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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정보 스크랩 한국인의 화
이경숙 추천 0 조회 77 11.07.15 16: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익히고 삭혀서 화가 화하여 화되게 할지니
 
 
 

화와 노

한국인의 화는 한자로 火라고 쓴다. 화는 곧 불이고 불길이다. 집을 태우는 불이나 마음을 태우는 불이나 가림없이 한국인은 화라고 일컬어 왔다. 그러니 ‘화가 났다’는 그 화는 심화(心火)인 셈이다. 마음에 불이 났을 때, 한국인은 ‘화가 난다’라고들 해왔다. 불이 나나 화가 나나 그게 그거다.
낱말 사전에서 하듯이 화를 풀이하자면 별 수 없이 노여움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화와 노(怒)를 소리가 다를 뿐, 뜻이 같은 말로 처리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같이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이웃 일본의 경우, 한자의 怒를 ‘이까리’라고 읽는데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화와 거의 같은 뜻의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火로 이까리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일본인은 ‘노기 충천’해도 ‘화기충천’하지는 않는다. ‘열화(烈火)와 같이 노한다’는 말은 쓰는데도 火와 怒를 동격으로 잡지는 않는다. 일본인은 노여움을 비유법에 의지해서 불과 맺어 놓기는 했지만, 火와 怒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노여워는 해도 화는 안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데 한국인은 노여움도 내고 화도 낸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서 많이 읽힌 어느 외국인이 쓴, ‘화’라는 제목이 달린 책의 표지에 anger라는 영어낱말이 적힌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화는 별수 없이 anger나 아니면 rage라고 옮겨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fire라고 번역할 수 없을 것은 뻔하다. 한데 ‘옥스포드 대영 사전’에서는 ‘감정에 불붙이기’라고 anger가 풀이되어 있다. 영어에서도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노기를 불기운에 견준다. 그러나 노기를 바로 fire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점도 일본과 같다. 이런 보기들은 화가 거의 한국인만의 독점적인 노여움이고 노기인 것을 헤아리게 한다. 그렇듯이 한국인의 화는 민족적 차별성과 문화적 개성이 강한 말이다. 심지어 한자의 본산인 중국에서조차 火와 怒를 일대일로 맞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니 노를 대신하는 한국인의 火는 순전히 한국식이다. 그런 한자 사용법은 중국에도 없을 것 같다. 그러니 ‘화난다의 火’는 한국 한자다. 그래서 한국인을 위해서는 노(怒)라는 글자를 달리 고쳐야 한다. 즉, 奴 자 이래에 火나 를 받침으로 써야 옳을 것 같다.

거듭 확인하자. 한국인은 심화(心火)를 남달리 지닌 사람들이다. 마음에 불씨가 간직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화적인 내림(전통)으로 온돌방 살이를 해 왔다. 불골이 사통팔달로 뚫린 구들장을 방바닥 삼아서 잠을 자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 새엔가 마음 안에도 불골을 내고 구들장을 깔고 하면서 살아들 온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꼴로 한국인은 음식도 뜨거운 것을 즐겨 왔다. 하루 세끼 모두 더운밥에 더운국 먹고 살아들 왔다. 지지고 볶고 덖고 그리고 또 조리고 끓이고 하는 것이 조리법의 왕좌에 자리하고 있었다.
곰국, 미역국, 우거지국, 선지국 등등은 으레 펄펄 끓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설렁탕, 보신탕, 추어탕, 감자탕, 용봉탕 등등 하고 많은 탕은 으레 열탕(熱湯)이다. 먹거리만이 아니다. 약에도 쌍화탕, 갈근탕 등을 비롯해서 별의별 탕이 부글댔다. 오죽하면 약재(藥材)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탕재(湯材)였을라고! 해갈(解渴)탕 쯤 되면 더 할 말이 없다. 목이 타는 갈증을 다스리는 데에 하필 탕이라니, 어름도 냉수도 아니고 굳이 탕이라니!
뜨거운 방에서 뜨거운 국 마시고 끓는 약 들면서 한국인은 그 마음 바탕에도 화성(火性)을 불지펴 왔다. ‘성이 난다’고 할 경우, 그 성이 어쩌면 성(性) 또는 성질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한국인의 인성 자체에 화가 깊이 내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촌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성낸다’를 ‘성질낸다’ 또는 ‘성질부린다’ 그리고 ‘성깔부린다’ 라고도 한다는 것에 유념하게 되면 이 촌탁이 반드시 지나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될 듯하다.
이 경우, 한국인이 그들 혼의 일부를 적어도 ‘혼불’이라고 일컫고 또 그렇게 믿어 왔다는 것에 착안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인에게 혼은 곧 혼불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인은 그러기에 ‘화혼(火魂)’을 지닌 ‘화인(火人)’이다. 그 마음 속에 화성(火性)을 갖추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니 한국인은 ‘화성인(火性人)’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저 우주 공간에 살고 있다는 화성인(火星人)과 같은 항렬자를 나누어 가진 인종이 바로 한국인이다. 그만큼 한국인의 화는 별나고 또 그들 화 역시 사뭇 별종이다.
마음의 화상
 
한국인은 ‘화 콤플렉스’를 간직하고 있다. 콤플렉스라서 당연히 의식의 산봉우리와 무의식의 골짝 양 쪽에 걸쳐서는 다양한 질감(質感)과 채색(彩色)과 그리고 생태를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怒와 통째로 일대일로 맞바꾸어질 것도 아니고 그것과 끝까지 동종(同種) 동색으로 끝판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화는 怒와 상당 부분 겹치되, 결코 겹치기만 할 수는 없을, 그만의 색다른 속성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을 것이다.
노와 화는 직경이 같은 두 개의 동심원은 아니다. 중심이 아주 근접해 있지만 직경이며 그 둘레는 상당한 정도로 다른 두 개의 원 중에서 직경이 훨씬 큰 쪽이 한국인의 화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화가 노기와는 다르게 매우 그 복합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인은 화를 경험하면서 현장에서 드러나는 화의 생태 또는 동태를 매우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보통 ‘화가 난다’ 그리고 ‘화를 낸다’고 가장 흔하게 또 많이들 말하고 있지만, 이 ‘난다’나 ‘낸다’는 화의 동태를 말할 때, 많이 쓰이는 그만큼 덜 개성적이다. 이를테면 중성적이다.

