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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영성의 핵심은 성서적 신앙에 뿌리를 둔 영성이다. 이 성서적 영성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영성과 만나면서 적어도 중세 시대까지 서구의 영성 전통을 지배해 왔으며, 종교개혁이나 근ㆍ현대 신학의 다양한 새로운 흐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근본 패러다임은 지속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영성 또한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교부시대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에 끼친 플라톤 철학 내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그리고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은 지대했다. 그 후 근대 과학의 지배적 영향 아래 전개된 근대 서구 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뒷받침해 줄 만한 사상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영성은 고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의 성서 중심 신학,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나 윤리적 관심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을 정초하려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인간 실존의 자각과 분석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려는 실존주의 신학, 하느님의 계시에 신학을 정초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전통적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해방신학,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초한 과정신학 등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나, 결코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된 전통적인 신학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비록 서구의 지배적인 영성 전통이 성서적 영성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그리스 철학의 영성, 특히 신플라톤주의 영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만물을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간주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monistic) 실재관 내지 세계관이나 신을 부동의 제일 원인으로(causa prima, unmoved mover)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관은 신을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인격적 실재로 보는 성서적 신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따라서 서구 신학과 영성을 지배해 온 주도적 패러다임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해서 신과 세계, 성과 속, 초자연과 자연,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 종교와 문화, 그리고 교회와 국가라는 이분법적 구별 위에서 그 관계를 논하는 사고의 구도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구도가 현대 세계에 이르러 심각한 도전을 받아 흔들리거나 와해되게 되었다. 현대 서구 사상사는 간단히 말해, 성서적 계시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고 세속화된 이성이 홀로 독자적 길을 걸어온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이성 또한 보편성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 현대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위기, 서구적 영성의 위기는 일차적으로 성서적 신관과 이에 기초한 영성의 위기로 규정될 수 있다.
성서적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로서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역사의 종말에 심판과 구원을 베푸는 인격적 신으로 이해된다. 성서적-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영성은 간단히 말해서 창조(creation)와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이다. 창조와 구속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양대 주제로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러한 신학적 테두리 내에서 형성되어 왔다.
창조의 영성은 우선 창조주와 피조물의 엄격한 질적 차이와 존재론적 간격에 의거하여 우상숭배, 즉 피조물의 절대화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자연이나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나 권위도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창조 신앙의 영성은 이성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서구적 비판의식의 초석을 이루어 왔다. 초월적 하느님 앞에서 어떤 피조물도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나 체제는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으며 항시 신의 초월적인 도덕적 의지와 권위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
창조의 영성은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어 존재를 부여받은 것임으로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긍정의 영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서 하느님이 존재를 허락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이루어진 자연 세계에는 하느님의 선함과 지혜가 깃들어져 있으며, 세계의 존재와 질서는 이미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은총의 질서로 이해된다.
성서적 창조 영성은 피조 세계 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한다. 인간은 여타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격성, 자유와 주권에 동참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원형이자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닮고자 갈망한다.
“윤리적 유일신론”(ethical monotheism)으로 규정되는 성서의 신관은 인간에게 도덕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은 도덕적 영성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도덕적 의지를 지닌 인격신으로서, 인간은 그의 도덕적 명령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곧 세계와 인생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긍정을 뜻하며, 그 실현을 위한 실천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에서는 따라서 하느님과 도덕성, 영성과 도덕적 실천은 불가분적이다.
성서적 영성은 또 창조 영성과 더불어서 구속의 영성이다. 창조의 세계는 그 근본적 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왜곡되어 있음을 성서적 신앙은 말한다. 성서적 영성은 따라서 인간의 죄악성을 성찰하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영성이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는 영성이다. 성서적 구속의 영성은 이와 동시에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며 죄악에 물든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살려는 실천적 영성이다.
