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은 날라리도 아니었고 공부 썩 잘하는 우등생도 아닌 그냥 범생이로 보낸 시절이라 술, 담배는 전혀하지 않고 그냥 학교와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왔다 갔다 했다.(진짜다!)
처음 막걸리를 접했던 것이 대학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담배와 술을 처음 접했던 시기도 그때..
카바이트 막걸리 생각나는가?
비닐보다 조금 더 두꺼운 흐물흐물한 용기에 담은 걸쭉하면서도 맛이 약간 씁쓰름했던 서울막걸리.
잘못 보관하면 질질새는 히마리 없던 그술.
먹고 나면 다음날 뒷골 때리면서 안깨는 악명 높았던 그 술.(요즘은 장수막걸리로 다시 태어나 거듭 명주로 나고 있다.)
친구들이 축제때 짝으로 사들고 와서 잔디밭에서 안주는 단무지로 무대뽀로 먹었던 그놈.
사실 난 군대가기 전까지는 술을 지금처럼 즐겨하지 않아서 고등학교 동문회나 써클활동을 제외하고는 막걸리나 술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진짜다!!!)
문제는 군대 가서였다.
자대생활은 3분의 1, 파견생활이 3분의 2였던 군대생활을 하면서 파견지에서 몰래 먹는 소주가 나의 주량을 배가시켰다.
자유로운 파견생활에서 복귀한 자대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술도 못먹고 보초를 서느라 잠도 실컷 못자고...
그러던 어느 가을 일요일...
돈과 출세에 눈이 어두운 중대장을 만나서 부대 진입로 미류나무 베기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당시 나무젓가락과 이쑤시게 만드는데 쓰였던 미류나무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천정부지로 값이 뛰고 있다고 했다.
휴일날 쉬지는 못하고 하루종일 계속되는 노동으로 지칠대로 지친 사병들의 작업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자 노련한 인사계가 중대장에게 다가가 뭔가 귓속말을 한지 근 한시간이 지나서였을까?
갑자기 집합종이 울리면서 몇몇이 부산히 움직이더니 말통같은 것이 들려오고 사제김치(맛없는 군대 김치가 아닌 민간인이 만든 김치)와 두부가 식판에 담겨지면서 막걸리 파티가 벌어졌다.
일명 농주(農酒)라고 하는 막걸리는 노동후에 출출할때 먹는 새참이다.
땀흘린 뒤에 마신 포천 막걸리 한사발이 시들어져 가던 병사들의 기운을 기적같이 일으켰다.
세명이 어기적거리면서 들던 거대한 나무토막을 두명이 들고 뛰다시피하면서 일을 번개같이 하는 것이었다.
'아아~~ 막걸리 막걸리'
그날 막걸리는 참 맛있게 먹었지만 새벽에 일어나 잠 덜깬 상태에서 나갔던 경계근무 초소에서 뭔가 가슴속에서 울컥하며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후 부대 진입로 양쪽에서 호위하며 우리를 반겨주던 미류나무를 싹쓸이해서 팔아먹은 중대장과 대대장은 보안대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군복 벗은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난 꿈에서 제대를 하지 못하고 헤맨다.
제대후 복학생 시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씁쓸했던 막걸리의 맛은 아름다운 맛으로 다시 태어난다.
80년대 MT의 메카였던 대성리로 경춘선을 타고 데이트를 갔다.
북한강에서 폼잡는 답시고 엄지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나룻배를 저어가며 허부적대다가 뱃속이 헛헛해서 들어간 허름한 천막집.
파전에 막걸리 한둥치 시켜서 첫잔 건배.
그맛은 불과 1년전에 군대에서 먹던 막걸리와는 또다른 맛이 있었다. 혓바닥에 닿는 감촉마저 다르고 짜릿하니 달콤했다.
'한잔이 한잔이 두잔이되고 두잔이 두잔이 석잔이 되고~~'
'취했다~~~'
졸업했다. 그리고 취직했다.
소주와 맥주를 괜찮은 안주와 거의 매일 접하면서 막걸리는 나의 기억속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막걸리와 나와의 질긴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To be continued.)
첫댓글 제대를 못하는 꿈을 꾸다니...ㅋ~
우리 서방님은 아직도 영장 날아오는 꿈을 꾼다...ㅋㅋㅋ
제대날짜가 10일 지났는데 제대를 못하는 꿈을 수십번 꿈것 같다.
영장날아오는 꿈은 나보다 더 압박이 심한 사람이네.ㅋㅋ
심하지...ㅋ~ 심해도 한참 심한 거지..갔다온 군대를 무효라며 다시 갔다오라는데...돌지...돌아..ㅋㅋㅋ
장열아!!!!!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