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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KBS 일요스페셜에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을 방영했다.
KBS는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방영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2011년 8월에 방영하려했던 것을 내부 논란때문에 5개월이나 늦게 지각방영했다.
어째든 평소 KBS답지 않는 태도로 보수세력들은 매우 흥분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이자 중공과 북한에 부역했던 인물을
KBS가 대대적으로 미화했다고 분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정율성이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의 작곡가로 꽤 유명한 인물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200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인터넷 설문에서
중국 네티즌이 뽑은 "중국 혁명의 모범적 영웅 100인"으로 조선인중 유일하게
정율성이 선정되면서 그의 유명세를 실감하게 되었다.
정율성도 그랬지만 그당시 진정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일생을 조선독립에 받쳤다.
오로지 조선독립을 위해 일부는 중국 홍군에 직접 가입하여 중국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는 만주지역에서 자체 유격대를 조직한 후 중국홍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또다른 일부는 국민당 정부의 지원하에 일본인에 대한 암살, 폭파 활동 및
연합군과 합동작전에 참여하였다.
이들중 대부분은 조국 광복후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역사에 묻혀진 존재가 되었다.
과거 독립투쟁에 나섰던 대부분의 항일투사들은 조선독립을 이념보다 상위개념에 두었다.
이제 이념을 떠나 과거 독립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인사들에 대한 역사적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일제시대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관련 중국자료를 번역 소개한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항일독립투사들 (원제 : 중국혁명에 참여한 조선인)>
1946년2월,과거 관동군 소속 군인들이 일으킨 통화폭동이 평정된 후, 일본 폭도들은 엄동설한에 체포되어 동북민주연군 이홍광 (李红光)지대 전사들에 의해 통화 성벽앞으로 끌려나와 무릅꿇려져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인 병사들은 총살당한 채 성벽아래 물웅덩이로 던져졌다. 이것은 일본에 치욕을 당한 중국인으로서는 속이 후련한 장면이었다.
통화폭동 평정을 책임진 이홍광 부대는 전부 조선국적 간부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에 비해 일본인에 대한 사무치는 복수심이 더욱 강렬했다. 국공내전중에 동북의 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의 기치아래 전민족으로 일치단결하였다. 통화폭동의 배후에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족부대는 국군(국민당군)이 동북으로 진입하던 시기 대거 투항하는 현상이 빈번했다. 따라서 폭동발생시 요동군구는 먼저 해룡(海龙), 반석 (磐石)에 있는 이홍광 지대를 이동시켜 폭동진압에 동원했다. 이홍광 부대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김웅(金雄)과 방호산(方虎山)의 지휘하에 일거에 폭동을 평정했다.
이후 요심전역(辽沈 战役)중,이홍광 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164사와 166사로 확대 발전하였다. 장춘(长春)포위 및 심양(沈阳) 점령작전에서 더 많은 조선인이 제4야전군(사령관 임표) 각 부대에 혼성 편성되었다. 이들은 임표(林彪)를 따라서 산해관을 넘고 천진을 점령하였으며, 호남성 잔비소탕 및 해남도 해방전역까지 휘황찬란한 전공을 세웠다. 또한 백두산 및 흑룡강에서부터 해남도까지 진격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중국 땅에 영원히 잠들었다. 만약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 역사의 시작을 황포(黄埔)군관학교를 시작으로 본다고 치면(즉 1924년에서 1949년까지로 한다면), 이기간 조선인은 중국에서 대거 무장투쟁에 참여하여 한줄기 지류가 되었다. 비록 조선인이 중국혁명의 거대한 흐름에 참여한 이후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조선인이 결정적 시기마다 작용한 역할을 증명하고 있다.
1924년,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했다. 이때 중국 혁명운동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조되었다. 이것은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매우 고무시켰다. 당시 광주(广州)에는 육군군관학교, 광동항공학교, 중산대학 등 신식학교가 연달아 들어섰는데, 그 중 소련 홍군을 모방한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인기있었다. 국내외의 혁명청년들은 “황포로 가자!”라는 격정적 구호로 충만해 있었다. 황포 5기까지는 모두 조선인이 있었는데 이때 황포의 조선인 교원과 학생수는 200여명(역자 : 182명)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1927년 4월,
1927년 6월,국민혁명군 장발규 부대는 총지휘부 경위연대를 구성하고 노덕명(卢德铭)을 연대장에 임명했다,중공당에서 파견한 황포4기 포병과를 졸업한 조선인 진용학도 경위연대의 일원으로 참가햇다. 9월9일,
1928년 8월,모택동은 직접 31연대 주력부대를 인솔하여 호남성으로 전진한 후 홍군대부대를 지원했다. 이때 1대대는 잔류하여 정경산 수비임무를 맡았다. 상,감 두 지역의 국군 4개연대 병력이 이때의 허점을 노리고 대거 물밀듯이 밀려왔다.
