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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주일설교
신자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마태복음 9:18~26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맞이할 죽음인데 아무도 죽음의 정체를 모르기에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흉기를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내어놓습니다. 의사가 죽을병이라고 진단하면 가진 것을 다 줄 테니 좀 살려달라고 사정합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이 뭔지 모르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을 해결해 주셨는데 여전히 죽음이 어떤 놈인지 잘 몰라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신자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어떻게 다를까요? 신자에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신자가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벌벌 떠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정복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죽음의 정체를 알고 죽음을 이기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은 세 번입니다. 왜 세 번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세 명밖에 못 살리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만난 것이 세 번뿐이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린 것은 중요한 교훈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을 때 한 관리가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그 관리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야이로는 자기 딸이 방금 죽었는데 와서 손을 얹어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는데 마태는 방금 죽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의술로 볼 때 야이로의 딸은 죽을 것이 확실했습니다. 죽어가고 있든지 죽었든지 예수님이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살아날 것이라고 야이로는 믿었습니다.
그 부탁을 받고 예수님이 야이로를 따라가셨는데 도중에 사건이 생겼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에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하혈 증세인데 그 자체도 괴로운 문제이지만 당시에 하혈하는 사람은 부정하게 취급했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 때문에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재산은 다 허비하였으나 증세가 더 심해졌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어느 날 어떤 병이든지 다 치료하시는 예수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어서 예수님께 당당히 나갈 수는 없고 몰래 가까이에 가서 예수님 옷에 붙어 있는 옷 술(히브리어 찌찌트)만 만지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찌찌트는 그 사람의 명예와 영광, 능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여인은 군중 속에 숨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손을 뻗어 예수님의 찌찌트를 만지는 데 성공했고 그 순간 자기의 혈루증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옷을 만진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혈루증도 나았고 영적으로도 구원받았습니다.
도중에 이런 사건이 벌어져서 시간이 지체되자 예수님이 빨리 가셔서 자기 딸을 고쳐주기를 바라는 야이로는 얼마나 마음이 탔을까요? 하지만 이 사건은 야이로에게 더욱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찌찌트만 만져서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12년 동안 잘 자라다가 방금 죽은 딸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더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마디는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남기고 아이의 부모 외에는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탈리다 쿰(Ταλιθα κουμ 소녀야, 일어나라). 그러자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살아난 이 소녀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이가 많아서 다시 죽었을까요? 안 죽었을까요?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을 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다른 두 사람, 베다니의 나사로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도 할아버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그 모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다시 죽을 것이라면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은 우리는 무슨 교훈을 주십니까? 죽음이란 무엇이며 신자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첫째,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 5:12)“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원죄 때문에 반드시 죽습니다. 또 우리는 누구나 자범죄 때문에 죽습니다. 죄는 나쁜 짓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식물의 뿌리를 자르면 말라 죽고 가전제품의 전원을 뽑으면 작동을 멈춥니다. 스마트폰은 금방 죽지는 않고 배터리가 방전되면 결국 죽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누구나 다 죽습니다. 이처럼 죄란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입니다."
둘째, 죽음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세상살이가 죽을 만큼 힘듭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힘듭니다. 전 세계에는 굶지 않고 먹을 수만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보리고개 때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쌀이 흔한 것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나라 사람은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배 불리 먹어도 행복하지 않고 따뜻하게 입어도 만족함이 없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최고급 자가용을 가지고 고속도로를 달려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강 건너에 지나가는 완행열차를 보며 한번 타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다녀와도 그거 별거 아닙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가 있지요. 지난 주간에 TV조선에 제 얼굴이 나왔지만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죽을 운명의 인생은 배불리 먹어도 불행합니다. 대학 졸업해도, 결혼해도, 자식이 태어나도, 돈을 벌어 자가용을 사고 집을 사도,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지옥같이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불행입니다.
셋째, 죽음은 자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의 정체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다시 깰 수 있는 잠이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소녀가 죽었는데 예수님은 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잔다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지금 그 소녀를 깨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는 딸을 깨우듯이 부드럽게 말씀하였습니다. 탈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지 나흘째 되어 시신이 썩고 있는 나사로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어릴 적 학교에 갈 때 친구 집 앞에서 친구를 부르면 친구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자는 친구를 부르듯이 불렀습니다.
죽음을 영면(永眠)이라고 합니다. 원래 죽음은 깨울 수 없는 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면을 깨울 수 있는 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살려주신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다시 죽을 텐데 살려주신 것은 사람들이 너무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와 나인성 과부와 마리아가 너무 슬퍼하자 그들을 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질병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예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을 언제나 치료해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신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죽음을 해결하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면(永眠)을 깨울 수 있는 잠으로 바꾸어 버리신 예수님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믿는 사람의 잠을 영원히 깨우실 것입니다. 다시는 아프지 않고 죽지 않을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어 주셨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병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1) 의사의 도움을 받아 치료받으면서 기도하세요. 치료받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주님이 도와 주십니다.
2) 아프지 않도록 생활습관을 바꾸세요. 입력값이 같으면 결과값도 같습니다. 우리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고 성령을 모신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성전이 퇴락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성전관리인입니다.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고쳐서 아프지 않게 노력하세요.
3) 천국을 사모하며 감사하세요.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사람은 아프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는 다시 아프지 않을 그 나라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대신 고통 받으시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죽음은 하나님과 끊어짐입니다.
죽음은 불행이고 죽음은 지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도의 죽음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영면(永眠)이 아니라 깨울 수 있는 잠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잠자는 성도를 깨울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해서 보여주시려고 예수님은 사람을 깨웠습니다.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깨웠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다시 죽게 되었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깨우실 것입니다. 원래 죽음은 누구도 깨울 수 없는 영면(永眠)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를 깨워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그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어떤 분은 두 번도 잡니다. 하지만 자려고 누우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자의 죽음을 잠으로 바꾸셨습니다. 자는 신자를 예수님이 깨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로서 어떤 사람도, 세력도, 환경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https://youtu.be/RBrplS3Qs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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