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개요
면적 72.9km2, 해안선 길이 64.43km, 최고봉 986m, 인구가 1만여 명인 울릉도는 1읍(울릉읍), 2면(북면), 서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청은 울릉읍 도동리에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 동해를 굳건히 지키며 외롭게 떠 있는 섬으로 여행을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험한 파도를 뚫고 배를 타고 가는 것은 물론, 그 배를 타기 위하여 멀리 경북 포항과 후포, 강원도의 묵호, 강릉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출발하는 여객선도 하루에 딱 한 번뿐이다. 동해는 서남해와 달리 바람이 최고 12m만 불면 풍랑이 일어 다니지 못한다. 서해와 남해는 초속 14m가 기준인데 울릉도는 더 엄격하다. 기상에 따라서 1년에 100일 정도 결항이 반복되지만 일기예보를 보면 어느 정도 예측은 할수 있다.
울릉도의 자연환경 및 지역개관
울릉도는 경상북도 동북단 동해상에 위치한 군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 72.9km2, 해안선 길이 64.43km인 울릉도는 성인봉(聖人峰, 986m)이 최고봉이다. 육지와의 거리는 경상북도 포항에서 217km, 후포에서 159km, 동해 묵호에서 161km, 강릉에서 178km이다.
울릉군의 주도(主島)는 울릉도이며, 부속도인 관음도는 예전에 유인도였다가 지금은 무인도로 변했으나 연도교가 놓여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그 외 울릉도의 저동항 바로 앞에 있는 죽도(1가구 2명), 독도斷崖)에 둘러싸였고, 북쪽에는 200m 정도의 낮은 산지가 가로막혀 있는 울릉도 유일한 평야이며 유명한 관광지이다.
해질무렵 저동항
울릉도 역사 지리적 특성
울릉도는 국토의 막내이며 사연이 많은 곳이다. 울릉도는 512년(지증왕 13) 때 이사부 장군에 의하여 신라에 귀속되었다. 그 당시 울릉도를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으며, 우해왕(于海王)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때 신라 장수 이사부 군사가 처음 우산국에 상륙하여 이 작은 섬을 쉽게 정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와 험준한 산악에서 살아온 우산국 주민들은 손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자 이사부 장군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쓰게 된다. 이 섬에 맹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무로 사자상을 만들어 불을 뿜어대는 위력을 발휘한다.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놓아서 죽이리라’ 하니 그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고 쓰여 있다. 사자만 보아도 놀라운데 입에서 불까지 토해내는 바람에 섬사람들은 그만 항복하고 만 것이다. 백기를 든 우산국의 우해왕은 이 놀라운 나무 사자로 우산국을 잘 통치해 달라고 유언과 동시에 자신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사부 장군은 항복한 우해왕의 유언을 들어 주기로 하고 그 나무로 만든 사자를 해변으로 던졌는데 그만 그 사자상이 굳어져서 지금의 서면 남양리에 있는 사자봉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해왕이 투신할 때 벗어 두었던 투구도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의 투구봉이 되었다.
봉래폭포 가을
고려 태조 13년에 우산국 사람 백길토두로가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 때에 울릉도가 산림이 울창한데다 섬이 크고 토지가 비옥해서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왕이 전해 듣고, 1157년(의종 11)에 김유립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고려사』에는 고려 현종 9년에 동북의 여진족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현종 때부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930년(태조 13)에 우릉도, 덕종 때는 우릉성, 인종 때에는 울릉도 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울릉도는 조선시대 태종 이후 공도정책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살지 않았으나 숙종 19년(1693),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1696년(숙종 22)에 울산에 살던 어부 안용복 등의 눈부신 활약으로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끝나게 되었다. 그 뒤에 관리를 파견하여 3년마다 1회씩 울릉도의 순찰을 강화하여 일본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영국처럼 해양을 중요시 여기면서 울릉도와 독도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한반도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라는 고종 황제의 명을 받들어 벼슬을 시행하던 김옥균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고종 19년(1882)에 개척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울릉도에는 한국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나라의 허락도 없이 몰래 들어가 도벌과 해산물, 약초를 채취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울릉도는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49년 정부 수립 후 울릉군이 되었고,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하였으며, 2000년 4월 7일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를 신설하였다.
관광지로 떠오르는 울릉도
예전의 울릉도는 외로운 섬으로 불릴 만큼 인적이 뜸했다. 그 이유는 워낙 파도가 높고, 잘못하면 풍랑주의보 때문에 3-4일간 붙잡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두 옛 이야기가 되었다. 작년 한해에 무려 40만이 넘는 관광객이 울릉도 여행을 하였으니 섬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관광지로 대변신을 하였다. 울릉도의 가장 큰 마을인 저동항에는 유명한 봉래폭포가 있다.
여름철에 내수전해수욕장에서 야영을 많이 한다. 내수전 약수터에서 한참을 위로 올라가면 죽도
공도정책 실시 이후 울릉도에 맨 처음 개척민이 도착한 천부마을의 안쪽에 있는 원천부 마을에서 만난 김일주(72), 안금자(67) 부부가 쟁기를 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내는 소 대신 쟁기를 끌고, 남편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있었다. 원천부 마을 위쪽으로 가면 나리분지로 가는 도로가 나 있고, 여기 분지에서 잠시 머문 다음에 다시 천부항으로 발길을 옮긴다.
해안길을 조금 가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하수로 발전을 하는 추산수력발전소가 있다. 그 위로는 거대한 송곳봉이 솟아 있다. 추산 바다에 떠 있는 코끼리바위를 보면서 나아가면 현포항에 닿는다. 현포항을 구비구비 넘어가면 태하리 성하신당이 나온다. 선착장 우측에 있는 모노레일을 타고 태하등대 앞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해안절벽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였다. 이곳은 ‘월간 산’에서 추천하는 한국 10대 절경 중 하나이다. 터널을 지나오면 남양에 사자바위와 투구봉, 통구미마을의 거북바위가 보인다. 코리아나호가 정박해 있는 사동을 지나면 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다. 고갯길을 막 넘어가면 울릉도의 중심지 도동항에 이른다.
볼거리가 많은 울릉도는 아직 항공편이나 위그선 취항이 요원하지만 머지않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울릉도의 교통수단은 유일하게 여객선뿐이다.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구가 너무 작아서 저동, 사동항 등으로 분산되어 여행객들이 들어온다. 또 다른 불편은 서해나 남해와는 달리, 연간 3개월 정도 여객선이 결항하기에 겨울에는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래도 울릉도와 독도
지금도 울릉군에서는 육지와 울릉도를 이어주는 여객선, 독도행 여객선, 섬 일주 유람선, 도동에서 죽도로 향하는 배들을 안전하게 점검하고 각종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 긴급대응과 훈련을 하면서 육지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관음도 연도교
울릉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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