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아주 먼) 옛날, (도道를) 잘 일삼았던 선비는 (그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음이 적고) 작았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음에 대해) 어렴풋하고 어렴풋했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음과 더불어 아우러지고) 어우러졌으며, (따라서 그 마음과 일삼음의 모양과 모습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잘 알아차릴 수 없었다.
微妙玄通, 言其內也. 深不可識, 言其外也. 皆, 無之效也.
“(그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음有爲이 적고) 작았으며, (그것에 대해) 어렴풋하고 어렴풋했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아우러지고) 어우러졌다微妙玄通”는 말은 이른바 그 ‘안’(으로 품어안은 모양과 모습)이 그러했다는 뜻이다. “(그 마음과 일삼음의 또렷하고 뚜렷한 모습을) 잘 알아차릴 수 없었다深不可識”는 말은 이른바 그 ‘밖’(으로 드러나는 모양과 모습)이 그러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아주 먼 “옛날”, 도道를 “잘 일삼았던 선비”의 마음과 일삼음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으며(無; 無爲),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잘”) 본받았다는 뜻이다.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强, 去聲.
이른바, 오로지, (잘) 알아차릴 수 없었는데, 따라서 (나는 다음 문장에서) 그 (마음과 일삼음의 또렷하고 뚜렷한) 모양과 모습을 일부러 일삼는다. 강위지용强爲之容의 강强은 거성(去聲; 4聲)의 강(强; 고집이 세다)이다.
强爲之形容. 以髣髴其氣像也.
(“따라서” 노자는 다음 문장에서) “그” (마음과 일삼음의 또렷하고 뚜렷한) “모양과 모습”을 “일부러 일삼는다.” 따라서 (노자는 다음 문장에서) 그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잘” 본받았던 아주 먼 “옛날”, 도道를 “잘 일삼았던 선비”의 마음과 일삼음의 또렷하고 뚜렷한) 모양(氣; 機·形)과 모습(像; 容)을 (일부러 일삼아) 비유한다.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若客, 渙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敦, 音堆.
주저주저함! 겨울에 냇가를 건너듯 (묻고 또 묻는). 멈칫멈칫함! 주변 이웃을 두려워하듯 (삼가고 삼가는). 조심스러워함, 손님을 대하듯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은 듯). 두려워함, 얼음이 장차 녹는 때처럼 (그것에 빠질까). 어리석어짐! 그 통나무처럼 (일부러 일삼은 겉모양을 줄임으로써). 텅 비움! 그 계곡처럼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를). 뒤섞임! 그 흙탕물처럼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바에 잘 머무름으로써). 돈혜기약박敦兮其若樸의 돈敦은 퇴堆와 같은 평성(平聲; 1聲)의 돈(敦; 돈독하다)이다.
此, 深不可識也. 七若字, 亦以氣象言之, 猶第四章之兩似字.
이것이 (노자가 일부러 일삼아 비유하는 그 마음과 일삼음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잘 알아차릴 수 없었던” (아주 먼 “옛날”, 도道를 “잘 일삼았던 선비”의) 모양과 모습이다. (덧붙여) 7번의 “약若” 자는 이른바 (그 “어렴풋하고” “어렴풋한”) 모양과 모습을 (일부러 일삼아 또렷하고 뚜렷하게) 일컫는 말인데, (노자가) 제4장에서 2번 (일부러 일삼아) 일컬은 “약(似; ~듯하다)” 자와 뜻을 같이 한다.
豫, 猶, 皆不果之意. 敦, 與椎古通用. 曠, 空也. 冬涉川, 咨且也. 畏四隣, 謹愼也. 儼若客, 如寄也. 氷將釋, 恐陷也. 其若樸, 少文也. 其若谷, 至虛也. 其若濁, 處惡也.
“예(豫; 주저주저한다)”와 “유(猶; 멈칫멈칫한다)”는 (“겨울의 시내를 건너가거나” “사방의 이웃에 나아가는 데”, 일부러 일삼아) 치우치거나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돈敦”은 옛날에 추(椎; 우둔하다)와 더불어 어우러져 쓰였다. “광曠”은 텅 비었다는 말이다.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듯하다冬涉川”는 말은 (따라서) 묻고 또 묻는 모양과 모습을 뜻한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듯하다畏四隣”는 말은 (따라서) 삼가고 (또) 삼가는 모양과 모습을 뜻이다. “손님을 대하듯 조심한다儼若客”는 말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은 사람의 모양과 모습인 듯하다는 뜻이다. “빙장석氷將釋”은 (따라서 그것에) 빠질까 두려워하는 모양과 모습을 뜻한다. “그 통나무인 듯하다其若樸”는 말은 일부러 일삼은 겉모양(文; 有爲)을 줄인 모양과 모습을 뜻한다. “그 계곡인 듯하다其若谷”는 말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비는 바에 이른 모양과 모습을 뜻한다. “그 흙탕물인 듯하다其若濁”는 말은 (노자가 제8장에서 일컬은 ‘물水’처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에 (“잘”) 머무르는 모양과 모습을 뜻한다.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之徐生.
