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국씨의 삼둥이들—대한 민국 만세—이 세 살 무렵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여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녀석들이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며칠 전 다시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을 듬뿍 받고 자란 녀석들은 밝고 착해 보이며, 거침없고 똑똑한, 거의 청년 티가 나는 모습으로 자라 있었다. 대한이와 민국이, 만세의 키는 각각 173cm, 175cm, 172㎝이고, 발 사이즈는 모두 280㎜라고 한다. 순간 나 자신의 6학년 때 신체적 모습이나 정서적 상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이미 인생의 슬픔과 걱정, 불안에 짓눌려 찌들었었다. 나아가 삼둥이들의 모습이 그 나이 때 내 딸아이 모습과도 비교가 되었다. 나는 딸아이를 삼둥이들처럼 밝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애의 마음에 그늘을 주었다. 후회와 미안한 생각이 밀려든다.
1994년쯤이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주말에 우리는 종종 롱아일랜드 비치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바비큐도 하곤 했는데, 퀸즈에서 약 40-50분 정도 고속도로를 운전해 가면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에 선큰 메도우 파크(Sunken Meadow Park)와 비치가 있어서 거길 가곤했다. 백사장도 훌륭하고 물도 비교적 깨끗하며 샤워 부스등 부대시설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선큰 메도우 비치는 주립 비치여서 거기엔 뉴욕시에 사는 오둥이잡둥이 인종과 민족들이 찾아와 해수욕을 즐긴다. 그중에서도 인도 여인들이 얇은 천의 원피스에 바지를 희한하게 겹쳐 입은 듯한, 그러면서도 배꼽 주위 배를 드러낸 전통의상을 입고 와서 그대로 바닷물 속에 들어가 노는 모습은 좀 낯설었다. 나는 빼빼 마른 빈약한 몸매의 동양인 주제에 수영 빤쓰를 입고 약간 주눅이 들어 수영을 했다. 내 아이와 아내도 수영복 차림으로 모래 놀이를 하거나 물속에 몸을 담그는 정도의 과감함을 보였다. 거듭 같은 비치에서 노는 데 다소 뉘가 날 무렵 나는 어느 주말에 약간의 모험심이 발동하여, 롱아일랜드에는 다른 비치들이 많이 있으니 다른 곳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해안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여기저기 크기는 다소 작지만 백사장과 바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비치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공공(public) 비치가 아닌 사유(private) 비치이다. 그런데 그중에 규모도 크고 깨끗하고 한가한—군데군데 백인 가족들 몇몇만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멋진 비치가 있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안내 간판이나 주차장을 찾아보았으나 별 표지판이 없었다. 쭈뼛쭈뼛하다가 용기를 내어 도로변에 차를 세워 둔 채 돗자리를 들고 들어가 펼치려다가 그래도 어딘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다시 차 다니는 도로로 나왔더니, 때마침 경찰차가 서서히 운행하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나는 손짓하여 경찰차를 멈춰 세우고 거기에서 내가 머물러도 되는지 물었다. “This is not a private beach, but all the parking area is private.”가 경찰의 대답이었다. 둘러보니 도로 뒤편 언덕 쪽에 부유해 보이는 마을이 자라잡고 있었다. 급창피가 나를 덮쳤고 마음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나는 서둘러 아내와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그곳을 빠져나와 선큰 메도우를 향해 차를 몰았다. 20여분을 달려 우리는 선큰 메도우 비치 부근에 이르렀다. Sunken Meadow는 “가라앉은 초원”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그곳 백사장과 해수욕장이 낮은 지형이어서 차를 몰고 그곳에 접근하다 보면 도로의 약간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둥이잡둥이들이 북적대는 그 공공 비치가 우리 시야에 들어오자 뒷좌석에 말없이 앉아 있던 딸아이가 영어로 혼잣말을 했다. “Ah! Now I feel comfortable!”
나는 딸아이를 송일국씨의 삼둥이들처럼 그렇게 밝고 거칠 것 없고, 당당하고 구김살 없이 기르지 못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아니 그 전부터 이미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마치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듯 조심조심 생활해야 했다. 그 애의 마음에 그늘이 생겼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부분 아이들은 왕자와 공주처럼 길러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이웃한 ‘양지초등학교’ 슬로건이 “착하게 슬기롭게 멋스럽게”이고, 그 문구가 학교 본관 이마에 큼직한 글자로 새겨져 있다. 등하교 하는 아이들을 보면 거의 다 ‘양지처럼’ 그늘이 없고 멋스럽다. 그리고 때때로 체험학습이라는 명분으로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지 않고, 주구장창 학교에만 나오는 아이는 ‘개근거지’라고 놀림을 받는단다. 공간적으로 상전벽해를, 시간적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첫댓글 따님 어린 시절이 삽화처럼 그려졌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