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還甲)이나 회갑(回甲)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환갑은 만 60세를 맞이하는 생일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60년 동안 세상에 산 것이다.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조합의 육십갑자가 한번 다 돌고 난 의미 즉 새로운 시작 하는 데 있어서 환갑이라고 한다. 육십갑자(六十甲子)는 '갑을병정'으로 시작하는 10간(干)과 '자축인묘'로 시작하는 십니지(支)를 결합해 만든 60개의 간지를 의미한다. 육십갑자에 따라 매해의 이름이 매겨지고, 동일한 해의 이름이 60년마다 반복된다. 2023년은 그중 40번째 계묘년(癸卯年)이다. 환갑은 60 갑자를 다 지내고 다시 낳은 해로 돌아왔다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환생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면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문자적 환생은 절대 아니다.
회갑은 육십갑자가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돌아올 회자를 써서 바로 회갑이라고 한다. 환갑이랑 비슷하긴 하지만 약간의 생일을 의미하는 환갑과 그리고 회갑연이라고 불리며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기에 새로 시작한다는 회갑의 의미라고 본다. 환갑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회갑의 한번 돌아와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다. 머나먼 인생 여정이다. 길든 짧든 누구든 가야 하는 길이다.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 환갑이 아니라 현대 의료의 도움으로 그 이상 살 수 있다고 한다. 무의미한 연장인가? 아니면 의미가 있는 연장인가? 몸이 자유롭지 못한 채로 100년을 의료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오래 산다는 것이 인생에 무슨 의미를 줄까?
환갑이 되면 자신을 아는 나이라고 한다. 이 나이가 지난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르겠다. 나라는 자신은 나인 것 같은 데 내가 아니다. 나는 나를 가장 잘 숨기고 간직하고 사랑한다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언제쯤 되면 내가 나를 잘 알 수 있을까? 죽을 때? 그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려야 하나? 그전에 나는 나를 알 수 없나? 이런 사색은 나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칼빈 선생은 이 세상에 가장 고상한 지식 두 가지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했다. 20대 이 문구를 읽으면서 그냥 긍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그 의미를 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존재적 지식이다. 존재라고 하지 않고 지식이란 단어를 사용할까? 그것은 존재는 지식, 즉 아는 것이지 감성적이고 가시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고들 하지만 달콤한 거짓말이다. 직업이나 업적은 존재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대중은 이런 거짓말에 농락당한다. 존재의 인식은 지식에서 나온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그분에 대한 지식에 무관심하는 절대다수의 대중이나 무신론자는 하나님이나 영원에 관해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래야 대중을 속여 폭리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말해선 안 된다. 물론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맞지도 않다. 그분에 대한 지식은 그분이 존재자(I AM Who I AM)이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내가 영원에서 안다. 옛날부터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안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의 의존체라고 단순히 말할 수도 있지만 옳은 표현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존재한다. 인식하든 하지 않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존재한다. 그 존재에 관한 바른 인식은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찾는다. 단지 존재하는 자신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고, 존재하게 되는 영원한 존재일 자신에 관해 알아야 한다. 이것은 수사학적으로 알 수 없다. 그분의 존재 앞에서 자신을 냉철하게 살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그만큼 알 수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 정체성이 파악될 때 비로소 자신의 길이 무엇이든 고귀하다. 아! 이런 정체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