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 위그루 자치구 견문기 2007.8.25~9.2
중국여행은 땅의 넓기 만큼이나 다양하고 신비스럽다. 가장 오지 중의 하나이며 중국 영토이지만 전혀 중국 같지 않은 서북부에 위치한 신장(新疆)위그루 자치구를 다녀왔다. 일명 실크로드로 통하는 여행경로이지만 실크로드를 따라 간 여행이 아니라 고산 트레킹과 사막에서의 텐트숙박을 겸한 색다른 체험의 여행이었다. LG사랑방산악회가 매년 한번씩 시행하는 해외여행 코스의 일 환이다. 일반여행과는 다르기 때문에 궁금한 사항도 많다. 4,200m의 고산에서의 트레킹의 어려움은? 그리고 고산의 기온은? 40도가 넘는다는 폭염의 트루판의 날씨와 옷차림은? 사막에서의 밤 기온은 급강하 한다는데___22시간을 타고가는 기차여행의 고생스러움은 어떤지? 등등 8월25일(토) 저녁 6시에 인천공항에 13명의 회원과 인솔담당자 TNC의 전과장 등 모두 14명이 모였다. 8시20분발 KAL기로 우루무치로 날라간다. 대략 5시간이 걸리는 항로이다. 중국과 시차는 한시간이지만 표준시간이 베이징 기준으므로 실제는 세시간 차이가 난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5성급 호텔로 규모나 시설이 대단했다. 우루무치에 이런 좋은 호텔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침 11시에 출발한다고 하니 시간의 여유가 많았다. 우리 부부는 아침식사후 산책길에 나섰다. 호텔 맞은편에 있는 시장거리에 들어섰다. 백화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주변 노점상이 활기를 띈다. 그리고 주상복합건물 안 가게도 흥청거리기 시작한다. 과일가게, 정육(양고기,오리고기 등),잡화, 의류 와 털제품 등 가지가지 상품이 다양하다. 해외에서의 시장풍물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시간이 남아 다시 건너편 공원을 찾았다. 한적한 거리에 아침 산보를 하러 나온 노인들이 한담하고 있 다. 철로공인문화궁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검무체조를 하고 있었다. 한없이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여유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신장성 박물관과 바자르 구경 오전 11시 호텔을 떠나 관광길에 올랐다. 우루무치 시내에 있는 박물관을 찾았다. 서역이라고 일컫는 이곳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우루무치를 비롯해,역사유물이 많은 트루판, 세계의 지붕이 라는 파밀고원, 공가산과 무즈타그아타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역사도시 카쉬카르를 한눈에 보도록 조감도 를 만들어 놓았다. 장안성(서안)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로마까지 이어지는 세갈래의 실크로드가 한눈에 들어 온다. 박물관 전시품중 3천년이나 된 고창왕국 당시의 미이라가 가장 주목을 끌었다. 실크로드 이전시대에는 옥(玉)이 가장 귀중한 보물이었다. 옥 전시품 또한 주목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옥시대에서 실크시대로 변천한 것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위구르족 신장위구르자치구는 파미르고원과 톈산(天山)산맥을 중심으로 볼 때 과거부터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동서의 길이 2000㎞, 남북의 폭 1600㎞로 면적 160만㎢인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 전체 영토의 6분의 1, 한반도의 7.3배나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8개국과 5600㎞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지역의 카슈가르는 지난 2000년 동안 실크로드의 무역상이 거쳐갔던 동서교역의 중심지이다.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는 1900여만명 중 위구르족은 공식적으로 834만여명이다. 위구르족을 지금까지 버티게 한 정신적 지주는 10세기 때부터 전파돼 15세기에 완전 정착된 이슬람교다. 중국 정부는 1960~1970년대 문화대혁명 때 위구르족을 철저하게 복속시키려고 사원을 대거 파괴하는 등 이슬람교를 탄압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위구르 사람은 지금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전통적인 사각모자를 쓰고 다닌다. 또 이들의 서구적 얼굴은 한족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들은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다른 종족과는 달리 언어도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우루무치에는 동서3횡,남북3종 모두 6개의 국도가 있고 이 모두 군인들이 건설하였다.
신장(新疆)의 한자를 보면 그 의미가 자못 확연해 진다. 신(新)은 새로운 땅이라는 의미이고, 강(疆:발음 장)의 弓은 변방땅이라는 뜻, 弓밑에 있는 土는 청나라 때 쏘련에게 빼앗긴 토지의 뜻이 담겨 있다. 맨 위의 一은 알타이산맥을,田은 준가르분지를,또 가운데의 一은 천산산맥을,아래 田은 타림분지 를 나타내고 있으며 맨아래의 一은 곤륜산맥을 뜻한다고 한다. 신장자치구는 본래 투르크 계열 민족들의 땅이었다. 지금은 정치·경제적 실권을 쥔 한족을 비롯, 회족·몽 골인·만주인·타지크인·러시아인 등 13개 민족이 살고 있지만, 8세기 이후 신장은 인구가 가장 많은 위구 르족을 위시한 투르크 민족들에게 장악돼왔다. 오늘날 중국정부가 신장을 점령하고 자국의 영토로 삼은 것은 역사적 유래에 의해서다. 기원전 2세기 한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에 의해 개척된 실크로드를 따라 한나라는 타림분지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수세기 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신장을 중국이 복속시킨 것은 7세기 당나라 때.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초 지'이란 뜻의 신장자치구 수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 Urumqi) 동쪽으로 130여㎞ 떨어진 곳에 북정도호 부를 설치하면서부터다. 8세기 위구르족에 의해 당나라가 쫓겨나자, 그 뒤 천년동안 신장 각지는 여러 투르크 민족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 준가리아를 정복하고 카슈가르 칸국을 병합한 청나라는 우루무치에 안서제독을 주 둔시키면서 다시 신장을 장악했다. 당시 신장 투르크 민족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는데, 청은 강력한 대 이슬람 배척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격분한 이슬람교도들은 19세기 중엽 대규모 반청독립운동을 일으켰지 만, 태평천국 혁명을 압살한 청조 대신 좌종당(左宗棠)은 무력으로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1944년 국공내전의 혼란기에 위구르족과 카자흐족은 다시 봉기하여 동(東)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우지 만, 중국의 새로운 주인인 공산당 인민해방군에 의해 붕괴됐다.
