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극단에서 연극을 배우던 시절에 이런 단장님이 있었습니다.
극단 마방진(www.mabangzen.com)이란 곳에 입단할 당시에 저는 26살이었습니다.
'마리화나'라는 연극을 감상하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극단 마방진의 팬이 되었고,
평소에도 연기에 관심 많지만 정식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학이든 음악이든 연기든, 창작은 결국 매한가지라고 생각하는 저인지라
단원을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이곳에 입단 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훈련법이 꽤 특이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의 저에겐 특이했습니다.
단원들에게 하루 종일 걷기 운동을 시켰습니다. 하루에 5시간씩.
성균관대 근처에 봉긋 솟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를 도는 것입니다.
보통 여섯 바퀴 정도를 걸으면 한 시간이 지나는데, 단원들이 다같이 한 시간을 걷고,
쉬는 시간 10분이 지나면 다시 또 여섯 바퀴를 걷는 그런 이른 바 <걷기 수행>을 했습니다.
걷기 수행 말고는 다른 연기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극단 단장 고선웅 선생님의 주장에 의하면,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편안함을 느껴야 하고
몸의 쓸데 없는 힘을 다 뺄 수 있어야 한다.
걷기 수련을 하다보면 이런 군더더기 몸심이 다 빠지게 된다.
였습니다.
걷기 수련은 총 5시간 정도가 걸리고,
단장은 수련 시작 처음에 들러서 인원수를 확인한 후 5시간 후에 다시 와서 인원 확인하거나
연극에 관한 첨언을 들려주곤 했습니다.
당시 단원은 12명 정도였고 저는 가장 막내였습니다. `
시키는 대로 묵묵히 그렇게 3일 정도를 걷던 저는
나흘 째 되는 날 어느 때부터 기존에 제가 돌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원에는 초행자들을 위한 팻말 같은 게 있었고,
단원들은 모두 그 팻말이 가르치는 시계 방향대로 걷던 중이었습니다.
5시간 수련이 끝나기 몇 분 전에 단장이 와서 단원들이 걷기 수련하는 걸 가만히 보더군요.
그러고는 그날 다같이 회식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근복씨는 머리가 되게 좋은 것 같아?"
표정은 냉랭했습니다.
"오늘은 남들이랑 반대로 돌던데, 그거 왜 그런 거야?"
"음, 제가 오른쪽 고관절 주변 근육이 항상 결리고 긴장이 되어 있거든요.
저희 단원들이 시계방향으로 공원을 계속 돌잖아요? 그러면 몸이 계속 오른쪽으로 쏠리더라고요.
그래서 한바튀 씩 번갈아가면서 돌아봤어요. 몸이 한 쪽으로 쏠리지 않게끔 하려구요.
아마 몸이 아프지 않은 분들이라도 한쪽 방향으로만 돌면 별로 좋지 않을 거 같아요."
"자, 여러분. 배우가 성장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믿음' 과 '우직함' 이에요.
근데 저 근복씨는 하라는대로 안 하고 반대로 하죠? 저렇게 하면 안 되요.
사람이 머리가 너무 발달이 되면 저런 현상이 생겨. 이러면 우직한 실행력이 사라지게 돼.
배우는 몸으로 먼저 말하는 직업이야. 머리가 먼저 앞서면 안 되는 겁니다.
내일부터 근복씨는 다른 배우들과 같은 방향으로 돌도록 해."
회식 당시에 저는 단장의 말에 홀딱 넘어갔었습니다.
제가 나이도 어렸던 만큼 순진하기 그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다음날에 단장 말대로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걸었냐하면, 그건 또 아니죠ㅋㅋ
단장이 아침에 힐끗 사라지면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저의 머리는 단장의 말에 홀딱 넘어갔지만 저의 몸은 단장의 말을 거역했었습니다.
단장은 왜 제가 남들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것을 금지했던 것일까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제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저는 당시에 잘난 척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제가 얼마나 똑똑한지에 대해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제 몸이 한 쪽으로 삐뚤어지는 게 싫었습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나름의 사정과 이유를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단장은 굉장히 싫어했죠.
그 후 석달을 내리 걸었지만 몸에 군심이 빠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몸의 솔직한 반응을 뒤따라 저의 머리도 계속 단장이 회식자리에서 했던 말을
곱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 달 후에 극단을 나왔습니다.
단장의 배우조련법이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 뿐이었지만,
당시의 제가 그 기분의 원인을 좌뇌로 분석하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뇌는 뭔가를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그 몇 년 후란 바로 이틀 전 최영철 선생님께서 쓰신 <모터 러닝>에 대한 글을 제가 읽은 날을 말합니다.
그 단장의 경우 자각은 할 줄 알되, 가르칠 줄은 모르는 2단계 수준의 조련자입니다.
예를 들면 그 단장은 자신이 걸음을 걷는 광경을 단원들 앞에서 시범으로 선보인 적이 한 번 도 없었습니다.
필라테스 스승은 제자에게 동작을 시범으로 선보입니다.
태권도 유단자는 초단자에게 돌려차기를 시범으로 선보입니다.
박태환은 관중들 앞에서 배영을 시범으로 선보입니다.
그 단장은 몸의 긴장이 이완되어야 마음의 긴장도 이완이 되고,
그렇게 이완된 마음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훌륭한 배우라는 사실을 자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경지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조금 특별한 경우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연극 연출자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수준이겠죠.
이것을 남에게 가르치거나 훈련을 시키는 것은 조금 특별해서는 어림도 없는 경지입니다.
제가 자주 생각하는 개념이 하나가 있습니다. <기질과 욕망 사이의 괴리>입니다.
극단 단장은 자신의 기질을 훌쩍 뛰어 넘어 욕망을 향해 섣부르게 + 비합리적 비과학적으로 전진했던 것입니다.
회식자리 이후에도 단장의 저를 보는 눈초리는 저온이었씁니다.
아마 다른 단원이 제가 계속 반대로 돈다고 보고했었을 것입니다. ㅋㅋ
하지만 단장은 이미 저의 몸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런 그의 반응에 콧방귀도 안 뀌었지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이것은
아들의 아버지이면서도 아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전혀 강요하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덕분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인생의 낙이 백 여가지 정도가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자격없는 권위자'들한테 개기고 그들을 약 올리거나 반항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자들 중 90퍼센트는 아마 자격없는 권위자일 것입니다.
최영철 선생님께서 써주신 Motor Learning 개념을 읽고서
6년 전에 제 몸이 그 단장에게 개운치 못한 느낌을 받은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다니. 놀랍습니다.
훌륭한 배우의 조건을 자각하고 있는 것과,
그 조건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두 단계 사이의 간극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마방진 단장은 지금쯤 자각하고 있을까요.
자각만 하고 있을 까요, 아니면 자각적으로 유능해져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