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은 1975년에 설립하여 대덕연구개발 특구에 입주한 1호 연구기관이다. 헌법에 설립 근거를 두고 있는 국가측정표준대표기관으로서 측정표준 확립·유지·향상이라는 고유 임무에 매진해 왔다. 측정은 모든 과학적 연구의 기반이며, 측정표준은 과학과 산업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한다. KRISS가 쌓아 온 국가측정표준 및 측정 과학기술 역량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 달성한 눈부신 산업 성장의 발판이 됐다.
현재 KRISS를 비롯한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새롭게 요구되는 역할은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초격차 전략기술 확보다. KRISS가 보유한 K-측정표준과 측정 과학기술은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을 넘어서 세계를 선도하는 성과를 낳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경
K-측정표준으로 전 세계 표준 선도
설립 당시 과학기술 선진국들의 지원을 받았던 KRISS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의 표준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 측정표준 기관과 활발한 연구 협력을 펼치는 동시에 수많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국의 측정표준 발전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KRISS는 2022년 11월부터 3년간 아시아·태평양 측정표준 협력기구(APMP) 의장국으로 수임 중이며, 미터협약 150주년과 KRISS 창립 50주년을 동시에 기념하게 될 내년에는 한국에서 APMP 총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KRISS의 선도적 역량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성과는 시간 표준 확립이다. KRISS는 지난 2021년 자체 개발한 이터븀 광시계 ‘KRISS-Yb1’으로 세계협정시 생성에 참여하는 데 성공했다. 창립 이래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표준시 제공을 통해 전자상거래·통신·항법 시스템 등 첨단산업 발전의 기틀을 닦은 데 이어 전 세계 시간의 기준 생성에도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광 시계로 세계협정시 생성에 이바지하는 세계 다섯 개 나라 중 하나이다.
국가전략기술 국산화
KRISS는 고유 임무인 측정표준 확립뿐 아니라 국가·사회적 문제 해결과 미래 첨단산업을 이끌 핵심기술의 국산화에 집중해 왔다.
그 일환으로 반도체 산업으로 대표되는 소재·부품·장비 부문의 기술 자립에 앞장서고 있다. 2023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된 ‘적층형 반도체 나노소자의 실시간 3D 측정 기술’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소자의 나노 적층 구조를 단 한 번의 측정을 통해 3D 이미지로 실시간 구현한다. 산업현장에서 공정 중단 없이 소자의 품질을 검사할 수 있어 생산성을 대폭 높일 수 있다. 국내 기업에 기술이전이 완료돼, 반도체 분야 글로벌 경쟁력 향상에 이바지할 전망이다.
국민 삶의 질 향상할 신뢰성 있는 기준 제공
국가측정표준은 첨단산업뿐 아니라 일상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KRISS가 개발·보급하는 인증표준물질(Certified Reference Materials, CRM)은 측정 내용과 분석 방법이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 물질로, 다방면의 산업계에 보급돼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기여하고 있다.
식품 분야 CRM은 신생아부터 성인까지 국민의 밥상 건강을 책임진다. 조제분유 속 발암 추정 물질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분유 CRM, 커피콩 속 영양·유해 성분 분석의 기준이 되는 커피콩 CRM이 대표적 사례다.
환경·의료 분야 CRM도 빼놓을 수 없다. KRISS가 최근 국내 도시환경 특성을 반영해 개발한 미세먼지 CRM은 미세먼지 유해 성분 분석과 발생원 추적에 활용할 수 있다. 신생아 선별검사나 올림픽 도핑검사에 쓰이는 건조혈반(DBS) CRM은 DBS의 측정 신뢰성을 향상하는 동시에 DBS의 원격의료 활용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밀 측정기술로 의료·인프라 등 전방위 활약
KRISS가 갖춘 최상위 수준의 측정 과학기술은 융합연구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작년 말 피부 상처 치유와 재생의 원리를 규명한 성과 역시 KRISS가 보유한 비선형 광학 이미징 기술과 단백질 정밀 분석기술의 융합으로 탄생했다. 생체조직 미세환경을 정밀 제어해 섬유화 현상을 조절하는 방법을 제시한 성과로, 상처 치유 보조 의약품 개발과 간 섬유화, 폐 섬유화 등 관련 질병의 치료법 연구에 적용할 수 있다.
KRISS의 측정 기술은 산업인프라의 안전성 확보에도 든든한 발판이 되고 있다. 지난해 개발한 ‘지하 매설 배관 파손 예방 및 조기 탐지 시스템’은 국내 기술이전과 미국, 유럽 특허 출원까지 마쳤다. 배관 파손으로 인한 누출 탐지에 초점을 맞춰 온 기존 기술과 달리, 무단 굴착 등으로 발생하는 배관 누출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상수도, 송유, 가스, 열 공급 등 다양한 장거리 배관에 적용할 수 있다.
양자과학기술 발전 가속해 글로벌 선도 연구소로 부상
2024년 현재 KRISS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양자 과학기술 분야다.
지난 30여 년 동안 국내 양자 과학기술 연구를 개척해 온 KRISS는 양자 기술 분야 국가대표 연구기관으로 손꼽힌다. 양자컴퓨팅, 양자 보안 네트워킹, 양자 센싱, 양자소재/소자 등 양자 과학기술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 역량을 갖추고 있다.
50 큐비트 초전도양자컴퓨터 모형
이러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지난해 3월에는 과기부로부터 양자 국가 기술 전략센터로 공식 지정됐다. 양자 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연구현장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국가적 관점의 양자과학기술 전략 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다. 올해부터 원장 직속 조직으로 정식 출범해 양자 정책연구의 허브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올 초에는 ‘국방 양자 컴퓨팅 & 센싱 기술 특화연구센터’도 KRISS에 설립됐다. 미래 국방 양자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센터다. KRISS는 2029년까지 총 244억 원을 투입하는 국방 양자 분야 최초·최대 규모의 기초연구 사업을 주도할 예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과기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가 기술연구센터(NTC) 구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차세대 반도체, 첨단 바이오, 수소 등의 국가전략 기술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KRISS는 지난 50여 년간 쌓아온 연구 역량을 결집해 급변하는 시대, 융합과 혁신을 향한 국가적인 요구에 부응해 나갈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학교 물리교육학 학사
KAIST 물리학 석·박사
(전)KIST 유럽연구소장
(전)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시간주파수자문위원회 한국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