신장성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서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위구르 바자르를 구경하였다. 터키 여행시 규모가 크고 깨끗하며 화려한 바자르에 감동된바 있었는데 터키의 후예라서 인지 실크로드 문명의 영향인지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카쉬카르와 카라콜 호수 바자르 구경을 마치고 국내 비행기로 카쉬카르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이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제법 먼 곳이다. 곤륜산백과 천산산맥의 더없이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타림분지-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는 '한번 들어 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긴 여정을 비행기로 단 1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2001년에는 우루무치와 카슈가르간 총길이 1500km의 남신강 철도도 개통됐다.
중국 최서단 신장위구르족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 남서부에 위치한 카슈가르는 2천년 동안 실크 로드의 무역상들이 거쳐 갔던 동서교역의 중심지다. 중앙아시아의 파키스탄과 인접한 카슈가르는 중국 수도인 베이징과 3시간의 시차가 난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하나의 중국(統一中國)'을 원칙으로 러시아 와 인접한 두만강 변에서 카슈가르까지를 모두 통일 시간대로 묶어버렸다. 그래서 카슈가르에서는 중국 시 각 오전 9시가 훨씬 넘어서야 해가 뜬다. 중국정부가 시간대를 하나로 묶었지만, 신장의 위구르인들은 현지 사정에 맞게 생활한다. 카슈가르의 모든 일상 업무는 오전 10시 돼서야 시작된다.
카쉬카르(KASHGAR)는 현지에선 카쉬(喀什)라고 부른다. 숙소인 KASHGAR SEMAN HOTEL(新疆喀什 色滿賓館)은 프랑스, 일본인 등 외국인 여행객이 많았다. 실크로드를 따라 일주일 이상 차에서 잠자며 여행하는 유럽인들이 대단하게 보였다. 이날 일정은 오전에 카쉬카르의 명소인 이맘모스크(혹은 잇카모스크)와 아파호자르묘(일명 향비묘)를 구경하고 유명한 국제시장을 구경한 뒤 오후에는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는 해발 3,600M의 카라콜호수 에 도착하여 요르츠에서 일박을 하게 된다. 10시나 되어서 호텔문을 나섰다. 편리해진 교통 때문일까. 카슈가르는 더 이상 낭만적인 이국 풍경의 오아시스 도시가 아니었다. 넓게 뚫 린 대로변의 멋진 현대식 건물들, 수없이 오가는 차량행렬, 도시 곳곳에서 쉽게 부딪칠 수 있는 한족들. 중국의 여느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졌다. 우루무치를 거쳐 카슈가르에서 만난 위구르족은 외모부터 한족 과 다르다. 검붉은 피부, 큰 키에 장대한 골격, 머리에 '도빠'를 쓴 남성들과 온몸에 '차도르'를 걸친 여성들. 이들에게서는 중국보다는 중앙아시아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드카모스크와 향비묘 이드카모스크 카스에는 신장위구르자치구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슬람사원인 이드카모스크사원이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현지시각 오후 1시에 약 2-3만명의 신도가 예배를 동시에 보는 사원이다.1442년 무스림 지배자에 의해 건립되었으니 565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이슬람교는 우상을 믿 지 않으므로 조각상이 일체 없다. 기독교의 예수,마리아상 등을 세우고 기도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위그루 축제인 로즈제나 코르반축제 때는 이드카 광장에 5만명의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춤을 추며 축 제를 즐긴다. 모스크의 기둥에는 여러 문양이 있는데 기둥 높이가 18m나 된다.
아파호자르묘(일명 향비묘)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은 향비묘이지만 원래 명칭은 아파호자르(阿巴加墓:1622~1685년)의 묘이다. 호자르는 이곳 신강 지방의 귀족으로 카슈가르에 작은 궁전을 가질 정도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약 400년전 이 지방 권력자인 아파호자르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가족묘로 5대 72인의 무덤 이 있다. 향비묘라고 통칭되는데, 그녀는 카슈가르 출신으로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이렇게 불 렸다. 청의 건륭황제의 명령으로 고향을 떠나 비(妃)가 됐지만, 곧 죽게되어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 겨 안장한 곳이 바로 향비묘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 어 모든 사람들이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신강성의 남부)에 출정하는 장 군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회부를 평정한 장군은 끝내 향비를 북경으로 데려왔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 눈에 빠지고 말았다. 향비는 빼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로 건륭제의 혼을 빼 놓았다. 그런데 향비는 항상 칼을 빼어들고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했다. 심한 망향병에 시달린 향비는 화 려한 궁정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3년여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 향비를 가마에 싣고 3년 동안 옮겨와 안장한 곳이 바로 이곳 향비묘이다. 위구르인들은 그들이 지배세력이었던 아파 호자르 보다는 자신을 왕비로 삼고 싶어하는 청나라 건륭제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의 자존심을 살린 향비에 대해 더 큰 애정 을 표현하고 있었다.