누구인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과 더불어 뒤섞인 채,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흐린 도道를 일삼음으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 그것을 조용하게 하고, (그것을) 천천히 맑아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과 더불어 뒤섞인 채, 그것에 대해) 편안한 도道를 일삼음으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 그것을 오래 보이게 하고, (그것을) 오래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此, 微妙玄通也.
이것이 (노자가 일부러 일삼아 비유하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적고) 작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하고 어렴풋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졌던” (아주 먼 “옛날”, 도道를 “잘 일삼았던 선비”의) 모양과 모습이다.
以, 用也. 濁以, 謂用濁之道也. 安以, 謂用安之道也.
“이以”는 일삼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탁이濁以”는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와 더불어 “뒤섞인 채”,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흐린” 도(道; 自然)를 일삼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안이安以”는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와 더불어 “뒤섞인 채”, 그것에 대해) “편안한” 도(道; 自然)를 일삼는다는 뜻이다.
大寧薛氏曰, 井汲之多, 必渾. 木徙之數, 必斃. 人之性情, 有似於此. 除情止念. 則垢濁去. 而天光發. 收視返聽. 則精神定. 而眞氣生. 能從事於此, 由麤入妙. 則亦若古之有道者矣.
(명明나라 유학자) 설혜(薛蕙, 1489~1541)는 (『노자집해老子集解』에서) 일컬었다. “우물물을 자주 퍼 올리면, 반드시 (흙탕물이 가라앉지 못해, 우물물이) 흐려지게 된다. 나무를 자주 옮겨 심으면, 반드시 (나무 뿌리가 내려앉지 못해, 나무가) 쓰러져 죽게 된다. 사람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 理·自然·無爲·命)과 (일삼고자 하는) 정(情; 欲·心·意·有爲)은 그것과 비슷한 바를 가진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의) 정情을 닦아내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의) 뜻(念; 意)을 멈추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 마음과 일삼음의) 티끌된 바(垢; 情·欲·有爲)와 흐린 바(濁; 念·欲·有爲)가 (저절로 그러하게) 떠나가게 된다.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빛(光; 理·性·命·無爲)이 피어나게 된다. (따라서 눈의) 살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빛을) 되돌이키게 되고, (귀의) 들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빛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면밀한 바(精; 性·自然)와 신령스러운 바(神; 命·自然)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편안해지게 된다(定; 安).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참된 기(氣; 陰陽·自然)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자라나게 된다. 이것과 같이 (다른 여러) 사안을 말미암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굵고 굵은 바(麤; 自然)를 말미암게 되고,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妙; 自然)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도(道; 自然)를 (‘잘 일삼던’ 바를) 가지는 바가 있었던 ‘선비’와 (더불어 그 마음과 일삼음의 모양과 모습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保此道者, 不欲盈. 夫惟不盈, 故能蔽不新成.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를 (늘 그러하게 가지고) 지키는 사람은 (처음부터) 채움을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 이른바, 오로지, (일부러 일삼아) 채우(고자 하)지 않는데,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낡아질 수 있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새로워지게 되거나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盈, 則必虧. 天道之常. 故人, 當謙虛其志, 不使滿盈, 然後可以常保有此道也.
(일부러 일삼아) “채우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이지러지게 된다. (이것이 저절로 그러한) 하늘과 도(道; 性·命·自然)의 늘 그러한 바이다. 따라서 사람은 마땅히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뜻(志; 情·念)을 (낮추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의) 아래가 되게 하고,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텅 비우며, (일부러 일삼아) 차게 하고 “채우지” 않은 다음에야,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하늘과) “도道”를 늘 그러하게 가질 수 있게 되고,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敝不新成, 語意若曰, 初不弊破, 而新成也.
폐불신성敝不新成”, (이) 말의 뜻은 따라서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하늘과 “도道”를 늘 그러하게 가지고 “지키는 사람”은 따라서) 처음부터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하늘과 “도道”를 일부러 일삼아) 낡아지게 하거나 깨뜨리지 않는데,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하늘과 “도道”를 말미암아 늘 그러하게) “새로워지게 되고”,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右第十五章.
여기까지가 제15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즐겁고 평안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