상황 중에 혁명이란 개념도 있다. 이는 물리력을 동반하는 사상적 이념적 투쟁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더 극단의 형태라 할 전쟁은 모든 이론적 대화를 숨긴 채 오로지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는 활동이다. 전쟁에서는 중립이란 범주가 완전히 소멸되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요 나쁜 놈이다. 모든 형태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는 사라지고 승리를 위한 문구로 정형화 되고 통일된다. 격식적 구호를 거역하는 방법은 죽음, 파멸밖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가들의 행태가 자당(自黨)의 승리만을 목표로 싸움을 일삼고 있는 현실은 그런 의미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각설하고, 한국전쟁이 남긴 비무장지대 155마일, 오늘에 와서도 이 휴화산의 비극성은 시각적 물리적인 데서 나아가 역사적 정신적인 유산으로 전래되고 있다. 화해지향의 중립적 태도와 창의적 회의주의 그리고 호혜적 상대주의는 사라지고, 아직도 민족 분단의 고착화만이 국가 안전을 담보하는 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맹목적 적대감. 전략적 명분론들이 정신적 황폐함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무장지대의 황무지성은 1953년 7월의 휴전 이후 남과 북을 관통하는 풍토병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북쪽은 북쪽대로 반미통일을 내세우며 전시나 다름없는 체제를 유지해 왔고, 남쪽은 남쪽대로 정권독점, 금력독점 기회독점의 기회주의자들이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면서, 중립적 입장은 기회주의로, 상대주의적 소신은 비능률 무소신으로, 편당 거부의 용기를 오히려 비겁이나 적과의 동침으로 몰아붙이는 살벌한 풍토병을 배양해 온 것이다.
기억하건대, 1980년대 한 때, 덕성여대 이반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미술 중심의 비무장지대 예술운동이 있었고, 그를 이어 비무장지대의 시적 의미를 찾고자 나선 문학인도 있었다. 분단의 비극, 분열, 통한, 불행, 부조리의 현실적 근원이 D.M.Z에 잠복해 있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통일과 평화의 미래를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면서 문덕수는 이반 교수의 ‘D. M. Z 작업전’의 감상이 준 충격을 시운동으로 이어받고자 하였다. 이에 임헌영 교수도 ‘비무장지대의 문학적 의미’란 글에서 비무장지대의 문학적 의미를 반전 평화사상과 쾌적한 생존을 위한 환경보호운동 둘로 요약하고 호응했다.
30년 전 한 때 월간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비무장지대 문학 특집이 다루어졌고 민족분단의 비극성과 그 극복을 향한 염원, 그리고 생태주의 지향의 시, 수필, 평론 등이 이어졌다.
비무장지대 문학 운동은 지금도 우리 시단을 향해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 시단의 진로에 당면한 성찰점과 새로운 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듯하다.
현실적으로 보아 D.M.Z는 가장 첨예한 무장이 지키는 비무장 지역이요, 최대의 민족적 비극의 장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한 뛰어 넘어야 할 장벽인 동시에 평화통일을 위한 기원을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면서 세계적 희귀 동식물이 자연 상태로 살고 있는 생태의 보고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래서 시학적으로는 침묵 속의 절규가 있고, 갖가지 탐욕과 이념의 충돌 장소이자 그 폐기를 향한 절박한 기원이 공존하는 는 역설의 장이다. 밀림이 있는 황무지요, 미래가 있는 과거인 것이다.