코란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신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등은 일체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에 식물의 모양이나 도형, 또는 아랍 문자를 이용해 벽과 문들을 섬세하게 꾸몄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 가니 바닥에 초록색 타일을 깔고 그 위에 호자르 일가 5대에 걸친 72명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유별히 눈에 띄는 리본을 단 묘가 있었다. 빨강리본은 호자르, 파랑리본은 호자르 아버지 묘이고, 노랑 리본은 향비묘이다. 향비는 아파호자르의 손녀로 알려져 있다. 보통 이슬람식 묘는 가족묘로 만든다. 왕족의 직계자손일 경우 이곳 아팍 호자의 묘처럼 사원식으로 모스크를 지어 그곳에 관을 일렬로 보관 한다.
향비묘에서 나와 카쉬카르의 재래시장 구경에 나섰다. 카쉬카르 지방은 옛부터 동서교역의 중심지 역할 을 했던 곳으로 국제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규모가 큰 시장이다. 상품도 다양하고 정돈도 잘 되어 있 었다. 이슬람 현지식당에서 중식을 마치고 서남쪽으로 버스로 5시간이 걸리는 카라콜호수로 향했다. 카라콜 호수는 파밀의 최고봉인 공가산과 무즈타그아타산 사이에 위치한 해발 3,600m의 아름다운 빙하 호수이다. 그 호숫가에서 오늘 저녁 숙박을 하게 되어 있다. 오로지 사막과 험준한 흙으로 된 산만 보이다가 물과 숲이 있는 오아시스가 나오면 와! 오아시스다-- 하고 즐거워한다. 마치 사막에서 헤메다가 발견한 오아시스처럼. 마을이 나타나면 마침 장날인지 북적 거리는 인파가 신기하기만 하다. 해발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험준하고 흙으로만 되어 있는 산들을 보면 서 탈레반들의 동굴 생각이 난다. 저런 산속에 숨어 있으면 누군들 찾아낼 수가 있을까 싶다. 가는 도중 국경검문이 있었다. 소위 체크포인트 지점이다. 고속도로로 곧장 가면 파키스탄으로 가게 된 다고--그래서 모두 차에서 내려 여권으로 신분확인을 하였다. 이 카라코름 하이웨이로 계속가면 파키스탄의 훈자마을로 가게 된다. 세계 최장수 마을인 훈자마을도 이번 여행의 목표로 하자는 얘기가 있었으나 경비문제로 취소된 곳이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흙산에 빙하의 흔적이 역력하다. 2,000m가 넘는 고산지대의 국도에 양떼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차를 가로 막는다. 개가 양떼를 몰고 있 다. 양이란 순한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언젠가 TV를 보니 의외로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란다. 온천이라는 표지가 있어 신기해 했는데 자연온천으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노상 온천이 보였다. 멀리 하얀 언덕이 나타났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석회가 가득 섞인 개천물이 말라 하얀 가루가 되어 강풍에 날라가 쌓인 것이 크다란 언덕을 이루었다고 한다. 자연의 신비함에 입이 벌어진다. 해발 3,300m지점을 지난다. 가져간 과자를 나누어 주려고 케이스를 뜯으니 과자봉지가 압력에 못이겨 빵빵하게 불어 있다. 모두들 높이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드디어 설산이 나타났다. 여행중에 처음보는 설산 이다. 흰구름 사이에 가려 보였다가 신비롭게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는 설산은 왠지 가슴을 설래게 한다. 내일이면 저 설산에 들어가리라-- 드디어 카라콜호수가 있는 숙소 요르츠에 도착했다. 요르츠가 여러채 서 있다. 몽골의 겔과 같은 원형 천막집이다. 이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무즈타그아타산 베이스캠프(4,200m)까지 트레킹을 할 예정이 다. 몽골의 겔에서의 경험이 있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화장실도 없고 전기도 없고-- 그저 보름달과 별빛만이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해발 3,600m에서의 하룻밤을 요르츠에서 보냈다. 8명 남자가 한방에서, 그리고 여자들 5명이 한방에서 기거했다. 난로에 석탄을 때서 춥지는 않았지만 새벽에는 한기를 느꼈다. 고소증을 이기기 위해 약을 먹었지만 내일 트레킹을 무사히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신장성박물관
위구르바자르
신장 위구르 바자르 민속공예품 이드카모스크
향비묘
카라칼호수
카라칼 호수변의 요르츠(겔)
요르츠 안에서/ 산행에 참가한 여성회원들
