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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시는 선물 / 시 113:1-9, 요 14:23-31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후세를 위하여, 이 세상을 위하여 훌륭한 유산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오늘 우리는 모두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위대한 유산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유한한 생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이 언젠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존재임을 생각하게 될 때 무엇을 이 세상에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연세대에 가보면 언더우드 동산이 세워져 있고, 고려대에는 인촌 김성수의 동상이 있다. 한신대는 사람의 호를 건물의 이름으로 붙였다. 김재준 목사님의 호를 따라 장공도서관, 조선신학교를 설립한 김대현 장로의 호를 따라 필헌관. 송창근 박사의 호를 따라 만우관이라 부르고 있다. 어떤 학교는 현관 벽면에 설립자, 훌륭한 학장이나 총장들의 흉상이 걸려있다. 이 경우 그들이 학교를 위하여 남보다 뛰어난 헌신을 했거나 봉사를 했을 때 그 업적이나 공헌을 기념하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다. 또는 거액의 기부금을 낸 사람의 이름을 따기도 한다. 그들은 그들이 번 큰 자산을 교육을 위해 바쳤기 때문에 그들의 갸륵한 뜻을 두고두고 기억하자는 것이다. 각 학교에 있는 수십 종의 장학금에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어떤 교회들은 건물에도 사람이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의자마다 사람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그 의자를 헌물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것들도 역시 그 사람의 뜻을 기리자는 의미가 있겠지만 이름을 붙여주므로 교인들의 관심을 유발하자는 의도이다. 이는 기독교의 헌금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위대한 산업을 일으킨 사업가, 기업인, 과학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 불후의 명작을 유산으로 남긴 예술가, 문학가, 음악가들이 있다. 위대한 사상을 남긴 사상가, 학자, 종교인도 있다. 여러분은 어떤 유산을 남긴 사람들을 알고 있나? 여러분 자신은 어떤 유산을 남기려고 생각하고 있나? 이 사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가까이는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서, 또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생각하나?
이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셨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유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그런 것들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인데 특히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담고 있다. ‘내가 잠시동안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떠난다. 그러나 너희들을 고아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이제 내가 떠나가면 너희들에게 나 대신 보혜사를 보내겠다. 그가 너희들과 영원히 같이 계실 것이다. 그가 곧 성령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평화를 유산으로 남긴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가 지난 주 야외예배에서 읽었던 본문을 함께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떠나실 때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남기신 것은 세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이다. 둘째, 셋째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보혜사(협조자)를 보내 주신다는 것과 평화를 남겨주신다는 것이다.
먼저 지난 주에 말씀드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드리겠다.
지난 주에는 준비한 설교의 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 시간에 좀 더 보충해서 말씀드리겠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출발은 교회에 출석하는 날이 아니고, 우리가 세례받은 날도 아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출발은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고 거듭나는 날부터이다. 거듭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녀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은 없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다해도 그 자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체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 설교자 무디가 한 유명한 얘기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손자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들만 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처음간 꼬마가 어머니의 흉내를 낸다고 ‘하나님, 외할아버지’라고 부르니 그 엄마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해야 한다니까 ‘엄마에게 아버지면 나에게는 외할아버지지’라고 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을 통해서만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개개인이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거듭나게 되면 우리는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된다. 교회생활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경험이다. 이제부터 신앙성장은 어떠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자라느냐에 달려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또 어떤 것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우리들의 신앙 모습이 결정된다. 거듭난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안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기치는 것이 가정이다, 가정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가정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가 그 아이의 성장 방향을 결정한다. 특히 그 가정의 인간관계, 가족들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돈독한가가 아이의 인격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난 뒤 처음 다니는 교회의 분위기가 개인의 신앙성장에 기초가 된다. 신앙을 갖게 된 뒤 최초로 경험한 교회 공동체의 환경, 교인들간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이냐가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신앙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환경을 제공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성경이 가장 큰 소리로 강조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 속에 사랑의 명령이 있다. 이 말씀 속에 사랑의 모본이 있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를 가르치는 사랑의 소명이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은 사랑의 명령이다. 여러분은 사랑이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마 ‘사랑을 명령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랑을 명령하셨다. 사랑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의모본을 찾을 수 있다. 요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신 다음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섬김이었다. 한 영혼을 향해서 주님이 하셨던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줄 때 기독교의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떠나는 대신에 보내주신다는 보혜사(협조자)란 누구인가?
