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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위로자 하나님
2019. 4. 28(주일낮예배-마더스데이) 창세기 29:31-35
일본의 한 연구진이 모성애와 부성애에 대한 실험을 하였다. 바닥이 철판으로 된 철창 안에 어머니와 새끼 침팬지를 넣었다. 그리고 바닥을 뜨겁게 달구자 새끼 침팬지가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동동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 침팬지는 새끼 침팬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워서 발을 동동거렸다.
그 후 연구팀은 부성애도 실험하였다. 그래서 똑같은 철창 안에 아버지 침팬지와 새끼 침팬지를 넣고 바닥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끼 침팬지가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동동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닥에 앉아있던 아버지 침팬지도 바닥이 뜨거운지 일어났다. 그리고 발바닥이 뜨거워서 울고 있는 새끼 침팬지를 안았다. 그 후 아버지 침팬지는 새끼 침팬지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올라서 버렸다. 새끼 침팬지는 무겁고 뜨거워서 고함을 치지만 아버지 침팬지는 능청을 피우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본 연구진은 이 침팬지 실험을 통하여 부성애와 모성애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모성애는 실험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 2019년 4월 24일(수) 한 신문사에 27년 식물인간서 깨어난 여성 첫마디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91년 무니라 압둘라씨는 차를 타고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오는 트럭과 충돌하면서 압둘라씨는 코마상태에 빠졌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고 순간에 아들을 감싸 안았기 때문에 아들은 찰과상만 입었지만, 어머니인 압둘라씨는 머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그리고 무려 27년동안 압둘라씨는 영국과 독일에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래서 압둘라씨의 나이는 59살이 되었고, 4살이었던 아들 오르마는 31살의 청년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병원에서 보낸 압둘라씨가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렇게 코마상태에서 빠져나올 때 압둘라씨가 한 말 한마디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코마상태에서 나오는 압둘라씨가 무슨 말을 했겠는가? 오랫동안 누워있었기 때문에 허리가 아프다고 할 수도 있었고, 또 목이 마르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압둘라씨는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에 한 말은 오르마였다. 사고날 때 감싸 안았던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난 것이다. 그렇게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가족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감동하였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유지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을 통하여 가정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경제적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라, 모성애를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교회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사랑하고 헌신한 결과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 본다. 왜냐하면 헌신하고 희생하여 살아온 삶에 표창장이 주어지면 정말 좋겠는데 남는 것은 빈자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녀를 열심히 키웠더니 며느리의 남자가 되어져 있고, 남편 뒷바라지 열심히 있더니 회사의 역군이 되어서 모두 내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50대 전업주부 대부분이 빈둥지증후군으로 힘들어 하는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도 빈둥지증후군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는가? 이제 성경이야기를 좀 들어보시기 바란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임종을 앞에 둔 야곱은 자기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우리 말로 선산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선산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에서 우리는 레아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창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성경을 좀 아는 사람이 이 구절을 읽으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혀 있고, 또 야곱이 묻힐 그 선산에 레아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이 형님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여서 삼촌 라반의 집에 갔다. 그리고 야곱은 레아의 동생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7년을 열심히 일하였다. 그리고 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과 결혼식을 한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한 야곱은 밤에 침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기 옆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라헬인데, 레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고 화가 난 야곱은 삼촌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어찌하여 하면서 삼촌을 책망하였다. 그때 삼촌 라반은 언니 앞에 동생을 시집 보낼 수 없어서 레아를 침소에 보내었다고 말하면서 일주일이 지난 후에 라헬과도 결혼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레아는 일주일 동안 야곱과 신혼의 삶을 살았다.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야곱과 함께 일주일동안 신혼방에 있었던 레아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창세기 29장 17절을 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레아는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을 볼 때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쁘지 않은 주름이 크게 패여져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라헬은 곱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아가 길을 걸어가면 인상 좀 펴라는 말이 들렸을 것이고, 또 동생은 예쁜데 제는 왜 저래! 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야곱의 침소에 들어갔다가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는 신혼을 일주일 보낸 것이다.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었겠는가?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에 레아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러한 레아를 하나님이 보시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아의 태의 문을 열어서 아들을 낳게 해 주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을 낳았을 때 레아는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하였다. 보라 아들이라 이제 내가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는 기쁨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남편 야곱은 르우벤을 낳았지만,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 때 하나님은 또 아들을 주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시므온(듣다)이다. 하나님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나도 사랑받고 싶어요 하는 외침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야곱은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러한 레아에게 하나님은 또 태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연합하다는 의미의 레위이다. 이제 내가 아들을 3명이나 낳았으니 이제 남편의 사랑을 받겠지 하고 기대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남편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았다. 그때 레아는 넷째 아들의 이름을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라고 지었다. 레아는 진정한 행복은 내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그 행복을 구하는 나의 마음을 아시고 아들을 낳게 하여 주신 하나님이 감사해서 찬양을 올려 드린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 일어났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고 삶에 의미를 전혀 찾지 못했던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레아를 보고 있었고, 또 레아의 소리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간 그의 삶에 참된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레아가 가지는 이 행복과 만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레아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질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행복과 만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아는 레아가 조상의 묘에 묻힌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레아의 고백이 있는가? Act′s 29라는 연예인 찬양단이 있다. 그 찬양단의 공연을 시작하면서 노사연 집사님이 솔로를 하는데, 첫음을 잘못 잡았다. 그래서 불협화음으로 4음절이나 부른 것이다. 그러자 단원들을 물론이고, 방청석까지 당황하게 되었다. 그때 남편 이무송집사님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제 아내는 40년 노래하다보니 스피커에 노출되어 청력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직업병이지요.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이고, 보청기로 겨우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도 참 용감하지요? 저는 참 자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한 자도 쓰십니다.