무즈타그아타산 트레킹 중국 신장위그루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서쪽 끝에 있는 산맥. 무즈타그아타(Muztagata) 산맥 또는 카슈가르 산맥이라고도 한다. 이 산맥의 중심줄기는 파미르 산악지역 의 동쪽 가장자리와 평행하게 북북서-남남동쪽으로 322㎞ 가량 뻗어 있으며, 공-거[公格爾] 대산괴에서는 7,719m 높이로 솟아 있다. 무스타그아타산(7,546m)은 카쉬카르에서 남서쪽으로 160㎞ 정도 떨어져 있다. 만년설로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겐 얼음산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트레킹코스는 무즈타그아타산의 아이 다라(204)캠프(3,600m)-베이스캠프(BC/4,200m)까지 갔다가 양블락방향으로 능선을 타다가 하산하여 아이 다라로 돌아오는 16km 코스로 고소증을 이겨내는 것이 관건이다. 어제밤 10시에 취침을 하였으나 약 때문인지 소변이 자주 마려워 후래쉬를 들고 몇차례 요르츠를 나와 보름달을 쳐다보며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딘가-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 10시에 버스를 타고 아이다라(204캠프라 칭함)까지 가서 그곳에서 10시 반에 실제 트레킹이 시작 되었다. 새벽에 눈,비가 내렸는지 땅이 촉촉하다. 비가 오면 축복이라지만 트레킹은 어려움이 많다. 잔뜩 흐리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 싶게 햇살이 찬란하다. 높이 우뚝 솟은 설산과 구름 그리고 운무가 어 우러져 한폭의 그림이다. 한없이 먼 평지가 이어진다. 저기 보이는 저산을 돌면 -- 가이드가 말한 저기 는 한없이 걸어도 나오지 않는다. 착시현상 때문인가? 가깝게 느껴지는 거리가 이렇게도 멀 줄이야. 높이 오를수록 어질어질하다. 나는 4,800m까지도 별 무리없이 오른 경험이 있어 쉽게 생각했는데 의외 로 고소에 시달렸다. 베낭도 무겁게 느껴지고 자꾸만 쉬고 싶은 생각에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오후 1시20분 두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산의 산행은 천천히 걸어야 된다지만 나의 속도는 자꾸 느 려져 맨 꼴지에 서게 되었다. 돌과 흙밖에 없는 삭막한 산길을 한없이 걸어야 했다. 드디어 2시반경 런치 포인트에 도착했다. 베낭에 넣어간 낭,우유,빵을 꺼냈으나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빵 한쪽과 우유만 먹 고 나머지는 현지 아이들에게 주었다. 해발 3,920m지점에서 중식시간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를 향해 걷 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는 해발 4,200m에 위치한다. 3시10분 런치포인트를 떠나 4,000m를 오르면서 계속 오르막 길이 계속 되었다. 힘이 드는지 일부 동료들은 말을 타고 오르기도 한다. 만일을 대비해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을 타고 가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그 유혹을 견뎌내어야 한다. 드디어 베이스캠프가 보였다. 마치 마라톤 의 마지막 주자처럼 힘이 솟구친다. 모두들 환영과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오후 4시50분 - 무려 6시간 20분 이 걸린 셈이다. 멀리 독수리 날개모양을 한 무즈타그아타산이 흰 눈을 머리에 덮어선채 내려다 보고 있 다. 해발 7,546m. 몇달전 이 산을 오르던 산악인이 얼어서 죽었다고 한다.
고산에서는 위험한 요인들이 많다. 강풍과 추위만이 아니라 지형의 어려움, 특히 초보자들에겐 고소증이 가장 무서운 적이다. 일반적으로 고소증이 많이 오는 높이는 4,000~4,300m, 5,000m,그리고 8,000m를 넘어 갈 때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나며 힘이 빠지고 식욕이 없어진다. 체질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나 움직임을 적게,그리고 천천히하며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좋다고 한다. 술이나 산에서의 샤워는 금물이다.
하산은 비교적 쉽다. 고소증이 고도가 낮아질수록 풀리기 때문이다. 고소증으로 여자들 몇명은 말을 타 고 나머지는 힘든 산행을 해 냈다는 뿌듯함을 간직한채 힘찬 발걸음을 내 디딘다. 뜨겁게 달군 햇볕은 머리와 온몸을 내리쬔다. 썬블록크림을 바르고 모자에 머리수건까지 쓰고 햇볕과 싸운다. 하산길도 만만 치 않았다. 워낙 거리가 길고 단조로워 힘든 코스였다. 간혹 보이는 바위나 돌은 모양이 괴이하게 생겨 탐이 날 정도였다.풀이 자라고 있는 평지에 이르자 못보던 꽃이 핀 야생화들이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 리를 감동시켰다. 마지막 하산 종점에 이르니 오후 8시반- 아침 10시반부터 산행을 시작했으니 무려 10시간을 3,600m에 서 4,200m를 오르내리며 고소증과 시달린 셈이다. 그러나 전원이 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들이다.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라 피곤한 심신을 달래고 있다. 30분을 달려 어젯밤 숙박했던 카라콜 호숫가 요르츠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이 곳에서 하고 버스로 카스까지 가기로 했다. 당초는 요르츠에서 자기로 했으나 목욕도 하고 편한 잠을 자기 위해선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요르츠의 식당에서 맛있는 요리를 준비했으나 너무 피곤한 탓인지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반공 기 정도 요기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호텔로 오는 동안 피곤이 심했던지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니 1시가 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트루판으로 가는 날이다. 아침 늦잠을 자고 11시에 출발한다니 여유만만이다.