주목할 점은, 하느님이 지은 세계의 선함을 긍정하는 창조의 영성과 타락한 세계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는 구속의 영성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원적 대립이 아니며, 창조 영성나 구속의 영송 모두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그리스도교적 영성은 현대에 와서 여러 면에서 커다란 시련에 봉착해 있다. 우선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인격적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 밖에서 세계를 다스리고 때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뉴턴 유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다윈 유의 진화론적 시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밖에서부터 자연과 역사의 과정에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초자연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고, 세계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의도나 도덕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동양의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영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성서적 신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전통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이해되어 왔다. 신이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의 행위를 통해 피조물들을 무로부터 유로 불러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배후에는 우선 창조신의 존재론적 배타성과 우선성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신만이 스스로 존재하며, 세계의 존재나 여타 사물들은 전적으로 신에 의지하여 존재를 확보하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로부터 유가 생길 수 있는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란 것이 어떻게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세계는 전적으로 신의 자의적 결단에 의해 창조된 그야말로 우연적 존재로 보이며,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할 이유나 필연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성서의 창조설화는 세계 창조의 목적이나 동기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과 세계가 별개의 실재로 간주됨에 따라 세계 없는 신의 존재 가능성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신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무신론의 단초를 이미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와 목적, 섭리 같은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인격적 의지에 의한 세계 창조는 예로부터 악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변신론 혹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부담을 지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자연계까지 포함하여 세상만사를 주관하며 인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하느님과,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와 역사의 엄청난 비극과 부조리 사이에는 어떠한 이론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부터 자연계와 인간계에 개입하고 다스린다고 믿는 성서의 초자연적 신관은 현대 세계에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신과 세계,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성서의 신관과 인간관은 자연세계의 탈성화(脫聖化 desacralization)를 초래함으로써 오늘날의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자연 없는 신 혹은 신 없는 자연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성서의 신관은 자연으로부터 신성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또한 자연과는 별도의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 자연에 ‘속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연을 초월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군림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이다.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신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그리스도교(유대교, 이슬람도 마찬가지)의 인격신관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신의 인격성이 인간의 초월성과 존엄성을 담보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 동양철학적 관점에서는 신의 인격성은 궁극적으로는 무한한 실재를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유비적으로 파악한 무지의 소산이며 신격의 비하를 뜻한다. 동양 종교에서도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인격화해서 섬기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도교에서는 도, 유교에서는 천을 인격화하며, 불교에서는 상을 초월하는 부처를 형상화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의 종교적 요구에 응하는 저급한 형태의 신관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가장 정통적 사상을 대표하는 불이론적(不二論的) 베단타(Advaita Vedānta) 철학에서는 풍부한 인격적 속성을 지닌 브라흐만(saguna-brahman)과 일체의 속성을 여읜 브라흐만(nirguna-brahman)을 구별한다. 전자는 인간의 각종 필요와 욕구에 따라 다양한 형상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신, 풍부한 신화를 통해 전수되며 신상을 통해 형상화되어 신전에 모셔지는 신들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일체의 속성이나 형상, 이름이나 이야기를 초월한 신, 오직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파악되는 순수 정신(cit,), 순수 존재(sat), 순수 희열(ānanda)로서의 신, 말하자면 신 아닌 신 혹은 신위의 신(God above God)을 가리킨다. 힌두교가 이렇게 현상적 신과 본체적 신, 혹은 드러난 신과 감추어진 신성을 구별하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잡다한 신의 모습들이란 불가피하게 인간의 자기 모습이나 욕구의 투영일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의 인격성은 동시에 신과 인간의 거리를 함축한다. 인격성은 필연적으로 타자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 신관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타자적 성격을 끝까지 보유한다. 