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강 유대교 율법에 대한 경고 1. (갈라디아 5:1-6)
1.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원문을 직역하면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하셨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유”(ἐλευθερίᾳ, 엘류테리아)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위해서 자유롭게 했다”고 하니, 여기서 자유는 그 “목적지”인 동시에 “결과”입니다. 그래서 위의 내용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를 향하도록 자유롭게 만드셨다.”입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자기 가문의 독일식 이름인 Luder를 Luther로 바꾸어서 학적부에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luther라는 단어가 elutheria(자유) 라는 단어 속에서 끄집어 낸 것입니다. 루터는 그렇게 자유를 갈망했고, 갈라디아서를 사랑하는 종교개혁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라고 말하면 어떤 규칙이나 규정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리는 자유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유를 누리려고 하면,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란 “함께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는 나만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평화의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평화도 “함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 5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어떤 것이지 알려줍니다. 보통 자유의 반대말은 속박이고, 자유인의 반대는 노예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한 사람들의 자유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어떻게 무엇엔가 사로잡힌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계속 맨 상태로 머물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라는 말 속에서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의 멍에를 누가 강제로 씌워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쓰고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유인인지 아니면 종노릇하는 사람인지 참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인 같은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무엇엔가 홀려서 자기도 모른 채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예수가 목숨을 바쳐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여 자유를 주었는데, 갈라디아교인들이 다시 율법의 종노릇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율법을 선택한다고 하겠지만, 그것 역시 자유를 버리는 역설적인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2.할례와 성령(5:2-6)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가지고, 동시에 유대인 이었던 예수가 받아들인 율법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바울의 주장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요? 바울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율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내용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니면 안 된다는 “율법주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인데, 다시 율법을 택한다면,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봅시다. 지금 바울은 할례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할례는 본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외적 표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는 율법준수 전체를 상징하는 표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표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할례라는 외적 표징이 담고 있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유대교 율법주의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분입니다. 예수는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되살려낸 분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몇 가지 규정들을 들고 나와서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들은 구약 성경이 나와 있는 다른 규정들은 마음대로 어기고 삽니다. 선택적인 규정준수를 하면서 율법을 들이대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투쟁하고 있는 것은 유대교 율법 아래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의 본정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할례를 통하여 유대인이 되면, 그는 이제부터 율법문자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기록된 모든 규정을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야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었는데, 다시 율법의 노예가 되려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더 강하게 말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진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그런 사람은 은혜로부터도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바라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대신 성령의 힘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5절) 여기서 종교개혁자 루터의 <칭의 사상>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게 되는데, 이것이 성령의 사역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칭의 사상>입니다.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일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중요한데, 그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인간인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왔고, 기도와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하였는데, 그런 나의 역할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냐?”는 질문입니다. “누가 보기에도 다른 사람 보다 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그런 삶이 구원 받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느냐?”는 절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열심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 맞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내 깊은 저 속마음에서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바라고 살았을까요? 나는 정말 한 치의 흠도 없이 깨끗하게만 살았을까요?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마침표를 인간인 내가 찍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찍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약속을 믿는 것이고,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에 대한 부가적 설명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무할례는 외적 차이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속에서, 바울의 진의가 드러납니다. 겉보기만 가지고 깊은 속까지 다 들여다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through love working)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동의 이면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바로 그런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보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게 되며, 사랑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믿음은 효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된다.” 믿음과 사랑은 다른 단어이지만, 서로 분리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through love working)이라는 말의 해설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아가페(agape, ἀγάπη)라는 사랑의 옷을 입고 역사(working, ἐνεργουμένη)합니다. “역사한다”는 말은 에네르게오(energeo, ἐνεργέω)인데, 에너지입니다. 힘을 내는 것이지요. 효력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란 반드시 신적인 신실한 사랑을 바탕에 두고 있어야 세상에 힘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실한 사랑이 세상에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사랑은 모두가 우리 속에 은혜로 심어주신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과 행동이 내 속의 믿음이 요구하는 신실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방해만 하지 않으면 참 좋겠습니다.
2024년 10월 20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