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글쓰기 124 ㅡ 상식과 논리 없는
모를 일이다. 나는 순박함과 우직함이 요령과 눈치 없음의 본질적 숙명 사이에 있었을까? 큰소리로 화내며 싸우는 사람이 싫다. 악다구니 쓰는 사람이 특히, 술에 취해 말을 거는 사람이, 떼를 쓰는 사람이 싫다.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 내가 왜 도망하지 않았는지 거슬러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에 지나치게 관대하고 감당하려는 관성이, 그대로 앉아서 견뎌내는 습관이 반복되었다. 사십이 넘으면서 건강한 나를 잠식해온 게 무엇인지, 왜 그러한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며 나를 해석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술과 술 사이서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 사이에 있었고 나와 놀고 싶어했다. 나는 다른 건 인내할 수 있지만, 노상ㅡ술은 감당이 힘들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 취기가 느껴질 정도로 웅얼거리며 전화를 건 그였다. 그런데 그순간 그는 너무도 명징해져 있었다.
" 그렇게 힘들면 안되지요. 내가 포기해야지요."
결심한 듯한 그의 발음은 또렷했다. 타닥!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 그럼, 오늘 밤이 마지막 통화가 되겠네요." 이어 그가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밥상에 술이 함께한 집안 가풍으로 술을 음식처럼 먹어왔다고 했다. 술을 안먹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게 잘 지내라 하였다. 삶에서 '을' 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그, 고난을 거의 겪어보지 못한 신사였다. 하지만 끊겠다는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나는 전화가 끊어지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다려도 전화기는 수신중. 나는 머뭇거리다가 종료 버튼을 조심스레 눌렀다.
이제는 끝이났다. 밤이 지나가면서 달콤한 슬픔이 내 언저리에 놓였다.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늦은 밤 통화는 낯설지 않았다. 이제 종료된 관계로 남겨지게 된다. 그도 나도 잠시는 힘든 시간일 터였다.
본격적인 불면의 시그널이 왔다. 이불을 고쳐 덮고 다시 덮고... 주모송을 왼다. 내가 아는 모든 기도문을 왼다. 늘 날샌 밤에게 어서 가자고 하는데,
그럴수록 더 느릿느릿 새벽에 당도하곤 했다. 슬핏 잠이 든 것인지, 눈을 뜨니 아침이다. 상쾌함은 없고 먼지 쌓인 밤의 상흔이 하루를 묵직하게 밀고 왔다. 오늘을 살아내야하는 과제가 있을 뿐,
그런데 갑자기 무음 전화기 화면에 빨간 수화기가 맹렬히 움직인다. 그였다.
' 잊었던 뭔가를 전하려는가?
아님, 이튼 날의 반격인가? '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렸다.
그의 음성은 자못 심각하고 다급했다.
" 어, 나예요 "
" 어제 한 말, 취소! 취소해도 되죠? 취소! "
"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
그에게 체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젯밤 절제하던 신사는 오간데없고, 상기한 소년만이 있었다. 그순간 한껏 폼을 잡고 막 슬픔의 씨앗을 파종해 재배를 시작하려던 내게 실소가 일었다.
" 떼쟁이시군요 "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만 말을 하는 도중에 반 호흡, 웃음이 들어가버린 것이 문제였다. 난감했다. 분명 그가 눈치 챘다. 나의 매정함은 어디로 간 것인가? 방금 자물쇠를 잠그려다, 그의 출몰 풍경에 놀라서, 그만 비번을 잃어버린 어리버리한 형편이라니. 술이 아무리 무죄를 주장한다 해도 주취 감경은 우리나라 법 조항에서 신속히 사라져야 한다. 그와 나의 삶 어디에도 상식과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