2. 적군과 아군, 삶과 죽음의 경계
상대방의 완전한 제거를 목표로 하는 전쟁 상황에서는 아군의 사기는 최대한 북돋우는 대신 적은 무조건 증오하게 한다. 적에 대한 상대주의적 인식이나 적개심에 대한 회의 따위는 용납될 수 없다. 절대 편향의 충성심이 고무, 찬양되고 적에 대한 냉혹한 살상이 영웅화된다. 호메로스시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비무장지대를 연 한국전쟁의 시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돌격의 신호가 오를 때/ 총아!/ 너는 네 몸이 불덩어리로 녹을 때까지 /원수들의 피를 마셔라 / 검아!/ 너는 네 몸이 은가루로 부서질 때까지/ 원수들의 살을 삼켜라
장호강 『총검부』에서
네, 원수의 총알에 쓰러지거든/ 흐르는 선혈이 地心 깊이 스며들게 하라/ 거치른 땅덩일 아름답게 물드리리니
조영암 『유언』에서
청청 우는 M1의/ 총소리는 깨끗한 것/ 모조리 아낌없이 버렸으므로
박목월 『총성』에서
이타심이랄까, 중용지심, 연민이나 죄악감 같은 것, 크게 말해서 사랑의 정신이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적은 원수로 규정된다. 적을 향한 총성은 높을수록 좋다. 적의 제거와 살상만이 나의 소임이다. 따라서 적을 무찌르다 흘리는 나의 피는 아름답다. 아니 우리 편의 것은 살상을 위한 총소리마저 깨끗하게 정신을 정화시킨다. 그것은 모든 욕망을 아낌없이 ‘버림’으로써 이르는 동양적 인격의 도로까지 미화되고 자위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본능이란 삶의 지향(Eros)과 죽음지향(Thanatos)이란 양면성을 갖는다.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을 당연시했던 한국전쟁의 상황은 오래동안 삶 지향 의식을 억압하고 죽음편향의식을 전염시켜왔다. 여기에서 타나토스 즉, 흔히 죽음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기도 하는, 유기체가 무기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 죽음본능의 황폐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금 우리 시의 근본 윤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여 생명과 삶의 에너지원이 되는 에로스, 사랑과 화해, 생산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 삶의 본능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 이야말로 비무장지대 황무지성이 주는 시적 과제가 아닌가 한다.
전쟁과 그 황폐함에 적극적으로 회의하고 이타적 상대주의와 생명의 존귀함을 재인식하기 시작한 시들이 창작되는 것은 휴전협정이 시작되고 비무장지대가 설정되면서부터였다.
조국아, 심청이마냥 불쌍하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이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의 백정들,
도마위에 오른 고기모양 너를 난도질하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 하다더냐
구상 『초토의 시-15, 휴전협상때』에서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신동집 『목숨』에서
겨누는 것은
분명히 적이라는데
적이 아니라
그것은 나다.
포탄은 날다가 터졌는데
적의 심장을 뚫었다는데
죽은 놈은
자빠진 놈도
그것은 나다.
안장현 『전쟁』에서
오곡이 제대로 익어 제대로 썩을지라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산골짝에서 호곡하며 풀잎으로 목숨 을 이으는 백성들
하늘이 계시하신 그 의로운 눈물 때문에 짐승과 같이 방황하여 오히려 욕되지 않는 것
이 악착한 생명을 깨닫는 자만이 죽음이란 진실로 삶을 위하여 존재함을 알리라.
조지훈 『전선의 書』에서
휴전협상이 진행과정을 보고, 구상은 전쟁에 대한 절망감을 드러낸다. 비로소 우리나라가 일찍이 어미를 여의고 소경아비와 함께 살다 제물로 바쳐진 소녀 심청이 같은 신세임을 각성하는 시를 쓴다. 한국전쟁이란 이념과 문명화를 빙자한 강대국들과 소수 권력집단의 이기적 탐욕이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목숨’이나 ‘전쟁’ ‘전선의 서’와 같은 시들은 전쟁에 관한 회의와 적개심에서 나아가 삶의 본능의 회복― 생명존중의 인간애와 근원적 공동체의식, 평화지향의식마저 일깨워 준다. 특히 ‘전선의 서’와 같은 시는 극한적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경탄과 존귀함을 자각하고 삶의 의지를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장의 상황, 죽음과 해체지향의 사회는 온갖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의 비호 아래 본래적 생명을 타락시키고 일상적 생존권을 박탈하기도 한다.
