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
8일 오전, 1불짜리부터 100달러짜리까지 헌 돈 한 뭉치를 내게 건내 준 용선자 인도인 Mr. Tikam을 먼저 만났다. 친절하게 반긴다. “은행에서 찾은 것 있으면 그걸로 우기고 자기는 좀 빼” 달랜다. 역시 예견한 데로다. 이곳에서 큰 상권(商圈)을 이루고 있는 인도인들이 현지인과 경제적 문제로 알력이 있다고 들었다. 그 역시 인도인끼리 암시장을 형성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외없이 싹싹한 걸 보니 여간 답답하지 않은 모양이다. 심지어 Mr. 육에게 은근히 위협까지 한 모양이다. 공연히 육 선장까지 입장을 난처하게 되기도 하는군.
대리점인 Furucasa사(社)의 직원인 일본인 Mr. 미요시(三吉)와 Bilbao 은행에서 영수증 Copy를 받아 바로 경찰서로 갔다. 얼굴은 내 주먹만하게 작으면서 눈알이 반들반들하여 인상이 꽤나 성가시게 굴 것 같더니 고맙게도 잘 도와준다.
3중 통역이었다. 지폐를 쓴 당사자인 2등기관사의 한국말을 내가 일본어로 하고 Mr. Miyoshi(三吉)가 다시 스페인어로 경찰에 얘기했다. 얼마나 정확히 본래의 뜻이 전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각자 나름대로 얘기하고 적을 뿐이었다.
2등기관사 다음엔 내게 질문을 퍼붓는다. 선장경력, 승선했던 배 척수, 부모의 이름까지 별걸 다 묻는다. “내가 죄인도 아닌데 그런 게 필요하요?”. 그것이 이곳의 규정이라고 미요시가 설명해준다.
두어 시간 걸렸다. “최후의 진술(?)은?” 하고 취조 경찰이 물었다. “당신네 은행 돈 받아 나누어 줬으니 은행을 조사해 보고 틀림이 없으면 그 인도놈을 잡아 족치시오”. 좋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는 부르지 않소? 1주일이나 지난 뒤 그것도 자기들 집에 다시 물건 사러 간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하다니 한국인의 명예를 걸고라도 고발하겠오”.
그들은 ‘따로 불러 조사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인도 상인의 입김이 깊숙이 닿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봐도 위조지폐 같지가 않다. 물론 경찰 말대로 마크의 크기나 색채가 다르고 규격이 다소 차이가 있는 데다 ‘In God We Trust’란 글자가 없다고 했다. ‘이게 가짜다’ 하면 모를까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인쇄술이 그렇게 꼭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형사들이 가짜라 했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발행년도가 1950년으로 28년전의 것었다. 형사, 더구나 경제담당으로서 가짜 지페를 모를 리는 없으니 탄복할 지경이다.
* In God We Trust : 미국의 공식 표어로 우리말로 '우리는 신을 믿는다'는 뜻이라 한다.
귀선하여 전선원을 집합시키고 가진 돈을 조사했다. 그런데 그 ‘글자 문구’가 없는 지폐가 350달러나 더 나온다. 입이 딱 벌어진다. 이미 쓴 것도 있으니 이걸 어쩐다! 회수하고 다시 상륙(上陸), 혹시 형사가 따를지도 모를 일이라 조심하면서 Mr. Tikam에게 가서 따졌다. 이것을 바꿔주라고-. 그도 보더니 고개만 갸웃거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가짜가 아니란다. 그럼 어떻게 된거냐? 이건 소위 ‘유러달러’ 일명 ‘Petro Dollar’라고 해서 미국 정부가 Oil(석유) 때문에 아랍세계를 위해 만든 돈이란다. 아랍인들은 알라신을 믿기에 ‘In God We Trust’란 말을 빼고 찍은 거라고-.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경제담당 경찰관이 그걸 모르고 있을라고? 오히려 이것이 더 가치가 있으며 시중에서는 본토불(本土弗)보다 20%나 더 쳐준다나-. “염려말고 더 있으면 가져오라고” 더 큰소리 친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 아무 염려말고 은행가서 바꾸면 돌려줄테니 문제 없다며 Mr. 육을 보고 함께 같이 가란다. 꼭 뭣에 홀린듯한 기분이다. 믿지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그 돈을 모두 회수하려고 잔꾀를 부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안심해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
인도는 과거 영국에서 독립한 국가이지만 영국의 식민지였던 곳에서 인도인들은 큰 상권(商權)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과거 남아프리카에서는 흑백인의 차별이 극심한 상태에서도 흑인들 보다 더 새카만 인도인들은 백인으로 취급을 받으며 혹시나 백인들이 상점에 들어와 흑인 취급하면 사정없이 몽둥이로 작살내는 광경을 몇번인가 목격한 바 있다.
아무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바꾸어 받기로 하고 한참 웃기까지 했고 즉시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보고하고 영사를 한 번 찾아보기로 하다.
Mr. 육과 찾아간 Solivista 빌딩 11층 2호 영사실(領事室). 아직도 젊고 서글서글하며 의욕적인 젊은 정(鄭)영사 였다. 역시 공무원 특히 외국공관에 나와 있는 사람치고는 환영을 받을 만한 친구다. 저런 친구가 진정 민족과 국가를 위할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우리의 외교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겪었다는 남미(南美)에서의 얘기들은 곧 산 역사일 것이다. 소위 일국(一國)의 대사관 무관(武官)이 대낮에 택시를 타고 가다 노상강도에게 탈탈 털리고는 전화로 영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창조해 내고 어려운 일일수록 힘써주는 사람들이 진정 국민의 공복으로서 환영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이 과정에서 2등기관사나 내가 한 두 번은 유치장 신세를 졌을 법한데 그런 일을 없었던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역시 선진국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믿기질 않아 다시 대리점의 Mr. Miyosi를 만나 Mr.Tikam의 이야기를 경찰에서 확인해 보려했다. Mr. Miyosi 역시 “그럴 리가?” 한다. 전담경찰이 그걸 모를 리가 없겠냐? 말만 좀 통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나 경찰이고 은행놈들이 영어 하는 놈이 그리도 없는가? 나 보다도 더 못한다니!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일까?
