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사화
1546년 윤원로와 윤원형의 권력다툼으로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정미사화의 계기는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이었다.
1548년 안명세 필화사건, 1549년 이홍윤 옥사 등이 이어졌고 5~6년 동안 100여 명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중종이 사망한 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는 윤원로·윤원형 계열과,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의 사이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대윤, 소윤).
이것은 세자였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한 뒤 현상화되어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그 여파로 정미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李芑)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렀다.
일단 28명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따라서 명종 초년의 강력한 정치세력은 이들 공신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집력은 공신책록의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여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윤임 등의 죄를 결정한 중신들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당시의 장관급 거의 모두가 공신에 책록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이언적·신광한(申光漢)·민제인(閔齊仁) 등 사림파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훈구파와 본질적으로 달라서 결국 공신에서 탈락했다.
현실적으로 위사공신 집단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의존했다.
1546년에는 윤원로와 윤원형이 권력을 다투어 윤원로가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파 공신집단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되는 사림파 계열의 인사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정미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이었다.
정언각(鄭彦慤)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서서 기다릴 것인가"라는 뜻의 벽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에 이기 등은 이것이 을사옥(乙巳獄)의 뿌리가 남은 것이라 하여 대윤의 잔당으로 지목된 송인수(宋隣壽)와 이약수(李若水) 등을 죽이고 권벌·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 등 20여 명을 유배보냈다.
그뒤에도 1548년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가 당한 안명세(安名世) 필화사건, 1549년의 이홍윤(李洪胤) 옥사 등으로 이어졌고 5~6년 사이에 죽거나 유배된 자가 거의 100명에 달했다.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
조선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獄事)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불린다.
1547년(명종2)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果川)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겠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빙(李若氷)을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백인걸(白仁傑)ㆍ김난상(金鸞祥)ㆍ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이천계(李天啓) 등 30여 명을 유배하였다. 《明宗實錄 2年 9月 18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