홍군은 장주 점령에서 훈련기 1대를 노획했다. 장주에서 철수할 때 한 조선인 홍군 간부가 훈련기를 몰고 당시 홍군의 거점도시였던 서금(瑞金)으로 날아갔다. 이 훈련기는 단지 2명만 탑승할 수 있었는데 당시 조종사 이외 탑승자가 바로 1군단 정치위원 섭영진(聂荣臻)였다. 훈련기를 타기 직전
팽덕회의 홍3군단은 호남성 북문에 해당하는 악양(岳阳)을 점령한 후, 10여문의 75밀리 야포와 산포를 노획했다. 겨우 소량의 박격포만 보유한 3군단의 포병중대로서는 이런 평사포를 획득한 것은 뜻하지 않는 경사였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시점에 난처한 일에 직면했다. 노획한 대포를 사용하여 동정호(洞庭湖)를 순시중인 영국, 일본 등 외국 군함들을 격침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1만여명의 3군단중에 단지 두사람만이 이 대포들을 조작할 수 있었다. 한사람은 군단장 팽덕회였고, 다른 한사람은 바로 조선인 포병중대장 무정(武亭)였다. 어쩔수 없이 병사들은 포를 설치만 한 후 물러났다. 팽덕회와 무정 두사람은 정확히 조준하고 장전한 후 수십발을 발사했다. 대략 10발이 적함에 명중됐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3군단이 호남성 성도 장사(长沙)를 공격할 때, 이제 대포를 보유했기 때문에 범이 날개를 단 것처럼 맹렬히 공격했다. 장사 류양하(浏阳河) 서안 방어선이 무정의 포격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졌다. 3군단은 당시 성급 도시를 함락한 유일한 홍군부대가 되었다.
무정은 대장정시기 홍군 포병부대를 지휘했다. 사도(四道)봉쇄선 돌파 및 상강(湘江)도하 전투중에 포병부대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부대가 귀주(贵州)에 진입한 후, 포탄이 거의 소모되었고 경무장 행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무정은 박격포이외의 모든 평사포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거의 빈털터리 사령관처럼 된 그는 3군단 사령부로 복귀했다. 1,4방면군이 무공(懋功)초원에서 합류한 이후 장국도(张国焘)는 큰 세력이 작은 세력을 흡수한다는 생각을 갖고 무력으로 1방면군을 무장해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팽덕회는 이 음모를 알아챘다. 이 중요한 순간에도 역시 무정이 있었다. 그는 팽덕회가 새로 편제한 통신보안번호를 품고 무전기를 메고 혼자 1군단 주둔지를 찾아가서 비밀번호와 무전기를 임표에게 전달했다. 이에 따라 1,3군단은 제때 교신을 취하여 4방면군 진영에서 신속하게 멀리 이탈하여 북쪽으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홍군끼리의 대혈전을 피할 수 있었다.
대장정때 홍군대학은 간부연대로 개편되었다. 북벌시기 엽정(叶挺)독립연대 대대장였던 양림(杨林)이 연대 참모장을 맡았다. 적수(赤水) 4차 도하작전때 홍군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원이 간부로 구성되었으며 원래 간부역량을 최대한 보호하려고 편성했던 간부연대도 전투에 참가했다. 양림도 전투부대 지휘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두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1935년 4월말,중공당은 운남성 북쪽에서 사활을 걸고 금사강(金沙江) 도하작전을 벌였다. 양림 등은 직접 전초중대를 인솔하여 하룻밤을 꼬박세워 180리를 강행군 했다. 나룻터를 지키고 있던 적병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던 시각에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군대처럼 귀신같이 도착하여 총한발 안 쏘고 나룻터 및 나룻배를 장악했다. 안전한 도하작전을 위해 다음날 아침 그는 직접 1개소대를 인솔하여 북쪽 통안(通安)진으로 진격하였다. 비록 12명이 전사했지만 적군 1개 연대를 격퇴시키고 수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는 이 전공으로 중앙군사위 표창을 받았다.
섬서성에 도착한 후 양림은
양림의 희생으로 대장정에 참가한 30여명(역자 :36명)의 조선인중 이제 무정 한명만 끝까지 살아서 연안(延安)에 도착했다. 팽덕회는 당회의에서 “수많은 외국인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사업을 위해 희생됐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계속 중국에서 죽게 만든다면, 누가 남아서 그들 조국의 혁명사업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죽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외국인 동지의 생명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라고 발언했다. 팽덕회의 호소에 따라 중앙군사위는 무정에게 휴가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당시 위장병이 악화되어 고통받고 있던 무정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무정은 팽덕회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다. 당시 팽덕회는 십수년후 그의 일생중 가장 휘황찬란한 시기에 이 외국 동지의 조국에서 그와 긴밀하게 연계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중국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인에 대해 말하자면 반드시 동북의 항일투쟁부터 말해야 한다. 중국 동북은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200여만명의 조선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은 18세기 이래 계속해서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왔다.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 후 조선독립에 뜻을 가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줄줄이 압록강을 건너 동북으로 들어왔다. 이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920년대 한국임시정부 지도자
제3국제는 너무 골치아픈 나머지 어쩔수 없이 조선공산주의 단체의 해산 명령을 내렸다. 1국1당의 제3국제의 결정에 따라 중국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공당에 일률적으로 가입했다. 이때부터 동북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전부 중공만주성위(中共满洲省委) 소속 지부에 편입되었다. 조선인 김책과
9.18사변후, 동북 각지방의 항일단체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동북항련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는 11개 군(军)이 있었다. 매 군에는 조선인이 있었다. 이중 2군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2군, 3군, 7군의 군장(军长)은 조선인였다. 동북항련 출신인
1940년에 이르러 동북항일련군은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동북항련 잔존부대들은 속속 소련령으로 월경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조선인 항일세력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지어진다.