갈보족은 팔월 시궁창에 박테리아처럼 창궐하였고,
자칭 애국자는 구월 제상에 똥파리처럼 번성하였는데
얌생이란 신어는 양같은 사람의 상징어였던가
사바사바란 말은 公明을 표명하는 유행어였던가
김봉용 서사시 『靈曲Ⅱ-55장』에서
한국전쟁은 우리나라를 미국의 잉여 농산물 및 잉여 소비재의 처분적 원조지로 타락시켰고 우리의 토착중소기업과 농업의 자활적 진로를 저해하였으며 관료 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부의 편중을 가져왔다. 정신적으로는 피상적인 서구 향락문화가 범람하게 되고 재래적 전통과 관습은 매도되게 되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의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의 정신적 타락을 초래한 것이다. “특권층과 정상배는 동포야 죽건 살건/ 쥐새끼처럼 반지르르 마카오제나 뽑아 입고(영곡Ⅷ-153장)”, 거리로 내몰린 하층민은 몸과 마음을 다 팔고도 살길이 막막했다. 특권층은 너도나도 애국을 내세우고 공명사회, 공명선거를 내세우지만 그를 빌미로 제 잇속 채우기에나 급급했던 것이다. 이 시와 같은 격앙된 어조의 비판과 풍자도 무장화 한 사회, 죽음과 해체지향의 당대 문화에 대한 삶 지향 정신의 심각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시들은 비무장지대가 주는 시적 의미를 1950~60년대에 이미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던 셈이다.
비무장지대의 시학― 그것은 분단 극복의 시학이요, 비무장, 생명 존중의 시학이다. 온갖 헛된 탐욕으로부터의 탈출이요, 이기적 논리와 붕당의 명분과 독선적 획일주의로부터의 해방 의지에서 싹튼 것이라 할 것이다.
3. 무장의 해제와 생태적 삶
비무장지대는 제유적인 의미에서 통일의 상징이었다. 2차 대전 후에 지속된 강대국 간의 냉전기류와 국내의 정권 안보적 전략은 비무장지대가 허물어져야할 대상이라고만 선전했고 그것의 제거는 바로 전쟁을 의미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를 앞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민중들은 이래저래 기죽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1990년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국제적인 민주화 개방화가 가속화되면서 우리 남쪽의 민의도 열리게 되었다. 그 후, 때로 남북의 정권은 민의를 농락하고 비무장지대의 무장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데 서슴지 않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 2018년 한 해 동안 기적 같은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남북 정상이 친구처럼 가까운 악수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지금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국내 관계는 해빙기의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달뜬 상황에 있다.
이즈음, 여론은 다시 남북 교류가 활성화 된다 할지라도 비무장지대는 보존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 역설적 명제는 첫째, 남북의 통일은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어야 하는데 평화의 유지를 위해서는 비무장지대가 존속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고, 둘째, 더욱 중요한 이유는 비무장지대는 생태의 보고요, 모든 동식물의 해방구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된 환경오염과 생태파괴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고 시민적 환경보호운동이 일어나면서 휴전선 155마일, 남북 십 리의 폭, 6억 5천만 평 비무장지대의 풍요로운 자연생태는 이미 아이러니의 역사가 주는 감동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들은 이미 원시의 고향을 만나기도 한 바이다.
다음은 생태주의적 정신을 담은 시, 또는 심층적인 생태의식의 보기이다.
눈썹 위에 너울치는 밀림의 능선에는 바람과 비와 구름이 삶과 죽음과 선악을 주관한 먼 옛적의 질서가 부활하였다. ...........중략........... 숲속 나뭇가지에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진 구름 가운데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는 생명의 탄생, 날짐승이 따라 날고 춤추고, 꽃향기가 해일을 일으켜 닭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약속한다.
-, 구연식 『비무장지대의 신화』에서
임진강에 갔다가 황복회와 압록강 맑은 물에서 잡혀왔다는 빙어튀김을 먹게 되었다. 빙어, 말만 들어도 내장까지 훤히 비칠 듯한 손가락 크기의 빙어, 참 멀리도 왔구나......중략...... 식탁 위에는 어둠의 한 시절 묻어버리고 원시의 생명으로 부활한, 생명의 지상 낙원 비무장지대의 햇바람도 솔솔 불어온다.