신의 사랑과 은총을 말한다 해도 신과 인간 영혼의 연합(communion, union)을 말할지언정 완벽한 일치(unity)나 하나 됨, 혹은 신과 인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그 근저에서의 동일성(identity)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영성이나 “나의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선불교의 심즉불(心卽佛)과 같은 영성은 유일신 종교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신과 제아무리 가깝다 해도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와 도덕적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자의 완벽한 일치를 말하는 동양적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둔 영성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하튼 세계의 궁극적 실재인 신의 인격성 문제는 동서양의 신학과 영성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들 외에도 보다 대중적 차원에서 인격신관이 지닌 문제점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캐렌 암스트롱은 인격신관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격적 신 이해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이 인간의 필요조건, 두려움과 소망 같은 감정을 반영하는 인간의 생각의 투영에 불과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행하는 것처럼 신도 느끼고 행하며 신이 인간의 편견과 아집을 부정하기보다는 용인하는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그리고 신이 재앙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인간은 신을 냉혹하고 잔인한 존재로 이해하며, 심지어는 재앙이 신의 뜻이라고까지 믿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마저 인정하기도 했다. 인격적 신 개념은 또한 신을 남성적 측면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부적절한 성 관습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기보다는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사랑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로 인격적 신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소외시키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적 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 온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 너무나도 인간을 닮는 유치하고 저급한 신관을 조장하는 위험성을 인격신관이 지니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 인격신관과 영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서구 사상사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영성에 의해 어느 정도 수정되고 보완되어 왔다. 신플라톤주의는 세계와 신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별개의 실재로 간주하는 초자연적 신관에 근거한 영성보다는 세계의 원천이자 세계의 깊이에서 발견되는 신, 나 자신의 존재의 밑바탕에서 만나는 신, 다시 말해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안으로의 초월 내지 내재적 초월을 추구하는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초자연적 인격신관에 바탕을 둔 성서적 영성에 대안을 제공해왔다. 베단타 사상 연구가 토르베스텐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이 베단타와 같은 동양의 종교체계들과 논란을 벌일 때 오늘날 제기하는 비판의 대종은 서구에서 플로티누스(Plotinus),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 엑카르트(Eckhart), 혹은 심지어 스피노자에 대한 논란에서 사용되었던 많은 점들을 항시 되풀이하곤 한다. 인격적 신 (이미 절대적 존재인)의 옹호, 인간 개개인(신이 창조한)의 독특성, 원죄의 심감성과 “위로부터 오는” 구원의 필요성이 항시 거론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단타 측은 종종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교회의 공식적 교리와 더불어 서구에서조차 끈질기게 생존해왔으며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언어에 의거한 반론이다. 거의 정의 불가능한 플로티누스의 일자(One), 베단타의 무속성적 브라흐만(Nirguna Brahman), 대승불교의 공(空), 초인격적인 도(道), 엑카르트의 “신성의 근원”과 같은 개념들로서, 마치 성서의 창조주 하느님이 부정적 언사들, 아무런 의지(will)도 지니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더 정확히 말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그것”(It)의 연합전선에 의해 포위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들 사상이 “창조” 개념을 수용한다면 창조는 단지 일자로부터의 유출이며, 절대로부터의 분리처럼 보이지만 결코 독특한 의지적 행위는 아니다.... 베단타에 의하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하지 않아도 그만일 수 있음에도) 무한자가 그 자체의 환술(maya)에 의해 유한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초월성은 상실되지 않고 말이다. 동서양 사상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차이를 간과하는 사람은 곧 서로를 지나쳐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를 설명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이 여기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또 다시 다른 모든 신학적 철학적 관념들, 특히 구원과 해탈에 관한 관념들에 영향을 준다.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신플라톤주의적 영성의 대표적 사상가는 중세 도미니꼬 수도회의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328 사망)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사상의 영향 아래,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신관으로 대표되는 인격신(Gott)과 삼위의 속성과 관계성을 초월하는 신성(Gottheit) 그 자체를 구별했다. 신성은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나 도가의 도(道)와 마찬가지로 거기로부터 만물이 흘러나오고(exitus) 거기로 되돌아가는(reditus) 세계의 궁극적 원천이고 귀착지다. 엑카르트 영성의 특징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영성을 넘어서 사물의 잡다한 관념과 상(像)뿐 아니라 신에 관한 일체의 상과 개념을 거부하는 철저한 초탈(Abgeschiedenheit)의 수행에 있다. 그리고 이 초탈의 영성은 “신성의 감추어진 어두움”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돌파(Durchbruch)의 영성으로까지 극단화된다. 이 돌파를 통해서 우리는 일체의 상을 여읜 "비고 자유로운" 영혼의 근저(Grund)에서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은 인격신관의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인합일 내지 천인합일을 말하는 동양의 일원론적 영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엑카르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에게서 전통적인 성서적-신학적 신관과 영성의 극복은 물론이고 동양 사상과의 만남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보아 현재도 서구 영성 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신앙, 혹은 각종 해방적 실천(민중, 유색인종, 여성, 자연 등) 내지 도덕적 헌신(개인적 혹은 사회적)을 통해 인격신과 만나는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 묵상과 관조를 통해 자기 영혼의 깊이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신비주의적, 관조적 영성 운동들이며, 이는 크게 보아 동양적 영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