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실태(actus)와 가능태(potentia)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의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
“인간의 실존은 근원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셀=
철학자들은 인간을 고찰함에 있어서 매우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왔다. 단순히 인간과 동물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은 우주 안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유신론적인 사유를 가진 대다수의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사유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사유이며, 아마도 종교를 철학적으로 고찰할 때, 바로 이러한 인간의 특수성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부정한다면 종교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여러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인간은 근원적으로 '가능성'의 존재요,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 그 충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능태’와 ‘현실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이러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통해서 인간존재를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명제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혼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고 규정하였다. 라틴어에서 ‘actus’란 ‘현실태’ 혹은 ‘현실성’으로 번역이 되고, ‘potentia’는 ‘가능태’ 혹은 ‘가능성’으로 번역이 된다. 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면, 어린 베토벤에게 있어서 ‘음악가’로서의 ‘악성’은 순전히 ‘가능성’ 중에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훌륭한 음악인이 되었을 때, 이 악성은 비로소 ‘현실성’이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동하며, 이를 ‘실현’이라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모든 인간은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성’ 중에 있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죽음’을 ‘가능태’로서 지니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가능태’에서 ‘현실태’에로의 변화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의 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라는 데에 있다. 라틴어의 ‘actus’는 ‘행위’ ‘현실성’ ‘실재성’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특히 인간의 의식을 설명할 때 그 독특한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난다. 가령 내가 10만원의 비상금을 책갈피 속에 숨겨두었다고 하여도, 만일 내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10만원은 나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경우 10만원은 나에게 현실성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가능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책갈피 속에 10만원을 숨겨 놓았다고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 현실적으로 ‘10만원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나는 언제든지 그 10만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내가 비록 수업에 출석하였지만, 전혀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면, 나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수업’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비록 몸은 강의실에 있지만 ‘수업’은 나에게 있어서 전혀 현실성이 아니며, ‘가능성’ 중에 있다. 내가 현실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정신이 수업에 집중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내가 의식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한에서만 나에게 있어서 ‘수업’이 ‘현실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확대시키면 비록 내가 ‘불교인’이나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내가 ‘내가 불교인인 것’이나 ‘크리스천인 것’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다면, 그리하여 전혀 불교인답게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는다면, 불교인이나 크리스천은 나에게 있어서 전혀 현실적인 것이 아니며, 순수한 가능성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살고자 할 때 비로소 나는 불교인이고 크리스천일 수 있다. 물론 애초에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나와 무관하였다면 나에게는 이러한 것의 ‘가능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이러한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존재란 본질적으로 어떤 규정된 것, 한정된 것, 제한된 것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한계들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한계들, 이러한 규정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특성을 본성처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사실상 정신을 가진 존재 혹은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그것에서부터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이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고 싶다”, “~하고 싶다”는 갈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에 있어서 그 한계는 무엇인가? 사실상 순수한 갈망의 차원에서 보자면 ‘한계가 없는 것’이 인간의 갈망의 특징이다. 토끼는 고기를 먹고 싶어 하지 않고, 사자는 날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은 어떤 규정된 한계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그렇지 않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보는 것은 무엇인지 갈망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조건들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포기’하는 것을 아직 배우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갈망’에 있어서 ‘제외되는 것’이란 사실 없다. 그는 그가 보기에 좋은 것, 멋진 것은 무엇이나 가지고, 싶고 무엇이나 하고 싶고, 무엇이나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비록 현실적으로 이룰 수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갈망하고 상상이나 환상을 통해서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하고, 그것이 되고자 한다. 소설이나 영화 나아가 예술 등은 이러한 인간의 갈망을 간접적으로 채워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갈망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 갈망하는 것을 ‘가능성’으로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는 한, 이 어떤 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능태’로서 존재하며, 이 가능태는 나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서 언젠가는 ‘현실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가며, 무수한 ‘가능태’를 지니고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규정이 될 수가 없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을 하는 순간 나는 그만큼 내 안에 있는 어떤 ‘가능태’를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건강한 영혼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갈망들은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나에게 존재할 것들이다. 즉 나의 갈망이나 나의 가능성들은 내가 ‘포기’를 한다는 한에서만 나에게서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에게 있어서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죽음 이후의 일들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브리엘 마르셀 같은 철학자는 죽음이나 초월적인 세계와 관련된 것들 즉 종교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갈망’을 갈망(désir)이라고 하지 않고 ‘희망(espérence)’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곧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될 수가 있고 그 어떤 특성의 존재로도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천사와 유사한 존재도 악마와 유사한 존재도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야’, ‘나는 이러 저러한 성격을 타고 났어’, ‘이것이 내 운명일 수밖에 없어’ 하는 푸념들은 스스로 ‘인간이 지닌 존엄성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과 같다. 실존주의자들이 가장 염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즉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아니면 최소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척도이다. 내가 내 스스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곧 나에게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 내가 원할 만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이러한 것들을 끝임 없이 추구하는 삶이 곧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종교는 인생을 ‘나그네의 삶’ 혹은 ‘순례자의 삶’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탄생과 더불어 ‘수행자’이다. 부족한 자신을 교정하고, 자신의 잘못들을 수정하고, 불완전한 성격들을 완전하게 다듬어가는 것이 곧 인생이며, 인생은 영혼을 정화하고 성숙하게 하는 ‘수행의 장’인 것이다. 끊임없이 완전한 인격을 향해 정진하는 특성, 이것이 인간의 영혼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 되 물릴 수 없는 특성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는 이러한 인간의 ‘열려진 실존’을 환대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인은 마치 자동차의 부속품처럼 거대한 회사나 사회의 한 구성요소,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는 요소처럼 취급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분명한 유형을 가지기를 바라고, 어떤 종류의 성격과 기질을 가지기를 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만의 속성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 그곳에서 변하지 않는 매일의 작업을 충실히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인간유형의 구분은 옛 부터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혈액형으로 분류하고, 별자리로 분류하고, 손금이나, 얼굴의 생김새로 분류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지 이러한 분류가 곧 사실이거나 진실인 것은 아니다. 즉 한국인은 김치를 좋아하는 특성을 일반적인 특성으로 가지는 것이지, 모든 한국인이 곧 김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김치를 좋아한다고 무조건 한국인 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성격학>이니, <애니어그램>이니 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들에 대한 유형적 분류가 아주 전문적으로 이루어지고, 나아가 이러한 분류가 곧 개인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고 구분되면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그의 유형의 존재를 통해서 해명되고, 그의 행위들은 이러한 유형의 존재를 통해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는 혈액형이 A형이며, 스포츠를 좋아 합니다”라고 말하면, 전문가들은 “아니, 아니요, 당신이 A형이라면 조용히 생각하고 독서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니면 당신은 자신을 A형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애니어그램>에서 ‘머리(두뇌)형’이라고 분류된 사람은 머리형은 침착한 사람이기에 ‘붉은 색’의 옷을 입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앞으로는 하늘색의 옷을 입어라고 충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한다. 이는 마치 당신은 한국인이기에 ‘김치와 된장을 좋아해야만 한다’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형별 분류를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착각하고 이에 자신을 맞추어가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나에게는 더 이상 ‘가능태’의 합성은 없다고 하는 것과 같고, 결국 ‘자유로운 인간’, ‘가치 있는 삶’, ‘가능성의 인간’이라는 가장 소중한 인간의 본질을 외면해 버리는 것과 같다. 나의 가치 있는 삶은 나의 ‘가능태’가 ‘현실태’로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