보혜사(협조자)란 말은 본래 도움이나 조언, 특히 변호를 위해 불러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잇는 말로서, 협조자, 위로자, 변호자, 조언자, 대언자, 대표자, 중재자 등을 의미한다. 위로자라고 하기보다 변호자라는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변호자란 고소를 당해서 법정 같은 데에 서게 되거나, 비방이나 공격을 당할 때 변호사와 같이 도와주는 분을 의미한다. 이 협조자나 변호자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간 후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계실 분인데, 이 분이 곧 성령이시고, 이 성령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일과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일을 주로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협조자로, 옹호자, 변호자로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셋째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유산은 평화이다.
새 계명과 협조자를 보내신다는 약속과 함께 마지막 유산으로 평화를 남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은혜로운 큰 위로의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서로 헤어질 때 인사는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빈다’는 뜻으로 ‘샬롬’이라고 했다. 이 말은 본래 기도인 동시에 축복의 말이었다. 이 ‘샬롬’이란 인사는 우리들의 인사인 ‘안녕하세요, 평안하시지요?’라는 인사하고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우리나라의 역사나 비슷하게 고난의 역사,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아온 역사이다. 또한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백성들이다. 그러기에 만나면 그동안 억압없이, 수탈없이 잘있었느냐는 의미로 샬롬이나 안녕히 계셨느냐라고 인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인사로 쓰는 이 샬롬을 ‘나의 샬롬을 너의들에게 주고 간다’라고 하여 보통 인사의 의미를 넘어서서 특별한 의미로 전환시켰다. 예수님이 왜 많은 것들 중에 하필 이 평화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셨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한가지를 유산으로 받고 싶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나?
왜 하필 예수님이 평화를 유산으로 남기셨는가 하고 의문시 되는 이유는, 이 평화의 의미에 대하여 일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평화라고 할 때 보통 전쟁이나 전쟁의 위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의미의 평화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 세상의 평화’이다. 치안질서란 관점에서의 평화, 곧 정치적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평화일 뿐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인 샬롬은 물론 그 이상을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성서가 말하는 평화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평화는 구원의 적극적인 말이다. 그것은 행운과 축복, 완전함, 완전한 기쁨, 치유, 번영, 자유와 정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 즐거워하고 웃고 환희하며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속에서 춤추는 충만한 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화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 예수님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평화가 총체적 평화로서 더 이상 소원할 것이 없는, 더 아쉬운 것이 없는 축복, 은총, 기쁨, 희열, 충만, 완전, 구원을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상의 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의 평화는 피동적 의미의 평화, 소극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구원과 해방의 평화인 것이다. 또 한가지 강조하는 것은 이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가 보내신 협조자, 변호자인 성령이 지속시키고 강화하심으로 가능한 평화라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말할 때 특히 세가지를 분명히 의식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누구의 평화를 우리가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말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의 평화를 말하는가? 둘째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그리스도의 평화는 누구의 이득을 위한 평화인가? 제국주의나 지배자들을 위한 평화, 어느 계층만을 위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평화란 점이 강조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셋째는 어떤 의미와 내용의 평화를 말하는가?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을 제외시키는 순수한 정신적 평화나 개인적 평화, 영적 평화, 내세적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 이 평화가 있나? 이 평화가 없는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평화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하여 예언자들처럼 담대히 외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몇마디만 말씀을 드리겠다. 옛말에 효자의 집안에 위인이 난다고 했다. 옛 중국에서는 효자의 가정이 가난하게 살면 그 고을 원님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십계명 중 제5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효(孝)라는 글자는 두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윗부분은 노인이요, 아랫부분은 자식이다. 자식이 노인을 업고 가는 것을 효라고 보았다. 업고 가자면 아들과 노인의 피부가 닿을 것이다. 효라는 것은 피부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 부모님을 따로 사시게 하고 생활비나 용돈을 드린다면 진정한 이미의 효라고 할 수 없다. 효도란 아들이 보고 싶을 때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이요,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매일 잠자리를 봐드리고 매일 대화의 상대가 되어드리는 것이 효도인데, 요즘 사람들은 효도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이 탈이다. 이번 어버이주일을 계기로 늙으신 부모님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것이 매우 좋은 효도의 방법임을 알고 힌번쯤 실행해 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