트루판행 기차를 타고 오전에 카쉬카르에 있는 대형마켓을 들렀다. 기차에서 먹을 라면이랑 사막체험 대 먹을 식료품과 물을 산다고 한다. 덕분에 한가한 쇼핑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마트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일행들은 대부분 손주들 선물 골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또래의 친구들과 여행을 화면 늘 그러하듯 손주 선물이 전부였 다. 1시5분발 기차를 탔다. 4인용 침대칸이다. 우리 일행이 두 부부씩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자리 바꾸느라 시간을 보냈다. 10호차 대부분에는 우리 일행이 탔으나 몇몇 현지인과 중국인들이 타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는 입구쪽 6일실에는 위구르족 여대생 2명과 중학교 여학생 3명이 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살결도 흰 것이 중국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김선배와 나는 그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대생은 영어가 통했다. 궁금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서로 신기하고 궁금증이 많기는 마 찬가지다. 어린 사춘기 애들이라 한국의 연예인들에 관심이 많았다. 만화에 나오는 인물도 한국의 가수와 탈렌트들이다. 한류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석유자원이 풍부한 신장은 현재 커라마이(克拉瑪依), 타리무, 투루판(吐魯番)·하미(哈密) 등 3대 유전이 개발 됐으며 지난 1993년 이래 원유 생산량은 연평균 100만톤씩 증가돼 증가율에서 중국 1위이다. 신장의 석유매장량은 약 300억톤으로 추산, 중국전체의 4분의1에 달하며, 원유생산량은 오는 2010년 5 천만톤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때 가면 중국은 최대의 육상 원유생산지로 부상할 전망이다. 중국에 서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중요성이 바로 보이는 대목이다.
트루판 옛날 서역에서 문화와 정치의 중심이였던 곳이 동쪽의 돈황과 서쪽의 투루판. 唐代까지 漢族의 고창국 과 교하국이 지배를 하였으나 10세기 이래 위그루족의 통치권에 들어 갔고 1912년 투루판 이란 이름으 로 개명되었다.
투루판은 위그루어로 '낮은 땅' 을 의미한다. 표고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은 도시로 가장 낮은 곳은 해 발 -154m이다. 기후는 7월 이 섭씨 49도 지표온도 섭씨 82도 기록. 겨울은 -30도 C. 중국에서 가장 덥고, 가장 춥고, 가장 낮고, 가장 건조한 자연환경을 가졌다. 건조한 날씨 덕에 포도와 과일이 달고 맛이 있다. 이곳의 포도는 건포도용으로 전세계에서도 유명한 재배지이다.
트루판역에는 수많은 승객들로 붐벼 과연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면모가 보였다.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이 새 로운 관광권으로 떠오르고 건조하고 뜨거운 햇볕으로 포도재배가 잘 되어 건포도 생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 다. 또 중국의 3대공정의 하나로 꼽히는 카레츠(지하수 연결공사)가 유명해지면서 서부의 새관광명소로 각 광을 받고 있다. 오늘도 예보상에는 섭씨 36도로 발표했지만 실제는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였다. 40도가 넘는다고 예보하면 출근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어 일부러 기온을 낮추어 발표한다는 것이다.
카레츠 박물관 손오공이 왔다갔다했다는 화염산 자락에 있는 카레츠, 우리말로 하자면 지하수로다. 이 지역의 지하수로는 중국 역사상 3대 토목공사, 즉 첫째 만리장성, 둘째 경항 대운하, 그리고 셋째 카얼츠 수로공사 중의 하나였다. 왜 건설된 수로인가? 산꼭대기에 있는 만년설이 태양열에 녹아 물로 변해서 내려오는데, 그 물이 사람이 사는 곳까지 내려오기 전에 증발해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꼭대기에서부터 아예 땅밑으로 수도를 파서 마을까지 내려오게 만든 장치인 것이다. 그런 지하수도가 중국 전역에 수천 수만 갈래나 깔려있다고 했다.
매년 20억㎡의 용수를 공급하는 총연장 3000㎞ 길이의 지하 운하다. 가장 긴 수로는 30㎞에 달하고, 우물은 보통 20m 간격으로 팠다. 한 갈래의 수로를 만들기 위해선 수십 개의 우물을 파야 한다. 경사지게 이어지는 물길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므로 우물은 그만큼 더 깊이 파야 한다. 그래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깊이 30~70m, 낮은 곳이라도 10~20m 정도를 파야 했다.
카레즈 박물관은 그 물길 중 한 곳을 개방하여 관광지로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카레즈의 우물과 포도 건조장 같은 투루판의 상징물들을 배합하여 박물관을 꾸며놓았다. 대형 카레즈 모형을 비롯해 카레즈의 굴설 과정과 방법,공정에 쓰인 공구 등이 각종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을 둘러보고 나서 박물관 지하를 관통하는 카레즈 현장으로 내려갔다. 깊이 10여 미터에 폭은 1미터 정도되는 좁은 지하 터널에는 손발이 시릴 정도의 찬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화염산 바닥을 뚫고 흘러온 한 갈래의 카레즈다
카레츠 박물관을 통해 설산의 만년수를 지하수로를 통해 사막지대에도 물이 공급되는 대동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순전히 인력이 동원되었으나 이젠 기계의 힘으로 공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산산맥에서 시작되는 지하수로는 3,000km나 되는 거대한 공정이다.
