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사랑을 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며 즐거움이다. 그렇다고 어떤 조건이나 목적을 위한 것도 아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느새 내 가슴속에는 한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것이기에 앞날에 대한 행불행을 알지 못하면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오를 수 있는 나무인지도 모르면서 그리움 조각을 켜켜이 쌓으면서 선하게 때로는 가슴이 저릴 만큼 고뇌하면서 사랑을 했다. 나무에서 떨어질 걱정을 미리 하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어디 있을까 마는 나도 그랬다.
청춘의 길목에서 한 번쯤 부딪히게 될 사랑의 열병, 풋풋한 가슴에 안겨 든 사랑이 미완성으로 끝난다 해도 뿌리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이 감정을 흔히 첫사랑이라 하는가 보다.
고향 읍내의 영업 관청에 근무하던 사회 초년생에게 연말이 가까워 오던 눈 오는 날 이름 없는 엽서가 날아왔다. 수신인 이름만 적혀 있는 이 엽서는 모조지로 만든 봉함엽서였다. 개봉해 보니 모조지에 잉크가 번져 있었다.
‘삼백육십오일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발신인 주소나 성명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 창구에 왔었다는 결론을 얻자 엽서를 전해 준 황 서기에게 물어보았다. 김양에게 전해 달라고 해서 받기는 했으나 그 청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대답이다.
그 시절 문방구에서 산 카드를 보낼 때는 우표 옆자리에 크리스마스실을 붙여 멋 내기를 좋아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있다는 증표로 받은 실은 우표보다 약간 컸으나 문양과 색깔이 고와 묵혀 두기가 아까웠던 때문이다.
시시해 보이는 이 엽서를 관심 밖으로 내몰아 버리면 어떻게 된 것이 자꾸 눈앞에 되살아나곤 했다. 궁금증만 남긴 초라한 이 엽서 한 장으로 열병에 감염이나 된 듯 긴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2월 중 순경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문학의 밤’이 열리던 날 초대된 그곳에서 청년을 처음 보았다. 체구는 왜소하나 지적인 용모에 표정은 밝았고 단정했다.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얼굴, 그런데 유창한 화술로 사회를 보고 있는 그 시간 내내 황홀한 꿈속이듯 그들과 같이 동화되기를 갈망했다.
그날 이후 두툼한 편지가 배달되었다. 정중하고도 세련된 문체로 자신의 신상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만큼 소개를 했다. 자기는 조실부모한 고아이며 현재 y대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방학 기간 C에서 아르바이트를, 고향은 휴전선 이북인데 누나가 한 분 C에 살고 있어 고향 같은 곳이라 했다.
그의 편지는 알 수 없는 향기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꼼짝없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가정교사나 학교생활에 짬이 없어 하는 그와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면서 누구도 먼저 만나자는 약속 없이 1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 군사우편 스탬프가 찍힌 그의 편지를 받고 신상의 변화를 파악했다. 편지는 다시 특급으로 발전을 했다. 편지 속에 그의 사진이 웃고 있었다. 턱을 고이고 앉아 물끄러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보고 싶어지는 것은 순수함을 잃어 가는 감정의 비약이 아니겠는가.
내 안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그를 어느새 그리워했다. 규범이나 관습뿐인 주변의 환경에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괴로움의 시작이라 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가진 것 없어 가난하여도 그에겐 정신적 풍요와 젊음이라는 재산이 있어 희망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많았던 그는 가끔 불투명한 앞날에 대해 불안과 초조함을 토로했다.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에게 찬란한 앞날이 있을 때까지. 간절히 소망했던 이런 마음이 얼마나 무모한 착각이던가. 세월은 나를 비켜 가지 않는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퇴근을 막 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휴가를 얻어 C에 내려왔다는 그의 들뜬 목소리는 반가움과 놀라움의 도가니로 나를 몰아넣었다. 아직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꿈만 같았다. 그와 나란히 걸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군복이 근사하게 어울렸다. 팔과 얼굴이 좀 그을린 듯했으나 전보다 건강해 보였다.
청초호를 휘 돌아가는 도로에는 뜸하게 지나가는 자동차가 있을 뿐 인가가 없어 한갓진 길이었다. 만개한 아카시아 꽃향기와 청초호 특유의 갯내음이 바람에 묻어왔다. 낙화하는 꽃잎의 흩날림은 짙어 가는 봄날의 전경이었으나 까닭 모를 슬픔이 훤하게 뻗은 길 위로 몰려들었다.
도로포장을 하기 위해 자갈을 펴놓은 길에서 나는 신경이 쓰였다. 울퉁불퉁한 자갈들은 보트형 새 구두를 엉망으로 망쳐 놓았고 그 앞에서 잘 보이려고 조심을 했다. 영화에서 본 잉그릿드 버그만의 그 짧은 머리를 흉내 내면서 유행의 첨단이라고 오만을 떨었었는데 왜 그와의 만남에서 그처럼 주눅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가뭇해 진 그와의 밀어들을 재생할 길 없으나 그동안 충실했던 각자의 감정들과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그가 진지하게 끄집어냈다. 그러나 정확한 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사사 받았다. 그가 권해 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와 대화의 보폭을 좁히기 위해 동서양으로 시야를 넓혀 문학작품을 읽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앞에 장애의 벽이 높아 갔다. 제대한 그가 정식으로 집안 아저씨를 통해 청혼의 다리를 놓았다. 그것은 별과 달이 억만년이 흐른다 해도 만나지 못하는 그런 운명이었다. 조실부모한 것이 그의 죄가 아닐 진데 가난도 걸렸다. 불투명한 그의 앞날과 늘어가는 여자의 나이, 도피 행각에 찬동할 수 없었던 나의 사고, 결국 탈출구가 없었던 우리는 배신과 배반을 하는 모순을 낳았다.
그의 자전적 소설에서 그는 오직 나의 별이었고 나는 그의 달이었다. 유성과 순월이라는 애칭으로. 5 년여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죽음의 시체가 되어 땅속에 매장되고 말았다.
글쓰기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많은 세월 나는 어쩜 그를 만나기 위해 글쓰기를 갈구했는지 모르겠다. 백발이 성성한 먼 훗날 한 번쯤은 만나게 되리라 했던 그의 마지막 편지가 어제같이 생생한데, 지금 그는 멀리 떠나고 부재중이다. 하늘과 땅이 너무 멀어 그와 만날 길이 없다. 별과 달, 멀리 바라볼 수만 있어도 제 빛깔로 제 자리에서 빛나면 그것으로 충분할 텐데.
무작정 당신이 좋았던 시절, 지금도 또다시 가슴을 휘저어 놓지만 울 수 없는 긴 세월이 어쩜 더 없는 서러움인지 모르겠다.