강 선장 아파트에 가서 그 얘길 했더니 자기도 1주일 전에 은행에서 $1,500을 찾았다면서 점검해보는 중 역시 그 ‘In God We Trust’란 글자가 없는, 그 가짜라는 지폐가 두 장 있었다. 곧바로 은행에 가서 담당계원에게 물어보니 이놈의 계원도 어리둥절, 모르는 모양이다. 결국 지점장이 나와서 해명을 한다. ‘가짜도 아니고 유러달라도 아니고 Petro달러도 아니고, 더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미국에서 1930년대에 발행된 것이라고-.’ 직원에게 지시하여 견본이 찍힌 두툼한 책을 가져오게 하고는 확인시켜준다. 정확하게 그해 발행된 지폐의 번호와 사진이 나와 있다. 같은 액수의 지폐라도 발행연도에 따라 그 문구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으며 색깔이나 모양, 크기도 모두 다르다.
이를 수가! 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그럼 그렇지, 이 개xx들아!’. 바로 강 선장과 함께 경찰서로 달려갔다. 담당 형사는 어제 그 지폐를 복사하며 서류를 정리중이다. 강 선장이 친구라고 밝히고 자기도 그 돈을 은행에서 받았음과 전후를 설명했다. 다시 형사와 은행으로 가니 역시 지점장이 나와 같은 설명을 하며 확연히 밝혀주었다.
그러나 경찰관 놈은 겸연쩍은가 ‘아무래도 종이가 얇고 Maro(나쁘다)’라며 간다. 정 영사, 대리점 및 Canpex의 Mr. 육에게도 전화로 연락했다. 공연한 일로 죄인시(罪人視) 된 것이 억울하다.
오후 2등기관사를 앞세우고 인도놈의 상점으로 갔다. 모조리 한 주먹씩 올려 주고 싶지만 정작 고발을 했다는 제일 큰형이란 작자가 없다. 중간놈이 어느 틈에 어떤 연락을 받았는지 문제 없다고 ‘Sorry’가 아닌 ‘No problem’만 연발한다. 결국 말에 진 셈이다. 영어라도 능통했다면 어찌했어도 망신을 줄 수 있었을 것인데-. 소위 외국인을 전담하는 경찰들도 문제가 있다. 한마디의 영어도 못하면서 외국인을 범인 취급하다니. 어쨌거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은행지점장의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모습이 떠 오른다. 마치 ‘아이고 이 등신들아! 그래 가지고 경찰하고 선장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배우고 아는 놈이 윗길이다. 소위 관광지로서 알려져 있고 연간 수십만의 관광객과 자유항으로서 많은 상선과 어선기지로서 수많은 선박들이 출입항을 하고 있는 이곳의 경찰로서 그걸 모르고 있데서야 말이 안 된다. 물론 인도인의 고발이 있었으니 그 인도놈도 그렇지만 일단은 자신이 모르면 은행에 조회라도 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텐테-. 나도 등신은 등신이었다. 달러를 늘 사용한다면서 그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얼마 전 Africa 방면에서 한 여인이 수만달러의 위폐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신문에 났었다는 얘길 어제 대리점 직원인 Mr. Palso한테 듣긴했다. 사실여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욱 경찰이나 Mr.Tikam이 바짝 긴장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오히려 내 쪽에서 그놈들을 상대로 고소할 수도 있으렸다. 겉보기엔 미남형이던 그 경찰녀석도 함께 엮어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무런 탈 없이 해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이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오명을 남길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는데 비하면-. 시간이 늦어 강 선장의 아파트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시 법원의 호출장을 받았다. 지정된 날짜에는 이미 이곳을 떠나 항해중일지도 모르지만 뒷일을 위해 대리점엘 들렸다. 이미 끝난 일을 왜? 서류가 마드리드(Madrid: 스페인의 수도) 본청까지 보고되었으니 형식을 갖춰 재판형식은 거쳐야 한다고 했다. 내일 다시 2/E와 함께 출두하랬다. 인도놈을 상대로 고소를 할까? 아무 일 없으니 그만두란다. ‘그럼 왜 불러요?’. 28일 그 인도놈과 같이 확인, 그 돈을 다시 찾아가는 절차가 남았단다. 어쩌면 이놈들이 벌써 인도놈들과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느낌이다. 누명을 둘러쓴 나는 무엇으로 보상받냐? ‘No Problem’만 연발이다. Canpex사(社) 인도인(印度人)에게 받은 돈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한 번쯤 다그치고 따져보면 무슨 수가 생김직도 한데…. 쓴 입맛만 다시다.
법원에 출두, 확인 서명을 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판사(判事)랬다만 믿기지 않는다. 그들이 길거리에서도 늘 하던 뽀뽀라도 한 번 해주지 않고…. . 택도 없는 일이지만 나 혼자의 생각일뿐이었다.
B.B은행에서 선용금 찾았다. 또 그런 돈 있는지 확인해보란 Agent의 말, 역시 100$짜리가 한 장 있다. 이것 봐 또 있지? 양 어께만 들썩, 그뿐이다.
그리고는 6월 22일 자정을 30분 앞둔 시간에 라스팔만스항을 떠나 지중해→스에즈 운하→홍해→인도양→말라카해협→동지나해를 거쳐 일본까지의 40여일 간의 긴 항해를 시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