바로 옆에는 포도원이 있었다. 포도거리를 만들어 그늘 밑으로 천정에 알알이 메달린 포도를 감상하면서 거닐게 된다.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건포도 원료로 당도가 뛰어나다. 몇kg을 사서 일행이 싫컷 먹었다. 이 지방에는 포도밭과 포도건조장이 즐비하다.
소공탑 한국요리를 하는 고려촌에서 닭도리탕으로 맛있게 점심을 배불리 먹고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2㎞ 떨어져 있는 포도밭에 위치해 있는 신강 최대의 고탑(古塔)으로 이슬람양의 독 특한 양식의 탑이며, 매년 이곳을 참관,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청대 명장인 어민화소(額敏 和塔)가 청왕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울러 자신의 일생의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은화 7000냥을 들 여서 짓기 시작했던 것으로, 어민탑(額敏塔)이라고도 불린다. 어민화소가 죽은 이듬해인 1777년에 둘째 아 들인 소래만(蘇來滿)에 의해 완공되었다. 탑외부는 전부 청회색이며, 44m높이의 원형탑이다. 탑 안에는 72개의 나선형 층계가 꼭대기에 이어져 있다.
포도밭과 건포도
카페츠 박물관의 카레츠 현장(지하수로) 소공탑
쿠무다거 사막으로 소공탑 견문을 마치고 오후일정인 쿠무다거 사막으로 향했다. 쿠무다거 사막은 센선(선善)지역에 있다. 선선은 2만명이 거주하는 제법 큰 도시이다. 트루판에서 2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목화와 석유가 많이 생 산되며 중국 제1의 석유매장을 자랑하는 트루판-하미 석유의 중심지이다. 사막과 도시가 연결된 세계유 일의 도시이다.
하미과로 알려진 하미멜론은 사실은 이곳 선선의 특산품이다. 청(淸)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을 순시하면서 더위에 목이 말랐을 때 호박같이 생긴 과일을 먹어봤다. 당도가 높고 사각사각하는 맛이 일품이었다. 껍질은 누르스름하나 속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띤 누른색 과일이다. 어디서 나는 과일이냐고 물으니 신장 하밀에서 나오는 과일이라고 답하므르써 하미과(哈密瓜)가 된 것이데, 사실은 이곳 선선에서 가져간 것이다. ‘하미과’는 참외와 멜론을 합친 모양과 맛을 가졌다. 하미과는 길거리 어디서나 팔고 있는 대중 과일로 열을 내게한다하여 열을 내리게 하는 수박과 같이 먹는 습관이 있다.
가는 도로 옆에는 포도밭과 목화밭이 많았다. 도로는 강한 바람 때문에 고속도로가 되지 못하고 고등급도로 로 명칭된다. 바람 때문에 지난 4월에는 기차가 뒤집힌 사고도 있었다 한다. 바람을 막기 위해 백양나무를 다섯갈래로 심어 오도림(五道林)이라고 한다. 오도림이 곳곳에 보인다.여름은 뜨거운 사막기후이고 봄과 가 을은 짧아 밤이면 사람들은 지붕위에서, 닭은 나무 꼭대기에서 잠을 자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사막테라피 체험 쿠무다거 사막 입구에 도착했다. 베낭에 달아둔 온도계는 42도를 가리킨다. 쿠무다거 사막은 선선시의 타조농장이라는 간판골목으로 들어갔다.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으로 경운기에다 짐을 실어나르며 한참을 들어가니 모래사막에 붙어있는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우리가 사막체험 할 모든 준비장소이며 식당이며 샤워장이기도 했다. 먼저 허리 아래부분을 모래에 묻고 찜질하는 단체 테라피체험을 하였다.
찜질은 무릎 관절에 좋다고 하는데 뜨거운 모래는 무좀 환자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파라솔 내지 우산을 쓰고 나란히 허리와 다리를 묻고 가부좌 자세로 앉은 모습이 가관이었다. 20~30분 가량이 좋다고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모두 30분 이상 묻고 있었다. 다리에는 땀이 나 모래가 까맣게 묻어 있다. 비록 땀이 많이 나는 견디기 힘든 체험이지만 기분이 좋은 표정들이다. 모래는 뜨거워 맨발로는 걷지를 못한다.
민가로 내려와 간이 샤워시설로 몸을 닦고 현지의 전통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국수를 요리하는 과정을 직 접 보는 것도 재미 있었다. 이 집 주인의 누님과 가족들이 협동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사막 주위이지만 집 주변은 야생화도 많고 맑은 개울물도 있어서 마치 시골집에 온 기분이다. 저녁 해가 질 무렵 베낭을 메고 사막안으로 들어갔다. 텐트를 치고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다. 낙타에 짐을 싣고 각자 베낭에 개인 소지품을 메고 사막 능선을 넘어서 마치 낙타를 끌고 오아시스를 찾아 가는 대상들의 모습이다. 예정된 장소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부부 2인용 테트를 치니 각자의 숙소가 마 련된 이다. 모래사막에서의 밤은 익어간다.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다같이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구절 이 나오면 다같이 합창이다. 동요에 외국 민요까지 학창시정 배운 노래가 모두 동원되고, 우리 가요도 이 신 장 쿠무다그 사막 밤하늘에 메아리 친다. 모두 한마음의 동심이 되었다.
