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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⑪] |
세속에서 道 탐구하는 ‘의사 居士’ 이동호 |
“마음의 본체는 자잘한 일상사와 번뇌망상 속에 있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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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직함은 내과의사지만 그에게 의사는 생계를 위한 부업에 불과하다. 세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도를 탐구해온 월담 이동호 거사. 20대 초 짝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처음 인간의 본질에 의문을 던졌다는 월담은 화두를 잡고 돈오를 체험하며 보림(保任) 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사람은 결국 사주팔자대로 사는 것”이라는 그는 “세속에서 도를 추구한 인생 역시 사주팔자가 아니겠느냐”며 허허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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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거사(居士)’라 불리는 계층이 있다.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도 닦는 사람을 말한다. 사바세계의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고준한 정신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도를 갈고 닦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지간한 근기(根機·중생의 교법을 받을 만한 성능)가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근기가 있다 해도 전생에 쌓은 복이 없으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것이 양수겸장의 노선이요 거사의 길이다. 수도에 신경 쓰다 보면 돈이 없어 고통받기 쉽고,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갖다 보면 수도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복혜구족(福慧具足·복과 지혜를 아울러 갖춤)이어야만 갈 수 있는 것이 거사의 길이다. 불교사를 보면 유명한 거사가 종종 등장한다. 인도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있다. ‘유마경’의 주인공이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는 대승불교의 메시지를 남긴 인물이다. 중국에는 방거사(龐居士)가 있다. 당나라 때 활동한 인물로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법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변산의 월명암(月明庵)에서 경론을 연구하며 수도한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유명하다. 부설거사는 이른바 ‘패밀리 도통’으로, 부인 묘화(妙花), 아들 등운(登雲), 딸 월명(月明)이 모두 도통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李資玄) 거사가 유명하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부인이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로 들어가서 ‘능엄경(楞嚴經)’의 이근원통(耳根圓通·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을 깊이 연구했다. 조선시대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꼽을 수 있다. 외형적으론 명문가에서 태어난 유학자였지만 그는 내면적으로 불교에 심취했다. 주머니에 ‘금강경’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당대의 고승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老거사 근래에 들어 거사의 맥을 이어가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월담(月潭) 이동호(李東豪·66) 거사다. 불교계에 명함을 내미는 사람이면 대부분 그를 안다. 공식 직함은 내과의사. 전주 시내에서 ‘이동호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사는 부업일 뿐, 도학(道學)에 대한 탐구가 그의 주업이다. ‘주도부의(主道副醫)’라고나 할까.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피부는 맑고 자세나 화법에 흐트러짐이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은 50대 중반으로 여길 정도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를 갖췄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말이 길어진다. 중언부언하는 경우도 많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월담은 오로지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상대가 알아들을 정도만 이야기하고 멈춘다. 목소리 톤도 일정하다. ‘주도부의’라고는 하지만 그가 의업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가진 전문의 자격증만 해도 내과전문의, 결핵과전문의, 가정의학과전문의, 심장내과분과전문의, 소화기내시경분과전문의 등 여러 개다. 방사성동위원소특수취급자 면허도 가지고 있다. 전북대 의대 내과 외래교수이기도 하다. 1975년에는 경희대 동서의학연구소 연구교수로서 ‘한의학으로 노벨상에 도전한다’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경력도 있다. 양방의사지만 일찍부터 한의학도 깊이 연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부업일 뿐, 그가 일생 추구한 목표는 도통(道通) 한 가지다. 그는 평생 ‘어떻게 하면 도통할 것인가?’라는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요즘 시대에 ‘도통’이라는 말을 들먹이면 금세 귀신이 출몰하는 ‘전설의 고향’ 분위기가 난다. 그만큼 ‘도를 통한다’는 목표는 신화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까마득한 신화의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주제를 가지고 60대 후반의 노거사(老居士)와 인터뷰한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밀려왔다. 설악산 어딘가 바위동굴에서 솔잎차를 마주 놓고 하면 좋을 테지만, 대담은 전주 시내 병원 1층에 있는 서재에서 이뤄졌다. 태극권에 관한 서적 수백 권과 태극권 고수들의 시연모습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사방 벽을 가득 채운 ‘태극권 룸’에서였다. 짝사랑 열병이 道로 이끌다 -언제부터 도학에 관심을 가졌나. “열아홉 살부터다. 내 고향은 전남 보성읍 주봉리(珠峰里)라는 곳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 부잣집이 두 집 있었는데, 위에 있는 기와집이 우리 집이었고 아래 기와집이 최가네 집이었다. 최가네 집에는 미모가 빼어난 23세의 처녀가 있었는데,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던 어머니의 제자였다. (계속) |
