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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은혜 / 전 2:18-26, 마 20:1-16
본문은 예수님이 어느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 사이에 생긴일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9월 하순경이면 유대지방에서는 포도를 수확하는 일로 무척 바쁘다. 10월에 시작되는 비오는 시기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일을 서둘러야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포도원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하루 이틀간 일할 사람들을 많이 고용한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일꾼을 구한다. 그는 장터에서 만난 일꾼들에게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12시간 일하면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데려왔다. 몇시간 뒤에 일꾼이 더 필요해서 장터에 나가 다시 사람을 구했다. 그는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거리에 나가 사람을 더 고용했다. 그리고 일이 거의 끝나가는 오후 5시에 다시 장터에 나가 빈둥대고 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예,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불과 한시간이면 그날 하루 일이 끝나는 줄 알면서도 그들을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 일을 시켰다.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났을 때 그는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군에게 한 데나리온 씩을 주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시간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12시간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똑같은 액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인에게 기분 나쁘다고 항의를 한다. 나중에 온 사람은 한시간만 일했는데 더위 속에서 하루종일 일한 자기들과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때 주인은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그대로 실천하였는데 네가 무슨 이유로 항의하느냐?’라고 하면서 ‘나중에 온 사람에게 똑같이 주든말든 내 뜻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하면서 책망을 한다. 이 비유는 다른 어느 비유보다 대단히 깊은 교훈을 가졌다. 물론 예수님에게 늘 도전해 오던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또는 서기관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책망하기 위한 저의가 있는 비유이지만,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이 비유가 가진 교훈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시기심은 불행을 낳는다.
그들의 불평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과 같은 노동법 아래서는 납득이 잘 안가는 처사였다. 일한만큼 주고 받는 것이 세상의 법이다. 1시간 일한 사람이 12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불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주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처음에 계약할 때 약속한 품삯을 주었기 때문에 하등 불평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 왜 불평이 생겼을까? 그들이 다른 사람의 품삯을 보았을 때 문제가 생겼다. 곧 자기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우리는 시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종일 죽도록 일을 하여 약속했던대로 품삯을 받았지만, 불만과 미움이 가득해서 집으로 돌아간 그 일꾼들은 퍽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기심은 대단히 보편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성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베이컨은 ‘시기심은 공휴일도 없다’라고 했다. 시기심은 항상 우리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 이 시기심이 있기 마련이어서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고 말한다. 가장 무섭고 잔인하고 강한 마음이 이 시기심이라는 말이다.
어느 광야의 늙은 수도승이 성자처럼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 수도승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려고 온갖 술책을 다 썼다. 여자도 보내보고, 돈으로도 유혹해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귀는 마지막 수법을 시도했다. 마귀는 수도승의 귀에다 대고 말한다, ‘당신의 동생이 지금 감독으로 피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러자 그 수도승 얼굴색이 금방 달라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남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 시기심이 떠나지 않는다. 이 시기심은 우리들 자신의 정신에 많은 피해를 준다. 우선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게 만든다. 기대가 적을수록 실망도 적다는 서양의 격언처럼 남과 비교를 안할수록 불만도 적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기심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또 하나 시기심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파괴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는 시기하는 대상을 죽이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곧 시기심은 미움을 가져오고 그 미움이 결국에 가서는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아담의 아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의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았다. 그것을 본 가인의 마음 속에는 시기심이 불일 듯 했다. 그는 동생을 미워했으며, 결국 돌로 때려죽이는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극이 바로 이 시기심의 발로였다. 이 시기심이 가져오는 가장 큰 병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는 생활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일한 일꾼들은 일할 기회를 준데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많은 원망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시기심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모르게 된다. 시기심은 받은 은사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없는 것만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게 한다. 기쁨을 잃은 채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12시간 일한 일꾼들은 결국 시기심 때문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서 공연히 죄없는 짐승들을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유없이 아내에게 트집이나 잡고 자녀들에게도 난폭하게 굴었을 것이다. 홧김에 술이나 잔뜩 마시고 하루 품삯을 다 탕진한채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잠을 잤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시기심이란 이처럼 무섭다. 그러므로 비교하거나 경쟁하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2.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자리가 없어서 서성대는 실업자들을 찾아주시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실업자의 아픔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자리를 제공받을 만한 자격도 노력도 기술도 건강도 없는 사회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일터로 불러주신 것이다. 이 주인의 너그러움을 보면서 인간들에게 일할 권리를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본다.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우리 인간을 그래도 귀하게 여겨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전 1:27-2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적으로 볼 때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으며 멀리서 방황만 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의 자녀로 택해주셨을 뿐만아니라 왕같은 제사장들로, 거룩한 나라로, 당신의 소유가 된 백성들로 삼아주셨다.