수박,그리고 양고기꼬치를 안주로 백주를 마시면서 잊을 수 없는 사막의 밤을 보낸다. 이제 모래 위에 펴놓 은 카페트에 누워 밤하늘의 별똥별을 보면서 노래가 계속된다. 보름이 지나 조금 이지러진 달이 우리를 신 기한 듯 내려다 보고 있다. 달 속의 계수나무가 너무나 선명하다. 서울서는 구경 못하던 은하계, 북두칠성이 뚜렷하고 샛별은 나 여기 있다고 반짝인다. 영원히 잊지못할 밤이 짙어가니 하나 둘 잠자리로 찾아 들었다. 2인용 좁은 텐트 속에서 누워서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밤에 비가 왔단다. 사막에서의 비란 축복이라고 하는데-- 아침 일출을 맞으러 모래 능성이로 올라갔다. 능성이를 넘으니 또 능성이가 나타났다. 카메라를 들고 조금 이라도 빨리 해돋이 장면을 보려고 자꾸 앞서 나간다. 벌겋게 달아오른 능선 위로 불덩이 해가 솟는다.
해외에서 일출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구름이나 안개,비 등으로 운이 좋아야 일출을 본다. 그러나 사막에서 는 그런 염려가 별로 없다. 일출보다는 아침 햇살을 받은 사막의 모습이 작품이다. 앉으면 엉덩이가 베일 것 같은 칼날같은 능선길, 그리고 여인의 엉덩이나 젖가슴처럼 몽실한 모래더미는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해가 뜨고 나서 우리는 마을로 내려왔다.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제의 그 국수와 감자를 맛있게 먹고 사막 체험을 끝내고 철수했다. 화염산 이번 여행은 과일여행이라고 할만 하다. 포도,수박,사과,그리고 이 지방의 특산물인 하미과를 하루에도 몇차 례씩 싫컷 먹었다. 날씨가 더워서 특히 수박과 하미과는 길거리에서도 먹기도 하고 포도는 어찌나 단지 그 리고 씨가 없어서 먹기도 좋았다. 사막체험을 마치고 아침 10시반경 사막마을 선선시를 떠나 트루판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화염산을 들르기로 하였다. 화염산은 서유기에 나오는 유명한 산이다. 타오르는 불꽃 같 다고 하여 화염산이라 명명된 것이나 지금은 황사의 영향 때문인지 누른색으로 변질되어 실감이 덜났다.
화염산 천불동 계곡은 험준하기도 하지만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다. 멀리 천불동 동굴로 올라가는 계단 이 보였다. 계곡 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멈추고 아찔한 계곡 아래를 내려다 본다. 바깥온도는 얼마나 되는지 잠시 서 있는데도 마치 찜질방에 들어선 느낌이다.
고창고성(高昌故城) 어제 사막체험을 하느라 문명을 벗어나서인지 호텔로 가서 제대로 샤워도 하고 싶고, 화장실도 가야 했다. 트루판 시내로 들어가 저녁에 숙박할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미룬 일들을 모두 보았다. 오후 관광은 당나라 시절 고창왕국의 역사유적지인 고창고성을 첫순서로 잡았다.
499년 한나라 출신 국문태가 세운 고창국의 유적으로 트루판 남동쪽으로 46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성터 는 둘레가 5.4km 면적이 200만 제곱m로 방대한 크기를 느낄 수 있었다. 뒤쪽으로 붉은 화염산과 누런 황 토빛 고성이 대조를 이룬다. 고창국은 트루판을 중심으로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다가 당나라에게 멸망했 다. 당나라의 침공 위협에도 장안의 군사가 이곳까지 쳐들어 올 수 없다며 방심했다가 감숙성 돈황에 주둔 했던 이광휘장군의 10만대군에게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627년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는 이 곳을 지날 때 국왕의 부탁으로 두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하고 없었다. 사원의 정면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은 작은 감실이 뚫려 있는데 불상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벽화는 흔적만 이 있었다. 탑 주변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을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복발탑은 천정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장 법사가 400명을 모아두고 설법하던 강의실로 유명하다. 인도에서 발흥된 불교가 이곳 신장에 전파된 것이 최초이며 그 후 점차 동쪽으로 이동되어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너무나 광활한 유적지라 걸어서 보기가 힘들었다. 당나귀가 끄는 두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옛고성을 둘 러 보았다. 400년간 불교가 흥행했던 고창국은 흙먼지만 나는 고성터로 변했지만 대불사(The Big Temple), 방형탑 등 많은 유적지를 남겨 수많은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 인근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첫날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본 3천년된 미이라. 바로 발굴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群)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00년간 사용한 공동묘지인 셈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보지 않고, 잠 시 쉬는 휴식으로 보는 것이다. 1914년 영국탐험대가 발견한 이 지하무덤 군에서는 당나라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량의 유물, 벽화,문서 외에도 묘표, 토우, 견직물, 그리고 미이라가 출토됐다.
특히 216호에서 나온 풍만하고 화려한 당대 미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채색한 여인의 목상, 종이로 만든 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 점의 복희여와도가 대량 출토되었다.
처음 들어간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왼쪽부 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막은 금인은 언행에 신중함을, 금인과 마주보고 있는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올바른 무위정직을 뜻한다.
