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2023. 4. 30.(주일낮예배) 시편 73:28
뉴욕 타임즈에 칼럼 리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쓴 두 번째 산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 언론계에서 성공한 데이브드 브룩스는 27년동안 살았던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재산을 분할하여 작은 아파트를 사서 혼자 살게 되었다. 그런데 혼자의 삶을 시작한 데이비드 브룩스는 일이 있는 주중에는 괜찮았지만, 일이 없는 주말에는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평생 일만 하였던 데이비드 브룩스는 일과 상관없이는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삶인가?를 알게 되어서 5년동안 연구하여 쓴 책이 두 번째 산이다. 그 책의 표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삶은 혼자 수고하여 성공의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남들이 오르지 못하는 성공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공동체를 세우는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번 주 우리교회는 역대하 말씀으로 성경통독을 하였다. 그 역대하 32장을 보면 앗수르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함락된다. 이것을 본 히스기야는 성전을 청결케 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겼다. 그렇게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히스기야의 나라 유다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다. 열왕기 18장을 참조하면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침략에 그의 요구대로 은 삼백 달란트(10톤)와 금 삼십 달란트(1톤)를 바치기 위하여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주고, 심지어 성전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바쳤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앗수르 산헤립과 싸워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앗수르 산헤립은 유다를 침략하였다. 그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기 옷을 찢으며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한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앗수르 군대를 멸하여 버렸다. 그래서 패전하여 앗수르로 돌아간 산헤립은 그들의 신전에서 아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히스기야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며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대적자를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가지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앗수르가 침략하여 므낫세는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앗수르로 끌려간 므낫세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다시 유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다. 그런데 아몬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렇게 우상을 숭배한 아몬은 신하의 반역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다.
이것이 역대기의 이야기이다. 역대기는 히스기야, 므낫세, 그리고 아몬왕이 행한 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지 않았다. 역대기는 유다의 왕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온 왕에게는 승리의 기쁨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은 자에게는 심판이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찾는 자만이 참된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복된 삶을 살고 있는가? 한국 최고의 원자력 공학자이고, 또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및 수출의 주역인 장순흥 부산외대 총장이 하인 장순흥이라는 간증집을 발간하였다. 장순흥 총장은 고등학교 시절에 어짜피 죽을 인생인데, 내가 열심히 살면 뭐하나?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 덕수교회에 갔을 때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그 후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전도하여 고등부 회원이 9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공대를 졸업하여 1982년에 28살의 나이로 카이스트에서 교수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2014년–2022년은 한동대 2대총장으로, 2022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 총장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쓰임을 받은 장순흥 총장은 하인 장순흥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의 성경공부가 내 믿음을 성경 말씀 위에 굳건히 서게 했고, 내 일생을 이끌어가는 믿음의 자산이 됐습니다.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누가 돈을 준다고 해봤자 아주 많아야 몇백억, 몇천억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줄 수 없습니다. 눈앞의 것보다 더 멀리 있는 가치, 나아가 영원한 가치에 주목하면 좋겠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3월 첫째주 덕수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장순흥 총장은 누구는 몇백억, 몇천억은 줄 수 있지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장순흥 총장은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도가 받는 참된 복이 아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시편 73편의 표제는 아삽의 시이다. 성경 사전에서 아삽을 찾아보면 아삽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왔을 때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으로 소개한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옮길 때 다윗이 기뻐서 춤을 출 때 함께 찬송을 불렀던 사람이 아삽이다.
아니 지난 주 금요일에 읽었던 에스라 3장을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다윗의 규례대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렇게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또 아삽의 자손들이 찬송을 부를 때 옛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 기초를 보고 대성통곡하여 울고, 또 여러 사람들은 감격하여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스 3:12).
지금 이 모습이 얼마나 감격적인지 느껴지는가?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아삽과 그의 자손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찬송을 부를 때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하고 감격하는 은혜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삽이 불평과 원망으로 노래하고 있다.
왜 아삽이 불평과 원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아삽은 4절에서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다고 말한다. 5절에서는 그들의 삶에는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다. 7절에서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정결한 자가 아니라, 악인들이다. 교만과 강포가 가득한 악인들의 삶에 고통이 가득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의 삶이 더 평안하고 형통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삽은 불평과 원망가운데 12절을 말한다.
(시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평안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행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다. 그런데 항상 평안과 형통이 악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삽은 불평과 원망으로 고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아삽의 이 불평과 원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불평하던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다시 기뻐함으로 주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아삽은 다시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사람으로 회복될 수 있었겠는가? 먼저 17절을 읽기 바란다.
(시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이었기에 늘 성전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므로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도 늘 성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삽은 내가 성소에 들어갈 때에 악인들의 종말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악인의 형통과 평안을 본 아삽은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아삽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계속하여 찬양을 올린 것이다. 아니 아삽은 악인은 형통한데, 왜 나는 형통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하나님 앞으로 늘 나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아삽은 악인의 최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은 악인의 마지막만이 아니다. 아삽은 21절에서 양심의 찔림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여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삽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악인들이 받는 복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자인지를 깨달아서 21절에서는 양심에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또 22절에서는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는 아삽은 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먼저 23-24절을 읽기 바란다.
(시 73:23-24)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창세기 5장 24절과 열왕기하 2장 9-10절을 보면 영접하다는 단어로 설명되는 2명의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에녹이고, 또 다른 사람은 엘리야인데, 우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잘 알고 있다.
에녹과 엘리야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창세기 5장 24절에서 에녹에 대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므로 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열왕기하 2:9-10에도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실 것을 말씀한다. 여기서 데려가신다는 단어가 영접하다는 단어와 같다.
이것이 아삽이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악인의 형통과 평안함을 보면서 불평이 가득했던 아삽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①악인들의 종말을 깨닫고, 또한 ②그들을 부러워한 자신의 부끄러운 삶의 밑바닥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렇게 부끄러운 나를 의의 오른손으로 붙잡아서 ③에녹과 엘리야처럼 믿는 자를 붙잡아서 영접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아삽은 이제 불평은 사라지고, 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아삽과 같은 이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이유와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날마다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생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억되어서 날마다 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참된 복임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