개성이 드러나는 낱말의 무리를 통틀어서 보면, 한국인은 화를 매우 까다롭게 경험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화가 엄청 다난(多難) 다색(多色)이라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①난다, 낸다, 발작한다 ②치바친다, 치솟는다, 차고 오른다, 치고 오른다, 치민다, 솟구친다, ③터진다 ④뒤집힌다 ⑤부글댄다, 들끓는다, 끓어오른다, 이글댄다 제 ①군이 주로 중성적이기는 하지만, 발작은 그렇지만도 않다. 내고 나고 하다가 드디어 그 극점에서 화는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미 화는 격동이고 매섭고 사납다. 거칠기도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제 ②군은 깊은 골의 밑창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것이 억누르기 어렵게 밖으로 또는 위로 용상(聳上)하거나 분출(噴出)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화는 화산의 용암 흐름 같은 것에 견주어질 것이다. 제 ③군은 그야말로 폭발이다. 폭탄의 작렬(炸裂)같이 화는 터지는 것이다. 박살이 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과는 좀 다르게 제 ④군은 상하가 뒤죽박죽이 되면서 마음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곧 화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 ⑤군은 작열(灼熱)하고 불타고 하는 것이 화의 발동임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애가 탄다’, ‘가슴에 불이 난다’ 등 한 무리의 화의 발작에 대한 우원법, 곧 둘러말하기까지 합산하면 화는 그야말로 초열지옥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 경우, 흔히들 ‘화통(火筒)을 삶아 먹었다’고들 하기도 하는 것을 함께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들 다섯 무리를 총괄해서 화에 대해서 검증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잠정적인 결론을 서두른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불길이 또는 작열(灼熱)하는 것이 마음속에서 폭발하듯이 작렬(炸裂)하듯이 분출하고서는 마침내 혼돈, 곧 카오스 속에 마음이며 정신, 감정이 빠져든 그 상태 또는 동태가 다름 아닌 화라고 말해질 것 같다. 정신 상태가 무정부 상태로 빠지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되고 심하면 완전히 탈인격의 경지에 함몰한다. 좌충우돌하고 무차별하게 남들에게 덤비게도 된다. 이에서 자연스럽게 공격기제의 발동, 파괴충동의 폭발 등이 연상될 것이다. 불길이 일어서는 옆으로, 이웃으로 사납게 번져가는 상황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충동과 기제의 발작은 타인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해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음이 입은 화상(火傷)이라서 화는 당연히 고통이고 쓰라림이다. ‘원통하고 분해서 못 살겠다’는 것은 그래서 하는 말이다. 화는 이래서 원한 의식과 직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분풀이’라는 이름의 복수도 노리게 된다. 그리고 화가 만성화하면 소위 화병이 되는 것이지만, 이 정신 신경의 장애는 지금껏 들어 보인 화의 증상 이외에 냉담한 자폐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원귀(寃鬼)로 화할 수도 있다.
묵은 시대의 여인네들이 ‘내 마음은 숯검댕이야!’라고 통탄했을 때의 숯검댕이는 타다 남았다기보다 미처 타버리지 못한 마음의 묵은 불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생태가 또는 동태가 다양한 만큼, 화의 종류도 상당히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노여움, 노기가 동일한 무리를 이룰 것이고 이와는 달리 분(憤), 분(忿), 분노, 분통(憤痛), 울분(鬱憤)이 또 다른 패거리를 이룩할 것이다. 달리는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이 당당히 또 아주 의젓하게 한 파를 형성할 것이다. 마지막 파를 제외하고는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화는 이로울 게 없다. 그래서들 ‘화를 삭이라’고 한 것이다.


화는 내기만 해서는 안된다. 내기만 하는 화는 화재(火災)다. 폭발이다. 그리고 재앙이 된다. 화는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다같이 화(禍)가 되고 만다.
화를 재화(災禍)가 되고 화난(禍難)이 되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화가 화난(和暖)의 경지에 들게 무진무진 애써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에 들게 됨으로써 남들, 그나마 화를 부추긴 남들과 화동(和同)하게 되는 그 온난한 정신과 감정이야 말로 화(禍)를 넘어서서 화(和)가 된 한국인의 화다.
삭임질은 참음이나 다스림만은 아니다. 적극적으로는 소화하는 일이고 발효시키는
일이다.
술 익듯 마음이 그리고 감정이 익게 하는 것이 삭임질이다. 익히고 삭여서 화가 화(化)하여서 화(和)가 되고 인화(人和)가 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화가 승화하여 화가 되는 경지는 본인의 인격만이 아니라 타인을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성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화가 화(和)가 되면, 공분 아닌 ‘사분(私憤)’도 의분(義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화의 양극은 화(禍)와 화(和)다. 한국인은 누구나 그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다함께 마음 속 깊이 새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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