사실 나는 매우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교사로 일하셨기 때문에 가정부 손에서 컸다. 형도, 누나도 없고 동생은 열 살이나 어려서 마땅한 이야기 상대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집 누나를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결국 그 누나를 짝사랑하게 됐다. 전남대 의대에 진학해 광주에서 지낼 때는 누나 역시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내 하숙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자주 왕래하면서 나는 그 누나를 깊이 사랑하게 됐고 나중에는 극심한 혼돈상태에 빠졌다. 연상인 누나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반쯤은 행복하고 반쯤은 고통스런, 복합적인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다. 놓을 수도, 들 수도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당시는 동양철학은 구경하기 힘들었고, 서양철학만 득세할 때였다. 서양철학을 공부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서양철학에는 ‘물음만 있지, 해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다음 찾은 것이 종교다. 구약과 신약을 모두 천착하였고, 광주 시내 교회 7∼8군데를 섭렵하였지만 해답을 구할 수 없었다. 특히 ‘나 이외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나는 무엇이고 나 이외의 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하필 십계명 첫 번째에 이 말을 배치했을까?’ 등등의 의문만 더해갔다. 그러다 의대 본과 1학년이 되었다. 당시 불교 사찰은 깊은 산속에만 있었지 도시에는 거의 없었는데, 묘하게도 동광사(東光寺)라는 절이 광주 시내에 있었다. 당시 동광사에는 현공(玄空) 윤주일(尹柱逸·1895∼1969) 법사가 계셨는데 설법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서 동광사에 들렀다가 현공 선생을 처음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섬광이 지나갔다. ‘아! 소설 속에 나오는 도인이 현실에 실재하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분이야말로 나를 인도해줄 선생님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법을 듣고 보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무릎을 쳤다. 진짜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혼돈이 잘못된 문제제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그후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면 선생 댁을 찾아갔다.” -잘못된 문제제기라는 게 무슨 뜻인가. 문제제기도 잘된 것이 있고 잘못된 것이 있다는 말인가. “불교에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이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내가 그동안 고통받고 있던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뒤집어졌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나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시공이 없는데 나의 고통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고통이 존재하려면 시공이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내면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을 품게 됐던 것 같다. 고통은 곧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는 자연스럽게 ‘존재와 무’에 대한 의문으로 넘어갔다. 존재와 무를 불교의 ‘반야심경’ 식으로 표현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눈만 뜨면 자동적으로 이 의문이 떠올랐다. 길을 걸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몇 달간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의문을 품고 시내 거리를 걷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부딪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 길 옆으로 걸었는데, 이번엔 종종 전봇대에 부딪혔다. 의문에 잠긴 채 걸어가다 보면 이마에서 번쩍 불이 나곤 했다.” 20대가 화두 잡는 최적기 -그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가. “아마 6∼7개월 걸렸을 것이다. 후일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性徹)선사를 뵈었는데, 성철선사가 강조하신 말씀이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悟昧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다.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같이 화두가 잡히는 상태가 바로 동정일여다. 오매일여는 깨어 있을 때나 삼매에 있을 때 한결같이 화두가 잡히는 상태이고 몽중일여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잡히는 상태인데, 그때 내가 이런 단계를 밟지 않았나 싶다.” (계속) 마음의 본체는 자잘한 일상사와 번뇌망상 속에 있는 것”