유명한 설솔교가인 왓슨은 이 하나님의 비합리적인 사랑을 어느 어린 소녀가 가진 누더기 인형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완전히 다 헤져서 누더기인지 인형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인형을 가진 소녀가 끔찍하게 사랑하듯이, 어떤 것들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사랑하지만, 어떤 것들은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게 된다고 왓슨 목사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 떨어진 누더기 인형들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존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아무도 불러주거나 찾아주거나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 길거리에서 헤매던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아낌받는 일꾼들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과분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비유가 말해주는 또 하나의 깊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품삯을 계산할 때 보여준 이해심이다. 한 데나리온은 네 식구가 겨우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1/12데나리온만 준다면 한 가족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너무나 적은 액수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 딱한 사정을 아시고 기대 이상으로 후한 돈을 지불해 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지극히 작은 일까지도 자상히 아시고, 생각하시고, 염려하시고, 돌보시고 해결해 주신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시니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시대에 존 브랜츠라는 마틴 루터의 친구가 있었다. 찰스 5세는 그를 죽일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스페인 기병대가 그를 체포하려고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브랜츠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그가 응답을 받았는데, 빵 한조각을 들고 윗마을에 가면 대문이 열려있는 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그 집으로 들어가 바로 지붕 밑바닥에 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급히 서둘러서 계시하시는 대로 하였다. 14일 간이나 브랜츠는 숨어 있었다. 그동안 군인들은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14일 동안 한조각의 빵으로 부족한 것을 아신 하나님이 특별한 도움을 주셨다. 그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한 마리의 암탉이 다락에 올라와 알을 까 놓고는 울지도 않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15일째 되는 날, 닭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이상히 여기며 내려와 보니 그날 아침 이미 군인들이 다 철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머릿속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관념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일에 실제로 간섭하시고 돌봐주시는 사랑이 지극하신 하나님이다.
3.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12시간 일한 사람들이 받은 보수는 일한 댓가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댓가를 받기 위하여 그 댓가만을 생각하고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시간 일한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던 뜻밖의 대가를 더 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며 자기들이 일한 공로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게 된다고 믿는 백성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수를 그렇게 감사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기들이 쌓은 공적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을 이 비유에서 볼 수 있다. 첫째 그룹인 12시간 일한 사람들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계약을 지켜야 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보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12시간 채워 그 댓가를 받는 것 뿐이었다. 이런 관계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더디 가게 마련이다. 지루하고 짜증이 난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이 진부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억지로 율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결국 겉으로만 지키는 척하는 위선자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그들은 구원을 목적으로 율법을 지키느 계약민족이었다. 그런 신앙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일을 열심히 하고 철야기도를 많이 해야만 많은 축복을 받고 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강사는 부흥회 때 이런 말을 한다. 집회에 나올 때는 반드시 봉투에 많은 헌금을 가져오십시오. 내일 저녁에 특별 축복기도를 해줄 것인데, 헌금을 많이 가져와야 하나님이 많은 축북을 주신다. 이삭도 야곱에게 축복을 주기 전에 별미음식을 받았다. 하나님께 그렇게 별미 특별헌금을 바쳐야 축복을 받는다. 이는 참으로 망령된 소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길거리의 장사치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돈이나 받고 상품을 내주는 그런 비천한 분으로 만드는 처사이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천천만만의 양이나 소나 재물이 필요없는 분이다. 이런 기복신앙이 한국교회 교인들을 무속화시키고 바알종교를 믿었던 원시 종교인들처럼 만들고 있다. 기독교를 사회정의나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것과는 아예 상관이 없는 미신종교로 전락시킨 것이다. 본 회퍼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천박하고 값싼 은혜이다.
한시간만 일한 사람은 아마 12시간 일한 사람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같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 것이 너무 고마워 열심히 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의외로 분에 넘치는 상급을 받았다. 그들은 그것을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수라면 1/12데나리온만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이 거저주는 은혜였다. 우리의 생은 그렇게 흥에 넘치는 감격스러운 생이어야 한다.
한 부자 유대인이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유난히도 자녀들이 문병을 오는 것을 본 옆에 있던 환자가 물었다. ‘당신은 참으로 효성심이 많은 자녀들을 두었군요?’ 그러자 그 노인은 금방 정색을 하며 ‘천만에요, 효성이라니요. 제 저금통장을 보고 그러는 것이지요’ 하더랍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큰 기대 속에 이기적으로 주님을 믿는다. 돈에 상관없이 유산에 아무 관심없이 부모님을 받들고 잘 섬기는 것이 참 효도이다.
이 비유가 주려는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하나님의 구원은 아무 공로가 없는 우리들에게 그냥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길고 짧음에 상관이 없다. 모태신앙이든 유아세례 교인이든 하루 믿다 죽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구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강도는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몇분 전에 예수님을 영접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거져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들은 감격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여자가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새벽 5시면 일어나 조반을 준비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하루의 모든 일과를 규칙적으로 꼭 실행하도록 자세하게 적어놓고 이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의 많은 요구를 충족시키느라고 참으로 피곤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었다. 얼마 후 그녀는 진정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옛 집안 물건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죽은 남편이 종이에 적어 놓은 그냐가 지켜야 했던 하루의 일과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지금 새 남편과 살면서도 거의 비슷하게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죽은 남편에게서처럼 피곤을 느끼지는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지금 새 남편과 살면서도 그 일들이 하나도 어렵거나 짜증스러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계약은 이처럼 다른 법이다. 우리는 계약에 의해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에 의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생각만해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존 뉴턴은 이런 깊은 감격을 느끼면서 찬송가 305장을 작사했다. 이 찬송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는 주막의 술꾼들도 다 경건한 마음으로 애창하는 대중화된 찬송이다. 그는 노예 상인이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노예 장사꾼이었던 비천한 자기를 불러 주님의 포도원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았을 뿐만아니라, 자기의 비천했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행여 잊을새라 노예복을 입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의 포도원 일꾼으로 불리운 때가 10대, 20대, 30대, 또는 60대, 70대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주님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특권과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1995-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