-, 박혜숙 『은어와 황복에 대한 상징적 고찰』에서
구연식의 시는 단군신화와 김알지 설화를 바탕으로 민족적 시원에 접근하면서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떠난 이른바 공시공존적 절연(depaysment)의 방법론으로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발견하고자 한다. 비무장지대가 주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거부와 절망을 간접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박혜숙(서울)의 시는 북쪽에서 잡혀왔다는 빙어와 황복회를 먹으면서 비무장지대의 햇바람 같은 원시적 생명을 느낀다는 솔직한 감각의 시이다.
이 두 편은 상당부분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비무장지대를 주제로 하였지만 비무장지대가 주는 역사적, 현실적 비극은 시속에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점과 그곳에서 원시적 생명력을 만나는 원시주의적 인식과 경이로움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경험하지도 못한 비극적 경험에 대한 관습적 비애감을 자동적으로 답습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여전히 민족분단의 비극적 상황과 그 한(恨), 그리고 통일에의 의지와 염원을 주제로 하는 것도 분단문학, 또는 비무장지대의 의미를 실천하는 시로서 유효하다.
비켜설 수 없이 지뢰 묻힌 산야엔 초록만 무성하고
원귀란 원귀들 모여 이루지 못한 노래 가득하다.
여기는 대답이 없고 온갖 시간도 멎어버렸다
장전된 총구만이 정확한 조준상황이다.
최은하 『하나의 깃발 세울 날』에서
붉은 수수께끼의 나라
DMZ
불모의 천국을 누가 만들었나
송상욱 『DMZ』에서
비무장지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개울을 건너도 발이 젖지 않는다.
............ 중략 ...........
펑펑 웃는 사람들은
안으로는 꺼이꺼이 울고 있다.
이영일 『비무장지대에 태어난 사람들은』에서
마음은 뻗어 네게로 치닫고도
내밀히 장전된 쓸쓸한 무장의 심사여
여태 시이소를 타고 있구나
탁영완 『아카시아,비무장의 향기』에서
20여년 전에 비무장지대의 비극성을 읊은 시들이다. 60년 넘는 세월 계속되어 왔고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될 수 있는 시적 계기이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제제로 하는 분단시들에는 역설적 상상력이 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DMZ 그 자체가 외양과 내면의 역사적 모순인 까닭일 것이다.
인용한 시들에서도 무성한 초록과 장전된 총구, 불모의 천국, 개울을 건너도 발이 젖지 않는 실향민, 선의의 마음은 향하건만 내밀히 무장하는 등의 역설적 언어와 상황들이 두드러지게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적 징후는 통일을 향한 국민적 염원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방 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생태의 보고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 보존적 가치가 큰 비무장지대의 부조리한 정황 자체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4. 비무장의 삶, 담백한 언어
역시 비무장지대가 주는 시적 실천은 소위 생태시 또는 생명시와 분단극복의 시 등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겠다.
생태시는 오염현장 고발의 시, 산업문명 비판의 시, 현실적 자연생태 찬미의 시, 원시적 자연 갈망의 시 등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분단 극복의 시는 다시 전쟁과 분단의 비극성 고발의 시, 실향의 한과 그리움의 시, 남북 동질성 확인의 시, 가상적 통일 찬미의 시 등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의 황무지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역설적 정황에 대한 시학적 의미에서 볼 때, 그러한 세세한 분류는 별반 의의를 갖지 못한다. 그러한 분류는 자칫 생태시와 분단극복의 시를 합해놓은 기형적인 틀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고, 남자와 여자를 다시 그 성적 특성에 따라 분류해 들어갈 경우 결국 인간적 본질은 남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변별적 특징만이 남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비무장지대의 시학이란 생태 보호적 차원과 분단극복의 민족적 과제를 동시에 유기적인 통일체로 껴안는 데에 그 본령이 있는 것이지 그 둘의 단순한 합산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생명시의 중심이 된 시인 김지하가 갈망하는 바도 비무장지대의 시적 지향점에서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비무장지대 비극의 근본적 원인과 자연생태 보존의 의의를 생각할 때, 에로스적 인간의 순진한 삶의 회복이 그 통합적이고 본질적인 방향이 되는데, 그의 생명시는 그 지향점에 부응한다. 나아가 앞으로 비무장지대의 시학이 나아갈 중요한 방향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김지하의 생명시의 출발을 다시 보자. 그가 밝히듯 그의 시에서의 ‘애린’은 ‘죽고 새롭게 태어남’, 즉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이다.