그러나 ‘도고마성(道高魔盛·도가 높아지면 덩달아서 마귀도 높아진다)’이라 했던가. 이 체험 후 하루건너씩 곧 죽을 환자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병원 문앞까지 왔다가 죽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죽기도 했다. 한 달 사이에 10여 구의 시체를 처리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병원에 찾아와 소동을 피웠다. ‘의사가 잘못해서 죽었다’ ‘왜 빨리 대학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 등등의 시비가 벌어졌다. 그래도 처음엔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연속적으로 시체가 들이닥치고 시비가 이어지자 마음 한구석에서 미세한 감정의 흐름이 일었다. 다시 1년이 흐르자 그 미세한 감정의 흐름이 좀더 확대됐다. 마음의 균열이 더 벌어졌던 것이다. (계속) 그때서야 그는 보림(保任)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옛날 선지식들이 돈오한 후 20∼30년 동안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보림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배경에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마(魔)가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보림이란 새싹이 돋아난 상태의 깨달음을 굳건하게 다지는 보강과정이다. 밥이 끓은 후 뜸을 들이는 것과 같다. 되돌아보니 병원에 들이닥친 10여구의 시체도 일종의 마였던 것이다. 돈오한 후에는 점수(漸修)해야 한다. 점수에 이르렀가 아닌가의 판단기준은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다. 즉 일상생활에서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일과 일 사이에 걸림이 없으면 점수가 제대로 된 것이고, 걸림이 있으면 안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정의한다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상황에 응하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음)’에 도달해야 한다. 점수에 이르려면 보림이 필요하다. ‘보조어록’을 읽고 난 후 곧바로 보림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전국의 선지식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고승과의 만남 그는 도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불교계의 고승은 물론 불교 밖 도인들도 가리지 않고 만났다. 기 수련을 중시하는 도교 쪽 인물을 여럿 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월담이 불교계의 고승들을 만났던 경험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강(田岡·1898∼1975) 스님은 근대 한국 불교계에서 ‘지혜제일’로 소문난 고승으로 선문답에 있어 전광석화 같은 지혜를 보여주었다. 그는 전남 곡성의 태안사 입구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한때는 지나치게 화두참구에 골몰하다가 상기병을 얻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증상으로 고생했는데, 부산의 어느 한의사를 만나 상기된 기운을 하단전으로 내리는 이야기를 듣고 몸을 치료했다고 한다. 지금도 선방(禪房) 수좌(首座)들 사이에서는 번갯불 같은 선기(禪機)를 지녔던 전설적인 선승으로 통한다. 현재 인천 용화사에 주석하는 송담(松潭) 스님이 그의 수제자로 알려졌다. 월담이 전강을 만난 시기는 1960년 무렵이다. 현공 스님을 만나러 전국의 고승들이 광주 동광사를 찾았는데, 덕분에 그는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강은 우선 생김새부터가 특이했다. 두꺼비 얼굴에 바윗덩어리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가섭존자가 부처님 가사를 가지고 3000년 동안 계족산에 앉아 있는 부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키는 그리 크지 않고 통통한 몸이었는데, 눈꺼풀이 길게 쳐져 있어 눈을 내리면 마치 감은 것처럼 보였다. 전강의 설법을 듣다 보면 깊은 바닷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잔잔하고 느리면서 나지막한 저음으로 골수를 파고드는 설법을 해서다. 참선한 스님에게서 나오는 에너지 파동이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법의 요지는 무상(無常)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이 잠깐이니 어서 빨리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송광사 구산(九山·1909∼83) 스님이다. 27세 때 폐병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던 그는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100일 동안 천수기도를 하고 병이 나은 후 출가했다. 1970∼80년대 초반 순천 송광사에 외국인 승려들이 선(禪)을 배우기 위해 머물렀는데, 그들은 구산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법정 스님의 사형(師兄)이 구산 스님이다. 구산은 소탈해서 마치 초등학교 은사를 뵙는 것 같은 편안함을 줬다. 고승이라는 위세가 전혀 없고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성실하게 답변해줬다. 주된 설법 내용은 ‘칠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한 가지씩 실천하라는 뜻이다. “공부는 힘 있을 때 몰아붙여야 하네” 고암(古庵·1899∼1988)스님은 1967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3차례에 걸쳐 조계종 종정을 지낸 분이다. 월담은 1994년 서울 정릉의 삼정사에서 고암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허심탄회하게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다. “스님! 사람이 늙으면 욕심이 없어질 것이고, 미래에 뭘 하려는 것도 없고, 성가시게 하는 사람도 없고, 하루에 밥 먹는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탐진치(貪嗔痴) 번뇌망상이 자연히 사그라지고, 공부가 순일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고암은 “아니네. 나이 먹어서 힘이 없어지면 정진이 안 되는 것이네. 공부는 힘 있을 때 몰아붙여야 하는 것이네”라고 답변했다. 그는 이 답변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고 털어놓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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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시험은 제대로 치렀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