베제크릭 천불동 베제크릭이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찾아 무르툭 계곡 으로 들어선다. 양쪽으로 붉은 화염산 절벽에 싸여 있는 협곡의 오른쪽에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황토 와 함께 흐르고 있다. 협곡 절벽의 중턱을 따라 석굴이 구축되어 있다. 붉은 화염산과 무르툭 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이곳은 6세기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13세기 원나 라 때까지 성지역할을 하여 불교 관련 벽화가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특히 위구르인들이 투루판을 지배 했던 9-12세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로 예불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로 된 것이 많다.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섬세한 선으로 묘사한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그림과 명암과 양감을 강조하는 위구르 및 서역양식의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 세력들이 들어와 벽화를 칼로 긁고 또 파괴했으 며, 심지어는 눈알을 파내어 버렸다. 게다가 1898년 러시아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을 발견한 이래, 20세 기에 이르러 독일 고고학자 르콕과 그륀베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네 차례 조사하며 위구르인 공양 도, 사천왕도 같은 수백 상자 분량의 벽화조각들을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갔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베를린박물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어 일본 승려 오타니 탐험대와 아스타나 고분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도 이 곳에 들러 남아있는 유 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 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잔인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일본이 약탈한 천불도 한 점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굴의 수도 원래 82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뜯겨진 부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부분의 색채는 세월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뚜렷했다.
석식을 하고 잠시 포도원 거리 산보를 마치고 예정된 위그루 민속공연을 보게 되었다. 호텔 내에 공연장이 별도로 있었는데 시간이 되어도 관람객이 우리밖에 없어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하고성 투루판시 북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70만제곱km)은 글자 그대로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역에 만들어져서 천연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절벽 전체를 요새로 만든 모양이 기다란 항공모함 과 흡사하다. 두 하천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650m의 고성터가 서 있 다. 다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면 350m에 이르는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나 있다. 대로가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사원지, 대불사가 있다. 고창고성이 흙을 쌓아서 만든 성이라면 교하고성은 흙을 파서 만든 성이라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 교하고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 중이다.
대불사는 크기가 5,100평방m로 4면이 부처로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파괴되고 오직 한군데만 남아 있다. 불탑, 전망대,관서,문서저장고,카레츠(지하우물),아기묘,민가 등을 구경하고 350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나왔다. 묘한 흙덩이 모양의 스피커에서는 중국어로 안내방송이 계속된다.
기원전 250년부터 차사전국의 도읍이었던 이곳 교하성은 흉노와 한나라의 지배를 번갈아 받다가 당나 라 때 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징키스칸의 손자에 의해 멸망되었다. 민간6천과 군 3천의 병력으로 요새를 8개월간이나 잘 지켰으나 석포에 의한 불공격으로 마침내 무너지 고 말았다.
장안에서 교하성까지는 몇만 리의 먼 길로 병역 의무를 치르는 젊은 군병들이나 처자를 떼어놓고 온 장수들의 외로움은 항수병을 깊게 하였을 것이다. 당나라의 전쟁시인이라 불리는 이기는 이러한 교하 성을 소재로 하여 <고종군행(古從軍行)>이란 시를 지었다. 기다리는 병사는 돌아오지 않고 서역의 특산 품인 포도만 들어온다는 애달픈 시다.
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해질녘에는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 행인의 밥솥에는 모래바람이 짙고 공주의 비파 소리에는 원한이 깊다. 야영하는 만리에는 성곽 하나 없고 눈비 분분하게 대사막에 연이었네. 북쪽의 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날면 오랑캐 아이 눈물은 두 줄기로 떨어진다. 듣건대 옥문관은 아직 막혀 있다는데 마땅히 목숨 걸고 경차를 따라갈까. 해마다 병사들의 뼈는 황량한 사막에 묻히는데 포도만 부질없이 한나라로 들어오네.
건포도 농가 오후시간에 이 지방의 특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포도재배 농가를 찾았다. 더운 8월에 여행하는 이유도 지금이 포도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건포도에도 종류가 많았다. 색갈도 다양하고 크기도 달랐다. 씨가 없는 것이 특징이나 씨가 있는 건포도도 있었다. 요즘 포도씨가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난 후 씨있는 건포도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씨까지 씹어도 맛이 괞찮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제 우루무치로 돌아가야 한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3시간반이 걸린다. 가는 차창 밖으로 소금이 난다는 사해도 보이고 풀밭에는 양떼들이 작별 인사를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에 수백개의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다. 해외에서 본 풍력발전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같다. 과연 중국의 거대한 힘을 보는 것 같다. 뜨거운 사막에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다.
쿠무다거 사막 사막테라피 체험하러 텐샨산맥
화염산
천불동계곡
고창고성 성벽
교하고성
8박9일의 대장정이 모두 마감이 되고 있다. 낯선 이국- 탈레반들이 나올 것 같은 흙산, 끝이 보이지 않 는 사막에서의 하룻밤 사막체험, 고소증으로 힘이 들었던 4,200m의 트레킹,손오공과 삼장법사의 화염 산,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의 유적지탐방,22시간의 기차여행, 42도나 되는 불볕의 트루판--모두가 머리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의 장면들이다. 처음 몹씨도 궁금했던 신장성이 이제 내 몸에 녹아든 것 같은 기분이 다. 고생한 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이 여행의 결과물이다. 평생 잊지못할 멋진 여행이었다.-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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