소련과 중국의 이중 영향을 받은 위에서 상술한 동북항련외에 중원에는 국민당정부의 영향을 받은 한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연안의 영향을 받은 조선독립동맹의 양대세력이 더 있었다. 국민당정부의 지지를 받는 한국임시정부 소속의 조선항일무장단체는 초기에 단체가 매우 많았다. 사람도 많고 세력도 크면 “군 또는 대”이라는 단체명칭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동북의 “독립군”, 무한에 설립된 “조선의용대”, 중경에 조직된 “한국광복군” 등이다.
반면, 인원이 적으면 “단”으로 불렸는데 “의열단”, “철혈단” 등이 있었다. 일본에 대한 암살 폭파활동을 유명해진
1942년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양대 무장단체를 한국광복군으로 통합하여 한국임시정부에서 직접 통솔하도록 했다. 항일전쟁기간, 일본어에 능통한 장점을 활용하여 주로 일본어 표어 작성, 투항방송 등 적군 와해공작, 적군 포로심문, 적군 비밀번호 해독 공작 등에 주로 활동했다. 1943년 9월, 광복군은 “인도차이나-버마지구 공작대”조직 및 인도차이나에 파견하여 연합국과 협동작전을 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선전, 심리전, 심문공작 등에 주로 활동했으며 연합국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44년,100여명의 조선청년들은 강서성 이춘(宜春)에서 “비호대(飞虎队)”를 조직한 후 제4차 장사(长沙)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에 대한 회유공작을 담당했다. 전투기간,“비호대” 20명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으로 위장한 후 일본군 진영에 잠입하여 적군 수명을 체포하고 적 지휘소 수 곳을 폭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1945년 10월 하순,중경의 각 계인사들은 잇달아 각종 행사를 개최하여 한국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을 송별해 주었다. 중국인민의 뜨거운 우의에 감사드리기 위해
항일전쟁시기 연안은 전국 각지 청년들이 동경하는 도시였으며 수많은 조선인을 끌어들였다. 특히, 1941년 원래 중경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용대의 100여명에 이르는 간부들이 박효삼(朴孝三)등의 인솔하에 한국임시정부 통제를 벗어나 중공당이 통제하는 해방구로 의탁해 왔다. 연안의 조선인들은 1942년에 조선독립동맹을 창설함으로써 동북 및 중경과 상호 독립적인 제3의 조선인 항일역량을 형성했다. 대장정에 참여했던 팔로군 포병단장 무정이 조선독립동맹 책임자로 추대됐다. 연안으로 몰려든 조선인중에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불려지고 있는 《연안송》,《팔로군행진곡》및 후에《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의 작곡자가 바로 조선인 정율성(郑律成)이다. 조선독립연맹의 분지기구 및 공작거점은 화북, 화중, 화남의 각 근거지 및 적 점령지 등에 널리 퍼져있었다. 심지어는 조선국내에도 분지기구 조직을 설립했다. 무정을 중심으로
70년대초기,중국에서 신사군(新四军) 기병부대의 전설적 경험담을 소설화한 《연심쇄(连心锁)》이 출판됐다. 주인공인 신사군 기병단장
일본이 항복한 후 무정은 즉시 연안의 수백명 조선인을 모아 조선공작단을 조직했다. 이 대오가 중조 국경지역에 도착했을 때 소련군의 점령하의 북조선은 이미
1949년 5월 김일(金一)이 북경에 도착하여 모택동에게 조선노동당 명의의 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은 인민해방군 3개사단의 조선인 부대를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였다. 중국은 곧바로 동북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164사 및 166사)을 장비와 함께 전원 조선으로 보냈다. 이외 대략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조선인이 제4야전군 156, 140 및 141사에 혼성 편제되어 화중지역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1만6천여명의 조선인이 포함된 부대들은 화남지역으로 진군한 후 일부 병력들이 조선으로 귀국을 요청했다. 제4야전군은 조선으로 귀국을 희망하는 병력들을 하남성에 집결시킨 후 1개사단으로 재편했다. 이들은 김일성파의 인민군작전부장 김광협(金光侠)을 따라 장비 무기 일체를 휴대하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이번 “분가”이후부터 중국경내의 조선인은 조선족으로 개칭하였다. 주덕해(朱德海)、문정일(文正一) 등 연안파 간부들이 중국에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화민족 56개 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첫댓글 이땅의 주인들이될 후대와 국가의 미래를위해서도 우리 조상 즉전임자들의 역사는 바로 알려져야만 합니다,,
꼭 그리 되여야만하는기고 그래야 민족정신이 살아나는겁니다,,
미국인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별"을 읽으면
중국공산당의 초창기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