그리고 이무송 집사님은 아내 노사연 집사가 첫음을 잡을 수 있도록 귀에 첫음을 크게 불러주었다. 그래서 정확한 음을 잡은 노사연 집사님은 손을 높이 들고 자신있게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노사연집사님이 이렇게 찬송을 부를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에서 전율이 일어났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사연집사님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함께 그 곁에서 힘이 되는 남편 이무송 집사님의 모습에 모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멋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남편을 잡아야 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이무송집사님같은 사람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집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이무송 노사연집사님과 같은 멋진 관계를 만들고 싶으면 남편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내 곁에서 나를 아시고 응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바란다. 그래서 내가 은혜 안에 만족할 때 내 삶이 달라지고, 그 변화된 삶에 남편의 마음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리겠는가? 한빛교회 부목사로 사역할 때 막내 여전도회에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설교하기 위하여 갔더니 그날은 야외모임이라고 한빛교회 앞에 있는 공원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원에 돗자리 깔고 설교를 하였다. 그때 제가 설교한 내용이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나? 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졸업하고, 또 직장생활 잘하고 있다가 결혼하여 아이 낳고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수유하고, 또 남편 아침 밥차려서 직장 보낸 후 집청소하고, 아기 씻기고, 아기 잘 때 잠깐 눈 좀 붙였다가 다시 저녁이 되어서 남편 저녁 준비하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 불쌍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속이 상한 것은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이다. 남편이 고맙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는 말한마디만 해주면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것같은데, 남편마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다.
제가 이런 내용으로 설교하니 사람들이 다니는 잔디밭 공원에서 그 젊은 엄마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엄마들에게 성경을 읽어주었다. 그 성경이 시편 139편인데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시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은 후에 남편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속상해 하는 아내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알고 있습니다 하고 설교했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던 젊은 엄마들의 입에서 아멘이 나왔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 오늘 너무 큰 위로와 용기를 받았다고 다 고마워 하였다.
이 젊은 엄마들이 어떻게 위로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도 이 위로와 용기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어서 내가 왜 이러고 살지! 하는 허무함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니 저는 보람차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는 자세로 힘차게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임재범이 부른 고해라는 노래가 있다.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조용히 나조차 나조차도 모르게 잊은 척 산다는 건 살아도 죽은 겁니다.
세상의 비난도 미쳐보일 모습도 모두 다 알지만 그게 두렵지만 사랑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그럼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을 알고 계신가요.
용서해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께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주소서.
이 고해를 나가수에서 박완규씨가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노래를 연습하던 박완규시가 임재범씨를 찾아가서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때 임재범씨는 힘을 다 빼고 불러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왜 고해를 부를 때는 힘을 다 빼야 하겠는가? 임재범씨는 이 노래를 만들 때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획사에 며칠만에 노래를 만들어 보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우울증이라 가만히 있어도 힘이 드는데, 노래까지 만들어야 하니 그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통 가운데 임재범씨는 2시간만에 이 곡을 썼다.
임재범씨기 이렇게 쉽게 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고통할 때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의 그녀는 임재범씨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었다. 그렇게 임재범씨는 내가 죄가 많다면 용서하여 주시고, 만약 벌을 하신다면 벌을 받겠지만, 하나님만은 제게 하나님만은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이것이 고해를 부를 때 힘을 빼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도 역시 힘을 빼야 하지 않겠는가? 내 필요와 욕심을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못삽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협박하는 자세가 아니라,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그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기 바란다. 그러면 나를 아시고, 또 나를 이해하여서 내 곁에 계신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이 그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그런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