부셔라
애린
끊어라 애린
탈출하라 바람부는 저 벌판으로
내 사랑하는 애린
한 떨기 들꽃으로 시뻘건 흙으로
살아나라
다시 살아나라
- 김지하, 『살림』에서
애린이란 여성적인 어감의 청자를 내세워, 본래의 아름다운 삶이 온갖 증오와 탐욕의 사슬을 끊고 해방되기를, 자유롭게 살아나는 본래적 삶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기원한다. 일견 언어가 단순해 보이는 것 자체가 그의 시적 체험의 진솔성과 비무장성의 한 증거이다.
사실 비무장지대의 시적 실천에 있어 정형적 구호나 방법론에 의존한다든지 수사적 기교에 연연할 경우 그 의의는 반감된다 할 수 있다. 구호성이나 기교가 심한 경우는 그 자체 반 생태적 무장(武裝)으로 판단될 수도 있고 스스로의 가식과 폭력성을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제재 상으로는 동떨어져 보이는 시일지라도 그 태도가 비무장을 실천하는 시들― 타고난 삶의 결을 그대로 옮겨 이 비속한 세상에 신선함을 부어주는 시도 더러 있음직한 터이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 『행복』 전문
천상병의 시가 때로는 어쭙잖아 보이기도 하지만 깊은 감명을 주기도 하는 것은 그가 언어표현에 남다른 재주가 있거나 순진을 가장한 아이러니를 잘 구사해서가 아니다. 그의 시의 힘은 무엇보다 순정 어린 삶, 시와 삶이 하나 되는 언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갖은 간난을 겪었지만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화해의 온기로 감쌀 줄 아는 그의 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일지라도 나와 너 상호간의 관계성 속에 편안하고 맑은 무명옷 같은 신선함과 함께 편안함을 준다.
자기 왜곡과 사실 호도의 무장(武裝)과 화려하기만 한 기능적 기교가 범람하는 오늘 이 땅의 시단에서 자아와 세계에 두루 경건하면서 소소하고 담백한 그의 언어가 독자에게 감동적인 문체적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어쩌면 비무장의 마음이 이루어내는, 당연한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무장의 시는 뼈를 깎는 내적 성찰과 삶에 대한 진정성을 전제로 하는, 맑고 따뜻한 시적 체험에서 우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D.M.Z의 시적 의미는 분해와 불화의 죽음지향성에 있지 않고, 본질적으로 상호 연동하는 삶과 사랑의 마음에 있다. 비무장의 시, 본연의 삶과 생명의 정신은 부질없는 논리와 이데올로기의 수족이 되었던 1950년 전쟁에 대한 반성이요, 모든 모략과 살상과 파괴에 대한 경종이다. 이기적 탐욕을 분칠하는 위장(僞裝)과 왜곡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 나와 너를 막론한 모든 물리적 정신적 무장을 해제하고 편파적 분석과 가식적 기교를 버리고 개별적 삶과 가치가 존중되는 동시에 상호공존의 공동체적 협동을 이루는 참삶의 회복을 염원하는 소소하고 담백한 정신이라 할 것이다.
부산시단 2019. 봄호
*오래 전 발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첫댓글 비무장지대 -불모의 천국 -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